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Chapter 31. 뛰는 놈 그 위에 (5)
“같은 증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은 두 환자였지만, 담당 의사의 설명이 달랐습니다.”
시현의 말에 좌중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의무기록을 검토한 바에 따르면, 첫 번째 환자에게는 자살 위험도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두 번째 환자에게는 자살 위험도가 매우 높으니 입원이 필요하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환자 곁에서 떠나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의사가 다른 설명을 한 이유는 뭔가요? 의사의 역량이 달랐다는 건가요?”
박동진 전무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증례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두 환자를 진료한 의사는 같습니다.”
“같은 의사가 비슷한 환자를 봤는데…… 전혀 다른 판단을 했다는 거군요. 도대체 왜 그런 차이가?”
“환자를 진료한 시점이 달랐습니다.”
단순히 안타깝다는 감정을 넘어 몹시도 후회된다는 듯,
시현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첫 환자를 진료했던 것은 레지던트 1년차 12월, 그리고 두 번째 환자를 진료한 것은 2년차가 된 이듬해 12월입니다.”
“1년 동안 성장을 한 거군요. 환자의 자살 의도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레지던트 1년의 차이, 그것도 처음 정신과에 입문하여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1년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환자는 면담 내내 자살사고를 숨겼습니다. 2년차 아니, 3년차가 환자를 봤다고 하더라도 보호자들에게 자살 위험성을 그토록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네요. 어느 대목에서 환자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박동진은 개발자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전무 이사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정신과 진료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어떤 변수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절로 호기심이 일었다.
“환자를 진료했던 레지던트에 따르면, 불안 증상은 약물 투여 후 이내 호전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환자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그런 직관을 데이터화할 수만 있다면, 환자 진료에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왜 이런 연구가 IRB 단계에서 폐기되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박동진의 코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손을 들었다.
“IRB 위원장 강도철입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 띤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환자의 운명을 갈랐던 것인지 저 또한 궁금하긴 합니다만, 이것이 의학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느냐는 별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의학 연구로서 적절하지 않다…… 왜 그렇죠? 실제 진료에 도움이 되면 그만 아닙니까?”
그의 말에 박동진이 반문했다.
“일단, 환자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모호합니다. 혈압, 혈당 그리고 분당 심장 박동수와 같은 지표들은 명확하게 수치화할 수 있는 반면에, 환자가 호소하는 불안감은 다소 모호한 개념 아닙니까?”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게다가 담당 의사가 느꼈다는 섬뜩함이라는 건 너무 ‘뜬구름’ 아닙니까? 느낌이 쎄해서 보호자에게 경고를 했더니 환자가 살았다더라……. 이런 부분을 연구에서 어떻게 다루겠다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그 말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원일웅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애초에 IRB에서 시현이 제출한 연구 계획서를 반려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지시 때문이었다.
‘어쩌다 이 연구가 전자 쪽 눈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막아야 해.’
만에 하나 연구가 성과를 낼 경우, IRB는 물론이고 뒤에서 계획서 반려를 지시한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삼아전자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다고 한들 의학 연구를 진행해 본 적은 없는 사람들 아닌가.
IRB 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연구 계획을 폄훼한다면, 이대로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컸다.
리서치 센터 쪽 연구야 강병우가 직접 관리하고 있으니 통과시켜 준다고 하더라도, 정신과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연구는 어떻게든 훼방을 놓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자살의 위험 요인은 기존 연구들에서도 충분히 다뤄진 바 있습니다. 평가 척도도 이미 개발되어 있고요. 기존 도구들만으로도 충분히 평가가 가능할 텐데, 이 연구의 장점은…… 글쎄요, 굳이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강도철은 시종일관 회의적인 태도로 고개를 젓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코멘트에 발표자인 시현은 생각에 잠긴듯했다.
‘날고 기어봐야 레지던트인데,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더는 반박하기 어려울 테지.’
원일웅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약간의 변수가 있었지만, 원래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던 찰나.
“말씀하신 대로 자살의 위험 요인과 평가 척도 연구는 그동안 수없이 많이 진행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살률은…… 전혀 줄고 있지 않을까요?”
시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건…….”
허를 찌르는 질문에 강도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알려진 모든 위험 요인을 숙지하면, 눈앞의 환자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할 생각만 했을 뿐, 실제 진료 현장에서 자살 시도 환자를 본 경험은 없던 그였다.
당연히 대안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첫 번째 환자를 놓치고 나서 담당 레지던트는 차트를 띄워놓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의무기록에서 찾은 증례라고 소개했지만, 실은 회귀 전 시현이 진료했던 환자였다.
보호자들에게 환자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당혹스러웠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차트를 여러 번 들여다봤지만,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모든 조건이 비슷했던 두 번째 환자를 봤을 때, 자연스럽게 첫 번째 환자를 생각해냈을 겁니다. 직관적으로 환자가 위험한 상태라는 것도 알았을 테고요.”
비록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시현은 곧바로 예전 그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환자와 면담한 내용뿐 아니라 근심 가득한 보호자의 표정, 그리고 몹시도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던 그 날 날씨와 어수선한 응급실 분위기까지도.
“그러니까, 예전 진료 경험은 일종의 입력값이고…… 환자의 생사는 출력값이라고 보는 거군요?”
“네. 환자의 의무기록을 입력하고, 생존 여부를 반복 학습시키는 방법으로 인공 신경망을 구축한다면 환자의 자살 위험도를 예측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시현의 의도를 이해한 박동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환자 정보와 경과를 끊임없이 학습하고 스스로를 보완해나가는 AI라면, 진료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레지던트라고 했는데 어떻게 저런 생각을…….’
지금껏 시도해 본 적은 없었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연구.
박동진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진 결과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도 의문입니다. 의사로서 좀 무책임하지 않습니까? 환자 판단을 AI에 의존하다니 도대체…….”
“상당히 많은 환자 정보가 필요한 연구로 보이는데. 환자 동의도 필요하고 개인정보 누출 위험이 있을 수도……. 아무튼, 이 주제는 IRB 승인이 어렵습니다.”
반면 원일웅과 강도철은 여전히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보이는데. 어떻게 설득할지…….’
하지만 이 두 사람이 협조하지 않으면 환자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시현이 말한 연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서실의 요청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살펴보니 지금 시점에서 꼭 필요한 연구였다.
가뜩이나 삼아전자 내부에서도 하드웨어에 비해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이 약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삼아대병원의 젊은 의사들과 협업하여 의료용 AI를 공동 개발했다고 하면 주목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
그것도 국가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자살 예방 분야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건 기회다. 회장님 눈에 들…….’
잠시 고민하던 박동진의 얼굴이 돌연 환해졌다.
“두 분께서 그렇게까지 반대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겠군요.”
그는 짐짓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고, 원일웅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입꼬리가 채 올라가기도 전에 박동진이 말을 이었다.
“아쉽지만 삼아전자 단독으로 진행해볼 밖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병원을…… 연구에서 배제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삼아대병원은 빠지셔도 됩니다. 꽤 가능성 있는 연구 같아 보이는데…… 안타깝습니다.”
상대는 삼아대병원 원장이자 회장의 사위였지만, 박동진은 거침이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여기 온 것도 강태정과 비서실이 원일웅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니까.
반문하는 원일웅의 눈썹이 꿈틀했다.
“병원의 허가 없이 환자 의무기록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환자 데이터가…… 병원에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동진이 원일웅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삼아대병원의 데이터 센터 구축을 누가 했는지 잊으셨습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아대병원의 의무기록은 병원 내 자체 서버에서 관리했지만, 최근에는 화재나 지진 등의 위험으로부터 기록 유실을 예방하기 위해 클라우드로 이전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던 곳이 삼아전자의 자회사 삼아데이터였다.
“아무리 삼아전자라고 해도 환자의 개인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불법일 텐데요.”
“물론입니다. 데이터 센터 구축하면서 의료정보의 이용과 연구 개발을 위한 국책사업에 삼아대병원을 비롯한 몇몇 대학병원이 참여했던 거, 기억하고 계시지요? 당연히 사전 심사를 받고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을 드릴 예정입니다.”
그 말에 원일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박동진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접근 권한을 요청한다면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병원에서 공식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하시니, 천시현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연구자분들은 개인 자격으로 저희 프로젝트에 합류하셨으면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박동진이 시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물론 병원 근무 외 시간을 이용해서요. 그에 합당한 수당은 따로 지급하겠습니다.”
병원의 간섭 없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인데, 거기에 추가 보상까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낭패다…….’
반면 원일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에 와서 적극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할 수도 없는 일.
결과적으로 삼아전자에서 제안한 연구에 딴지를 걸다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동진 전무를 처음 데려온 게 이명호 비서실장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일이 강태정에게 보고될 수도 있었다.
애초에 이광섭 과장을 압박하고 VIP 병동을 추진하려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커져 버렸다.
‘상황이 좋지 않군. 지금은…….’
원일웅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이 회의실을 떠나자 반가운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