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Chapter 31. 뛰는 놈 그 위에 (3)
“당신 놀라게 해주려고 따로 이야기는 안 했네만, 오늘 저녁에 ‘그 아이’가 오기로 했어. 곧 올 때가 됐는데.”
“네? 누가 온다는 말씀이세요?”
되묻는 이태희 여사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이진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
* * *
“이진이냐? 아이고, 우리 손주…… 많이 컸네.”
이태희 여사가 채이진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할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병원에서 오는 거야? 배고프겠다. 어여 내려가자.”
채이진을 데리고 아래층을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방금까지 구부정한 자세로 힘없이 앉아있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어디 보자. 이진이가 레지던트 2년차였던가? 자주 좀 오지 그랬니. 할미가…… 얼굴 잊어버리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막내 손녀에게서 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시절의 딸이 살아 돌아왔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죄송해요. 그동안 일이 바빠서…….”
채이진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바쁠 때지. 암, 바쁠 때고말고. 네 엄마도 그맘때 한참 그랬었어.”
이태희 여사는 가정부들을 물리고 채이진의 밥과 국을 손수 챙기며 말했다.
“많이 들어. 그래야 몸이 축나지 않지.”
“네, 할머니.”
손주를 챙기는 할머니의 모습에 강태정은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바빠서 못 온 게 아니지…….’
막내딸 강서연이 30대 젊은 나이에 요절한 뒤, 사위인 채종우와 채이진은 삼아 그룹 쪽 사람들과 점차 멀어져갔다.
처음에는 간간이 가족 행사에 얼굴을 비추던 그들이었으나, 몇 년이 지나자 거의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행여 자신에게 떨어질 삼아 그룹 계열사 지분이 줄어들까 다른 자녀들이 두 사람을 은근히 견제했기 때문이었다.
“병원 생활 잘하고 있니? 힘들지는 않고?”
“이제 2년차가 되어서 많이 나아졌어요. 같이 일하는 동기들도 모두 잘 대해주고요!”
“그래. 다행이구나…….”
씩씩하게 대답하는 손녀딸을 보며, 강태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많이 닮았어.’
새하얀 피부에 총기가 흐르는 눈.
아내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표정까지.
막내딸이 내과 레지던트였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겉모습뿐 아니라 성품도 빼다 박았다.
재벌가 막내딸로서의 편한 길을 마다하고 굳이 의대에 진학한 것도 그렇고, 그저 한 사람의 임상 의사로서 환자 진료에만 몰두하는 면이 그랬다.
경영자보다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그녀의 오빠인 강병우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원내 요직과 삼아의료재단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그와 강서연은 결이 달랐다.
“그래도 할애비가 도움 될 만한 게 있으면 뭐든 이야기하거라.”
“…….”
가끔 손녀딸을 볼 때마다 했던 말이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비슷한 반응이려니 생각하던 찰나.
“실은 오늘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 왔어요.”
‘이진이가 부탁을 하러 왔다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강태정의 눈이 커졌다.
* * *
“그래, 편하게 이야기해보려무나.”
식사를 마치자 테이블에 다과가 올라왔다.
“진행해보고 싶은…… 연구가 있어요.”
‘연구라니.’
손녀가 원하는 것은 특정 지위도 경제적 지원도 아니었다.
그저 의사로서 환자를 보는데 필요한 지식을 생산해내는 연구일 따름이었다.
“그거라면 내가 병우에게 따로 이야기해두마.”
“그게… 리서치 센터와 할 수 있는 연구는 아니에요.”
“리서치 센터에서 할 수 없다고?”
강태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의학 연구이기는 하지만 약물보다는 데이터를 이용한 인공 지능 연구에 더 가까워서요.”
삼아대병원 리서치 센터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연구 시설이기는 했으나, 주된 연구 분야는 신약 개발과 임상시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인공 지능이라.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게……?”
“네, ‘삼아전자’의 지원을 받고 싶어요.”
그 말에 비로소 강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아전자는 삼아 그룹을 대표하는 기업.
오늘날의 삼아를 있게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그래. 확실히 그 분야라면, 전자에 있는 인재들이 국내 최고라고 할 수 있지.”
삼아전자는 최근 하드웨어 위주의 경쟁에서 벗어나 미래 먹거리 사업의 일환으로 인공 지능에 대한 투자도 늘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연구를 위한 연구라면 지원해주기 어렵단다.”
“여보, 그래도 이진이가 부탁하는데 당신이 얘기 좀…….”
이태희 여사의 말에도 강태정은 여전히 냉정한 태도로 말했다.
“정확히 어떤 연구를 하고 싶은지 들어보고 싶구나. 모든 투자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하니까.”
사실 손녀가 처음으로 하는 부탁인 만큼 무조건 도와줄 생각이기는 했으나, 강태정은 짐짓 어려운 기색을 내비쳤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실무자의 관점에서 성공 가능성을 면밀하게 따져보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사망 확률이 높은 환자들, 특히 자살 위험도가 높은 환자들을 조기에 발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볼까 해요.”
“자살 위험도라면…… 정신과랑 함께 하는 연구냐?”
“네. 정신과 그리고 응급의료센터와 함께해 볼 생각이에요.”
강태정이 입을 굳게 다문 채 턱 끝을 매만졌다.
‘아까 병원에서도…….’
그는 아들과 사위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원일웅은 정신과 병동 자리에 VIP 전용 병동을 만든다고 했고, 강병우는 항우울제 신약을 개발한다고 했다.
이제는 손녀딸까지.
공교롭게도 모두 정신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기는 하다만, 병원 안에서 하는 연구라면 모를까 기업을 움직이려면 돈이 되는 일이라야 하지 않을까?”
“당장은 돈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미래를 내다본다면 꼭 필요한 일이에요.”
“꼭 필요한 일이라…….”
“언젠가는 AI가 진료를 보조하고 의사결정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얼마나 뛰어난 시스템을 보유했는지가 병원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이건 오직 삼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학병원과 인공 지능 개발 인력을 모두 보유한 곳은 ‘우리 삼아’ 뿐이니까요.”
그 말에 강태정이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늘 외가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오던 채이진이었다.
그런 손녀와 접점을 갖기 위해 한국대병원 대신 삼아대병원을 쓰도록 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우리 삼아’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구는 꼭 도와줘야겠군.’
강태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 일을 계기로 손녀딸을 그룹 내에 묶어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다. 그 건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대신 앞으로도 집에 종종 들러줬으면 좋겠구나. 네 할머니가 이렇게 너를 기다리는데……. 그리고 도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아, 마침 말씀드릴 게 한 가지 더 있는데요.”
강태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채이진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한 가지가 더?’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지금껏 없던 일에 강태정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며칠 뒤, 삼아대병원 원장실.
“이 실장님이 어쩐 일로?”
원일웅의 눈앞에 강태정 회장의 비서실장 이명호가 서 있었다.
“회장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원장님께 상의드릴 것도 있고요.”
“아, 그렇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병원 소속도 아니었고 특별히 업무적으로 얽힌 것도 없었지만, 그를 대하는 원일웅의 태도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갑자기 무슨 일로…….’
불과 며칠 전에 병원에서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터라, 오늘 방문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그런데 옆에 같이 오신 분은?”
원일웅의 시선이 이명호의 옆에 선 남자를 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전자’에서 일하고 있는 박동진이라고 합니다.”
그가 건넨 명함을 받아들었을 때, 원일웅의 눈이 커졌다.
[삼아전자 R&D 센터 전무 박동진]
‘전무급이…… 직접 왔다고?’
그룹 내에서 삼아전자의 위상은 남달랐다.
다른 계열사에 비해 매출도 시가 총액도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삼아에는 ‘전자’와 ‘후자’가 있다는 말까지도 있었다.
삼아전자의 전무급이라면 다른 계열사의 부사장급과도 맞먹는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일 텐데.
굳이 시간을 내서 병원을 찾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반갑습니다. 전자 소속 이사님은 오랜만에 뵙는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빅데이터와 AI 연구를 진행해보라는 회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원일웅의 질문에 이명호 비서실장이 대신 대답했다.
“AI…… 요?”
“네. 제조업 분야에서 우리 삼아의 경쟁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소프트웨어 쪽은 아직도 한참 더 따라가야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병원에서 그런 주제로 연구할 것이 있을지…….”
“네, 맞습니다. 병원에 의사 선생님들도 많이 계신데, 저희가 앞서서 막무가내로 진행할 수는 없는 것이고…… 기존 연구 중에 저희가 기술적으로 보조할 부분이 있는지 스크리닝해보고자 합니다.”
“그렇군요. 최근 진행 중인 연구 중에 AI 관련된 부분이 있다면 정리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 모든 의학 연구는 IRB, 그러니까 의학연구윤리심의위원회 승인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요. 거기로 접수된 연구들을 직접 검토해보고 싶습니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테니 병원은 데이터만 내놓으라는 건가.’
병원에서 선별한 자료를 신뢰하지 않고 직접 연구 주제를 찾겠다는 뜻.
그의 말에 원일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IRB 위원장에게 이야기해두도록 하지요. 그래도 의학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연구인 만큼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께서 이번 일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기분이 상할 일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강태정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삼아 그룹의 사위라고 하더라도 그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는 저 이명호 실장과 직접 마주한 상황에서, 굳이 비협조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
한참 동안 연구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나 분위기는 시종일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원장님, 나쁜 소식도 하나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쁜 소식이라면……?”
이명호의 말이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요즘 그룹 내에서 안전사고나 인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참, 허구한 날 대기업 물어뜯는 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오죽하면 병원에서도 별것도 아닌 일로 언론사에 제보하겠다고 하는 환자들이 있을 지경이니까요.”
“맞습니다. 삼아 그룹의 언론 장악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고요. 그래서 회장님 특별 지시로 몇 년 전부터 계열사별로 ‘조직 진단’을 진행하고 있는데, 알고 계신지요?”
조직 진단.
경영 효율을 추구하고 혹여 발생할 수 있는 인사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계열사를 관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검토 주제도 광범위하고 고강도의 조직 개편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아 경영자 입장에서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였다.
“조직 진단이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원일웅이 반문했다.
병원의 경우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높은 편도 아니었고, 사고라고 해봐야 의료사고가 전부라 그동안 신경쓰지 않고 지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안타깝게도, 올해 조직 진단 대상으로 삼아대병원 본원이 선정되었습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이명호의 말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