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Chapter 31. 뛰는 놈 그 위에 (4)
“안타깝게도, 올해 조직 진단 대상으로 삼아대병원 본원이 선정되었습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이명호의 말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병원 운영에 관여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직접적인 관여보다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미리 평가하고 예방하겠다는 뜻입니다.”
“지금껏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텐데요. 일부 과에서 적자가 생겼던 것은 그릇된 수가 체계 때문이지 경영자로서의 역량 문제는 아니라는 거, 실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입니다. 다른 계열사라면 모를까…… 원장님께서 경영 지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선하려 하신다는 것도 저희도 잘 알고 있지요. 병원에서 저희가 여겨볼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경영 지표가 아니라면 무슨……?”
뼛속부터 사업가인 장인, 강태정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돈 문제 말고 또 있었던가.
원일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의학전문대학원 학생 선발이나 직원 채용 과정의 공정성이나 치료 과정에서의 특혜는 없는지…… 언론에서 공격받을 부분은 없는지 중점 점검할 예정입니다.”
“…….”
차라리 경영 지표라면 관리가 쉬웠다.
돈 되는 사업을 더 밀어주고 적자가 생기는 곳은 과감하게 줄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방금 이명호가 말한 것들은 훨씬 더 까다로웠다.
‘직원 채용은 인사권…… 특혜는 의료진 권한을 축소하겠다는 건데…….’
“얼마 전 의학전문대학원 입시 비리로 전국이 떠들썩한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성적과 수능 시험으로 의예과 1학년을 선발할 때와 달리, 의학전문대학원으로 학생을 선발하기 시작하면서 의과대학과 병원의 권한이 커진 것이 사실이었다.
사회 고위층 그리고 교수 자제들이 인맥을 이용해 허위 스펙을 만들어 가산점을 받고, 면접 점수를 몰아 주는 방법으로 부정 입학을 한 사례들이 발견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삼아대 의대와 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 올해 지원자들부터는 그룹 차원에서 모니터링을 할 생각입니다.”
“의대 입시야 그렇다 치지만, 직원 채용은 인사권 문제 아닙니까? 병원의 고유 권한인데 그걸 두고 왈가왈부한다는 건 월권 아닙니까? 아무리 그룹 차원이라지만…….”
“아, 오해는 마십시오. 인사권을 침해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논란의 소지가 있을 법한 부분들을 미리 발견해서 알려드릴 뿐인 거지요.”
“…….”
“최종 판단은 경영자이신 원장님께서 내리는 것이고요. 저희 의견은 어디까지나 ‘권고’일 뿐이니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조직 진단팀에서 지적하는 사안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버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십 년을 봐 왔지만, 강태정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처가의 후광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병원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강태정이 사위인 자신보다 이 실장을 더 신뢰하는 것도.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 * *
1달 뒤, 정신과 의국.
“슬슬 가을이라 내년 지원자들 평가해야 할 시기인데, 내년 1년차들도 지금 1년차들 만큼만 했으면 좋겠다.”
권원주가 김원기와 노민혜를 보며 말했다.
원래도 뛰어난 레지던트들이었지만, 시현의 영향으로 회귀 전과 비교하면 실력이 월등히 좋아졌다.
“어휴, 무슨 걱정이세요? 벌써 지원자만 다섯인데 그중에 좋은 사람 없을까 봐요?”
3년차 권진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긴, 우리 과 인기가 전보다 많이 좋아졌지?”
“민혜랑 원기도 지원자들 잘 파악해둬야 해. 교수님들이 1년차 의견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니까.”
“네, 선생님.”
1년차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심소현인가? 그 부원장님 딸도 관심 있다고 했다면서. 아직도 정신과 쓰겠대?”
“네. 아직까지도 주변에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는데요?”
“음. 그건 좀 걱정인데. 심철호 교수님이 작정하고 밀면…… 굉장히 유리하지 않을까? 다른 경쟁자들이 밀릴 것 같은데.”
부원장 심철호.
병원 내에서는 원일웅 라인으로 차기 원장까지도 노려볼 만한 인물.
그의 후광이라면 전공의 시험 성적이 다소 부족해도 면접 점수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 터였다.
레지던트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자자하지만, 심소현이 차기 1년차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런데 올해 지원자 중에 제일 괜찮은 사람은 누구 같아?”
권원주가 고개를 돌려 1년차들에게 물었다.
“저는 지금 응급실 돌고 있는 고채연 선생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환자도 잘 보고 성실하고…….”
“저는 장미은 선생님이요. 학생 때부터 정신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정신과 인턴 돌 때도 잘했었고…….”
권원주의 질문에 김원기와 노민혜는 각각 다른 인턴을 이야기했다.
‘사람 보는 눈이 제법이네.’
두 사람의 말에 듣고 시현은 조용히 속으로 웃었다.
고채연과 장미은.
회귀 전, 정신과에 최종 합격하여 시현과 2년을 같이 보낸 후배들이었기 때문.
당시 총 지원자는 8명이었는데,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만큼 레지던트 업무도 훌륭하게 잘 해냈었다.
“나도 그 두 사람이 좋은데…… 심소현 선생 때문에 둘 중 하나는 떨어지는 거 아냐?”
황진호의 의견도 1년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올해는 정말 예측이 어려워. 뚜껑을 열어봐야만 알 것 같아.”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하도영이 입을 열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현직 부원장인데…… 심소현이 유리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전체 레지던트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거 기억나?”
“아! 레지던트 지원할 때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 불이익은 없었는지 물어보던 거요?”
황진호가 기억난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맞아! 그 설문 조사가 삼아 그룹 본사에서 지시한 거라는 말이 있어.”
“본사에서요? 본사에서 왜 레지던트 선발에 관심을…….”
“글쎄. 요즘 시대 가치가 ‘공정’이라 그런 건지…… 말 들어보니까 의대 대학원 쪽도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아무튼, 교수 자제들 꼼수로 좋은 과 들어가는 거 올해는 힘들지 싶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예전처럼…… 그렇게만 되면 좋을 텐데.’
[퀘스트 – 재앙의 발걸음]
강력한 재앙이 정신과를 들여다봅니다. 최선의 노력으로 과를 위기에서 지켜내십시오.
최근에 받은 퀘스트가 아무런 변동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께름칙하긴 했지만,
레지던트 선발 과정을 본사에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위이이잉.
내년에 과에 지원할 인턴들 이야기가 한창일 때 시현의 전화기가 울렸다.
‘누구지?’
처음 보는 번호에 시현은 잠시 고민하다 수신 버튼을 눌렀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 안녕하세요, 천시현 선생님. 저는 삼아전자에서 근무하는 박동진 전무라고 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삼아전자… 전무?’
의외의 인물에 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회귀 전 기억을 되짚어봐도 삼아전자 쪽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네, 무슨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 선생님께서 최근에 구상하고 계신 연구 관련해서 의논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최근 연구라면?”
ASP-9022는 이미 임상시험을 시작했고, SPN-1001연구도 김석용이 담당하기로 했다.
제약회사도 아니고 삼아전자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연구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 연구 제목이…… ‘AI를 활용한 자살 위험도 평가’ 더군요. 최근에 IRB에 연구 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심사 통과도 안 된 연구를 외부인이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지만, 상대는 물을 틈도 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 마침 저희가 준비 중인 프로젝트와 방향이 겹치는 것 같아서…… 함께 연구 진행하실 선생님들과 한번 뵙고 싶은데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일정 조율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실무자도 아니고 전무이사가 직접?’
게다가 통화 내내 정중한 태도로 시현을 대했다.
연구에 관심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협조를 구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년 1년차 문제부터 새로 시작한 연구까지.
최근에 고민했던 잘 풀리지 않던 일들이 동시에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 * *
일주일 뒤, 삼아대병원 대회의실.
“반갑습니다. 일전에 전화 드렸던 박동진입니다.”
“정신과 레지던트 천시현입니다.”
회의에 앞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눴다.
“일단 IRB에 제출하신 연구 계획서는 검토했습니다만, 그래도 연구를 기획하신 선생님 생각을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박동진의 말에 시현은 연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우… 많이들 오셨네.’
삼아전자 쪽 사람들이 대거 참석한 터라 평소 리서치 미팅을 진행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회의실을 메웠다.
시현은 좌중의 면면을 살폈다.
일단 정신과에서는 정세일 교수와 연구 담당 레지던트인 김석용이, 응급의학과에서는 조광필과 치프 레지던트가 참석했다.
- 오늘은 학회 때문에 참석을 못 할 것 같아요. 나중에 회의 결과 알려주세요.
처음 아이디어를 냈던 채이진이 불참인 것은 아쉬웠으나, 일단 연구를 직접 수행할 사람들은 모두 모인 셈이었다.
의외의 인물들도 눈에 띄었다.
‘원장단에서 왜?’
원일웅과 심철호 그리고 IRB 위원장 강도철 교수까지.
연구 승인이 거절됐을 때, 여러 번 면담을 신청했으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 주지도 않았던 인물이었다.
시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박동진이 말했다.
“이제 다 오신 것 같은데, 시작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이 연구 꼭 성공시켜야 해.’
[SORA : ‘존재감 포션’을 사용합니다.]
이내 가운 뒤로 후광이 번지고.
청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연구 계획이 요약된 슬라이드를 띄웠다.
“국내에서 자살로 인한 사망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11년째 자살률 1위라거나 노인 자살률이 특히 증가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짧게 언급한 뒤, 시현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여기, 한 환자가 있습니다.”
다음 슬라이드에는 초진 기록지 한 장이 띄워져 있었다.
“초조감을 주소로 응급실을 방문한 55세 남성이며,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환자는 최근 실직했지만 새로 취직하여 출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아내와 취업 준비 중인 딸이 있었고…….”
시현은 의료인이 아닌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에 공을 들였다.
“환자는 응급실에서 안정제를 투여받았고, 이내 호전되었습니다. 자살사고는 전적으로 부인했으며, 환자와 보호자 모두 퇴실을 원하여 일주일 뒤 외래진료를 예약한 뒤 귀가했습니다.”
마치 눈앞에서 환자를 직접 보는듯한 생생한 보고를 마치고 시현이 말했다.
“일주일 뒤, 이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현의 질문에 몇몇 사람들이 손을 들어 의견을 냈다.
“가벼운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고 안정제 투여 후 호전되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느낌이 안 좋아요. 좀 걱정이 되는데요?”
같은 발표를 듣고도 사람마다 생각이 달랐다.
“정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증례 하나를 더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시현이 슬라이드를 넘기자 이번에는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거 아까랑 같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러게…… 완전히 똑같아.”
나이, 주증상, 실직 후 출근을 앞둔 상황.
자살사고를 부인하는 모습도, 심지어 아내와 취업 준비 중인 딸이 있는 가족관계까지도 같았다.
“안타깝게도 첫 번째 환자는 응급실에서 퇴실한 후 약물 과량 복용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환자는 가족들이 환자의 자살 시도를 막은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두 증례를 번갈아 보며 모두가 같은 질문을 떠올릴 무렵, 시현이 입을 열었다.
“이제 두 환자의 경과가 달랐던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