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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33화 (133/195)

133화 Chapter 31. 뛰는 놈 그 위에 (2)

“선생님,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그의 표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 채이진 선생님.”

“표정이 안 좋은데…… 커피 드실래요?”

“아, 이 환자… 마저 보고요.”

“아까 보니까 Wheezing(천명음)이 있던데 벤톨린(기관지 확장제) 쓰시고 산소 주시면 될 거예요.”

묻기도 전에 적절한 처방을 알려주다니.

채이진의 등 뒤로 후광이 켜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항불안제와 함께 기관지 확장제를 처방하자 금세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신희영 환자의 치료 진척도가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 33 -> 78]

천식이 있기는 했지만, 공황 증상 자체는 그리 심한 편이 아니어서 치료가 힘들지는 않았다.

* * *

“주문하신 아이스 카라멜마끼야또 나왔습니다.”

음료 트레이를 받아들고 두 사람은 카페 테이블에 앉았다.

“그 환자 천식인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아, 그 옆 베드에 누워있던 환자가 제 환자라서요. 숨소리가 거칠길래 잠깐 봤어요.”

“인턴이…… 환자가 두근거린다고 하니 인데놀을 줬더라고요.”

차가운 커피를 쭉 들이키자 타는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 그래서…… 그 인턴 선생님 정신과 쓴다는 말이 있던데요?”

“네. 저도 들었어요.”

“아무리 부원장님 딸이라고 해도 정신과에 성적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지원한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인턴 때는 쓰고 싶은 과가 수시로 바뀌잖아요?”

채이진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닥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미 퀘스트 창에서 보지 않았던가.

이대로 가면 심소현은 내년 정신과 레지던트가 되고 만다.

“아, 선생님. 그때 얘기했던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불편한 기색을 감지한 채이진이 화제를 돌렸으나, 시현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IRB 통과가 안 되어서 아직 시작 전입니다.”

“네? 사실상 리스크가 없는 연구 아닌가요? 어떻게 그런…….”

채이진의 반응 또한 권원주와 비슷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IRB 위원들 생각이 그렇다고 하니 다른 주제를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좀 아쉬운데요? 계속 학습하고 성장해나가는 모델을 만들어낸다면 분명 도움이 될 텐데요.”

“그렇겠죠…….”

정작 가장 아쉬운 건 시현 본인이었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신경망 모델.

처음 시작할 때는 예측력이 떨어질 수 있겠지만, 데이터가 쌓여갈수록 더욱 정교한 예측이 가능해진다.

시간이 흘러 ‘세상의 모든 차트’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다면, 언젠가 회귀자로서의 이점이 사라진다 해도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이번 연구…… 혹시 다른 방법은 없는지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고마워요.”

자신과 같은 레지던트 신분이니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뭔가 힘이 되는 말이었다.

* * *

일주일 뒤. 삼아대병원 원장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몰랐습니다. 미리 연락 주셨다면 좋았을…….”

“미리 연락했으면? 뭐 다른 거라도 보여주려고?”

“아, 아닙니다.”

원일웅이 쩔쩔매는 상대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불편하게 생각할 것 없네. 다들 잘하고 있나 보러 왔어. 이 실장.”

그는 고개를 돌려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를 불렀다.

“네, 회장님.”

“상반기 경영 지표는 좀 어떤가?”

병원 일임에도 원일웅에게 묻지 않고 굳이 자신이 데려온 수행원에게 묻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원일웅은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료과별 수입은 비슷하고 부대시설 매출 증대로 올해 추정 영업 이익은 870억 정도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군. 병원치고는.”

백발의 노인, 삼아 그룹 회장 강태정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수익 증대를 위해 VVIP를 위한 진료 공간을 확보할까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지확보를 위해 여러 진료과와 논의 중입니다.”

누그러진 분위기를 틈타 원일웅이 말했다.

“그래. 그건 어디로 들어갈 생각이지?”

“원래는 응급실 공간을 활용할 생각이었는데, 여론이 좋지 않아서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적자가 많은 부서 위주로 병동을 줄이는 방안을 생각했는데…….”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과별로 이권이 걸린 문제라 조율이 쉽지 않습니다. 조만간…….”

원일웅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강태정의 시선은 이 실장을 향해있었다.

“원래는 정신과 폐쇄병동이 있던 자리에 새로 병동을 만들려고 했는데, 올해 들어 갑자기 매출이 늘고 흑자 전환을 하는 바람에 설득에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올해 들어서? 몇 달 만에 말인가?”

“네. 자세한 사항은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원일웅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외부인인 이 실장이 병원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지만, 아직도 강태정이 자신보다 그를 더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건 차차 더 알아보도록 하고……. 리서치 센터 쪽은 어떤가?”

강태정이 시선이 왼편에 앉아있는 강병우를 향했다.

“신약 임상시험 의뢰는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고, 현재 시장에 출시할 수 있는 유력한 약물도 한 종류 확보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데. 어떤 약인가?”

“항우울제인데, IM바이오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약물입니다.”

“우울증 약이면 정신과 쪽 약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정신과 병동은 연구에도 꼭 필요해서 원장님이 유지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병우가 원일웅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폐쇄병동은 건드리지 말자고 여러 번 이야기 했음에도 꿈쩍도 안 하던 그였다.

강태정이 온 김에 확실히 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연구 담당자가 서현이인데, 요즘 아주 열심입니다.”

“그래? 서현이가 어려서부터 아주 똑 부러졌어. 기대하지.”

강태정의 얼굴에 처음으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 실장이 좀 더 신경 쓰도록 해.”

“예. 회장님.”

원일웅과 강병우의 표정에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병원에 오셨는데, 근처에서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시지요.”

“맞습니다. 식사 같이한 게 언제인지…….”

“그건 다음에. 오늘은 급하게 가볼 곳이 있어.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두 사람이 권하는 식사 자리를 뿌리치고 강태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가보셔야 할 곳?’

‘중요한…… 약속?’

천하의 강태정이?

그가 시간에 맞춰 만나야 할 인물이라면 누구일지 얼른 상상도 되질 않았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그는 원장실을 벗어나 곧장 대기 중인 차량으로 이동했다.

“이 실장.”

강태정이 돌연 중년 남성을 불러 세웠다.

“오늘 저녁 일정은 확실히 비워뒀겠지?”

“네. 조 대표에게도 따로 연락했습니다.”

“그래. 그 친구 몇 달 전부터 보자고 했는데…… 미안하게 됐군.”

“그런데 회장님…… 어떤 분을 만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강태정은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집으로 가지.”

“……네? 혹시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그럼 병원에 오신 김에…….”

집으로 가자는 말에 중년 남성이 놀라서 되물었다.

“아냐. 그런 거. 자네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도록 해.”

그저 집에 가려고 국회의원과 잡은 일정을 취소한다니.

처음 보는 모습에 중년 남성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 * *

한 시간 뒤. 삼아그룹 회장 자택.

강태정을 태운 차가 미끄러지듯 정문을 통과했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음. 그래…….”

운전기사의 말에 강태정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은 부지.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노송들과 곳곳에 배치된 귀한 조경석이 운치를 더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지상 3층의 저택이 웅장한 모습으로 있었다.

30여 년 전, 그가 삼아그룹 회장에 취임할 무렵 지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미려한 외관의 건물이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집안에 들어서자 단아한 인상의 중년 여인, 유 집사가 그를 맞았다.

“안사람은?”

“사모님은…… 아가씨 방에 계십니다.”

강태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자 중년 여인이 말했다.

“제가 모시고 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지.”

강태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모님, 회장님 오셨습니다.”

2층 끝방 문을 열자 빈방엔 강태정의 아내, 이태희 여사가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아내에게, 강태정이 다가가 말했다.

“여보, 나 왔어.”

“오셨…… 어요?”

그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태정을 맞았다.

“흠. 한동안 안 오더니 왜 또 여길…….”

강태정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 Harrison’s Principles Of Internal Medicine

- Sabiston Textbook of Surgery

……

……

- Guyton and Hall Textbook of Medical Physiology

책꽂이를 가득 메운, 지금은 구판이 되어버린 의대 교과서들.

넓은 정원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놓인 원목 책상.

그 위에는 낡은 청진기와 함께 은색 명찰 하나가 놓여있었다.

[내과 강서연]

그 이름에 강태정의 한쪽 가슴이 아려왔다.

“이만 나가지.”

“…….”

“그 아이 간 지도…… 20년이 다 됐어. 이제 이 방도 그만 정리했으면 해.”

이태희 여사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다.

“잠깐만요. 여기 조금만 있다가…….”

울먹이는 그녀를 강태정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본과 1, 2학년 때인가 이 무렵이었을 거예요. 시험 기간이면…… 밤새 공부하고 아침에 잠깐 옷 갈아입으러 왔다가 금방 또 나가곤 했었잖아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그때 이야기를 왜 또 꺼내고 그래?”

“레지던트 때도 그랬어요. 밤늦게 잠깐 집에 들렀다가 안 좋은 환자 있다고 급하게 병원으로 뛰어갔었죠.”

“…….”

아내의 말에 강태정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냥 이 방에 있으면, 다시 올 것만 같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거짓말처럼…….”

오래전 가슴에 묻었다고 생각했건만,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은 그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알겠어. 이제 일어나자고. 저녁도 먹어야지.”

“네…… 그래야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를 향해 강태정이 말했다.

“당신 놀라게 해주려고 따로 이야기는 안 했네만, 오늘 저녁에 ‘그 아이’가 오기로 했어. 곧 올 때가 됐는데.”

“네? 누가 온다는 말씀이세요?”

되묻는 이태희 여사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이진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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