132화 Chapter 31. 뛰는 놈 그 위에 (1)
“수정 의견 없이…… 전면 폐기 권고받았습니다.”
시현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신약 연구도 바로 승인이 나는데… 의무기록을 활용한 연구가 왜?”
애초에 시현이 기획했던 연구는 환자의 차트를 데이터화 해서 입력한 뒤, 생존과 사망 여부를 주기적으로 학습시켜 향후 사망 가능성이 큰 환자들을 미리 선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차트’ 시스템이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 정보로 생존 확률을 알려주던 것에서 착안한 것.
환자에게 시술을 하거나 새로운 약을 투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특별히 위험할 것은 없었다.
“IRB에서는 AI 예측 모델을 일종의 진단 도구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환자 진단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이건 진단이 아니라 위험도 평가에 도움을 받겠다는 건데? 그걸 왜 그렇게 해석을……?”
“만약 AI 모델이 자살 위험도를 낮게 평가했는데, 실제로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도 하더군요.”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일 뿐이잖아? 누가 그것만 믿고 환자한테 설명을 그렇게 하나?”
시현 또한 권원주와 같은 생각이었다.
- 환자 진단은 담당 의사의 고유 영역이며, AI 모델이 예측한 결과는 자살 위험도 예측에 한해 도움을……
IRB 위원회에 항의 메일도 보냈고, 직접 찾아가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환자들의 의무기록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병원의 허가가 필요한데, IRB도 통과하지 못한 연구를 허락해줄 리 없었다.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리서치 센터와는 별도로 진행하는 연구.
SPN-1001 연구를 김석용에게 인계했을 때 강서현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과장님께도 말씀드렸어? 강도철 교수님이 IRB 위원장이신데 과장님하고 친하시지 않나?”
“보고는 드렸는데, 알겠다고는 하셨지만 아직까지 별말씀 없으십니다.”
일부러 승인을 안 해주는 것 같은 느낌.
권원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 또한 지금껏 몇 건의 연구를 진행하며 IRB 심사 서류를 준비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게 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거라 다음 회의 때까지 시간도 걸릴 텐데. 걱정이네…….”
“연구도 연구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권원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4년차 하도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년 지원자 얘기 혹시 못 들었어?”
“인턴 지원자요? 그게 왜요?”
최근 들어 부쩍 높아진 정신과의 인기 덕에 성적 좋은 인턴 몇몇이 관심을 보인다는 말은 들었다.
“‘그 인턴’이 정신과 지원한다고 하던데?”
“그, 그… 심소현 선생이 정신과를 쓴다고요?”
“뭐, 아직 확정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말이 있어. 우리 동기 희재가 걔 동아리 선배잖아. 자기 정신과 쓸 거라고 말하고 다닌다는데?”
하도영의 말에 레지던트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심소현이… 왜?’
회귀 전 심소현의 선택은 알고 있다.
그녀는 안과에 지원했고,
성적은 턱없이 모자랐지만 합격했다.
학교 성적과 전공의 선발 시험 성적이 훨씬 좋았던 다른 지원자는 교육수련부를 찾아가 항의했지만, 면접 점수가 당락을 갈랐다는 형식적인 답변뿐이었다.
일단 군의관을 마친 뒤라도 다시 안과에 지원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더는 항의하기 어려웠고, 눈물을 머금고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안과와 정신과는 접점이 없어.’
안과는 수술 비중이 큰 과에 속했다. 바이탈을 다루는 과만 아닐 뿐, 정교한 수술 실력이 어느 과보다 중요했다.
반면 정신과는 수술방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과였다.
단순히 인기 때문에 지원했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게, 정신과 인기가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 한들 마이너 중에서도 최고 인기과인 안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설마. 심소현이 정신과를 쓸 리가 없지. 과를 선택할 때 자기 적성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 안심하던 찰나.
딩동!
오늘따라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알림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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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재앙의 발걸음]
난이도 A+
강력한 재앙이 정신과를 들여다봅니다.
최선의 노력으로 과를 위기에서 지켜내십시오.
성공 조건 : 공정하고 투명한 레지던트 선발
성공 보상 : 50,000P + a
실패시 : ???
주의! 과의 근간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재앙입니다. 반드시 막아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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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하마터면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패널티가 물음표인 것도 바로 이해가 됐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응급실에서 환자 보는 것만 봐도 레지던트 4년 내내 사고를 치고 다닐 것이 뻔했고, 파급력은 상상초월일 터였다.
위이이잉.
바로 그때.
시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급실인가…….’
이 시간에 2년차가 된 시현에게 전화를 걸 응급실 인턴은 한 명뿐이었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 선생님, 심소현인데요. 두근거림과 불안 증상으로 방문한 여자환자분인데, 혹시 진료 봐주실 수 있을까요?
의국원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통화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응? 뭐지?’
주증상과 호출 목적을 밝힌 ‘비교적’ 멀쩡한 노티. 여전히 다른 인턴들에 비하면 뭔가 부실하긴 했지만, 첫인상이 워낙 좋지 않아서 기본적인 것만 해도 나쁘지 않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이게… 기저효과?’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가서 볼게요.”
통화를 마치자 레지던트들이 앞다퉈 시현에게 말했다.
“시현아, 못하는 거 있으면 제대로 혼내야 한다.”
“맞아! 정신과 녹록하지 않다는 것도 좀 알려주고 와!”
“선생님, 부탁드려요!”
환자 케이스 컨퍼런스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내던 그들이었으나, 심소현에 대한 생각만큼은 다들 비슷한듯했다.
모두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진 채, 시현은 응급실을 향했다.
* * *
잠시 후 응급실.
“선생님, 방금 오신 환자분인데 넘어진 뒤로 팔이 아프다고 합니다.”
심소현은 정형외과 레지던트를 상대로 노티를 하고 있었다.
“…….”
정형외과 레지던트는 처방을 입력하다 말고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다친 것인지. 통증의 위치와 강도는 어떤지. 붓기나 상처는 없는지.
정상적인 노티라면 으레 있어야 할 내용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설마 그걸로 끝…… 인가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레지던트를 향해 심소현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한 명 더 있습니다. 엉덩방아를 찧은 뒤로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환자인데요…….”
“…….”
아무리 인턴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적당히 엉망이면 호통이라도 치겠는데, 이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야! 네가 의사야? 환자 보호자야? 지금 그걸 노티라고 하고 앉았어? 아 놔! 내가 지금 씨…….”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치더니 이내 뒷목을 잡았다.
부원장 딸이라고 그동안 참았던 것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의 심소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분위기 안 좋네.’
별다른 검사 없이 정신과부터 노티한 것에 대해 지적하려 했으나, 이미 탈탈 털리고 있던 터라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일단 환자부터 보고 말하자.’
시현은 곧장 담당 환자가 누워있는 베드를 향했다.
[신희영 여/26 인턴 심소현 / R2 천시현]
외래 차트를 보니 평소 공황장애로 종종 정신과 진료를 받던 환자였다.
‘수액을… 달아놨네?’
기록을 보고 불안장애 환자라는 걸 미리 파악했는지, 바로 항불안제를 주사할 수 있도록 미리 수액 라인을 확보해둔 것 같았다.
그리고 환자의 침상 옆에 심전도 검사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Within Normal Limits]
정상 소견이라는 기계 판독이 맨 윗줄에 쓰여있었다.
‘뭐, 이 정도면…….’
아무것도 안 하고 환자부터 봐 달라고 하던 몇 달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신희영 님,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불안한 건 좀 어떠세요?”
“아까보단 좀 나아요……. 그런데 숨이…….”
후우. 후우.
환자는 여전히 숨이 차는지 심호흡을 하며 가까스로 호흡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안정제 바로 투여하겠습니다. 잠시만…….”
바로 그때.
시현이 처방을 입력하러 가려는데, 돌연 환자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쌕- 쌕-
‘이게 무슨…….’
환자가 숨을 내쉴 때마다 들려오는 특유의 호흡음.
천식 환자들에게 특징적인 천명음(wheezing)이었다.
“환자분, 혹시 평소에 천식 증상이 있으셨던가요?”
“아, 어렸을 때 좀 있었다고 들었는데…… 성인 되고 나서는 아주 가끔 있어요.”
“지금 숨소리가 좀 안 좋은데, 최근에 치료받은 적 있으세요? 언제부터 숨쉬기가 힘드셨나요?”
“그리고 보니 숨쉬기는 병원 오고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아까 여기 선생님이 약도 챙겨주셨는데.”
‘약을 줬다고?’
[SORA : 신희영 환자의 의무기록을 출력합니다.]
[인데놀 20mg PO by Dr. 심소현]
레지던트 허락 없이 임의로 처방한 약에 시현은 경악했다.
인데놀은 베타 차단제의 일종으로 심박수를 낮춰 두근거림에 효과가 있을 수도 있으나, 천식으로 인한 호흡곤란은 악화시키는 약물이었다.
그저 두근거린다고 하니 인데놀을 처방한 것이 분명했다.
기본적인 히스토리도 확인하지 않고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차라리 더 낫겠다.’
가만히라도 있었더라면 최소한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 테니까.
“인턴 선생님, 잠깐 봅시…….”
부원장 딸이든 뭐든 이건 가만두면 안 될 일이었다.
시현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심소현에게 다가가는데,
“야! 너! 왜 보라는 환자는 안 보고 인턴 갈구는 거야? 레지던트 되더니 올챙이 적 생각 못 해?”
한 중년 남성이 정형외과 레지던트를 몰아세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 부원장님,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넘어져서 팔 다친 환자가 정형외과 환자야 아니야?”
“정형외과 환자… 맞습니다.”
“맞으면 보면 되잖아? 부족하면 네가 더 진찰하고! 어차피 X-ray 찍을 거 아냐? 그럼 됐지 무슨 말이 많아?”
심철호의 말에 레지던트는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서슬에 시현 또한 한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심소현을 다그쳤다가는 정신과 환자인데 왜 안 보고 있냐는 말밖에 더 나오겠는가.
“앗, 선생님!”
조용히 스테이션으로 들어가 처방을 입력하려는데 심소현이 시현을 불렀다.
“환자분 두근거림 있다고 하셔서 심전도도 찍고 수액도 달고 미리 인데놀도 처방했어요!”
“…….”
시현을 바라보며 ‘나 잘했죠?’ 하는 표정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빠! 여기 정신과 2년차 선생님인데, 평소에 제 노티는 따로 받아주시는 분이에요!”
“오,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우리 심소현 선생이 정신과에 관심이 많다고 하던데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앞으…… 로도?’
웃으며 건네는 말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
할 말을 찾는 사이 심철호는 이내 응급실을 떠났고, 시현은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환자 처방을 입력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심소현이 후배로 들어온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그의 표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 채이진 선생님.”
“표정이 안 좋은데…… 커피 드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