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Chapter 31. 뛰는 놈 그 위에 (6)
‘상황이 좋지 않군. 지금은…….’
원일웅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이 회의실을 떠나자 반가운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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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 퀘스트 – 버티고 버텨 본진을 지켜라!]
난이도 S
성공 조건 - 김영화 환자의 우울 증상 호전(HAM-D <7) and 삼아대병원 폐쇄병동의 존속
성공 보상 : 50,000P
실패시 : 파견 근무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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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 융합 퀘스트 ‘버티고 버텨 본진을 지켜라!’의 모든 성공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system : 50,000P를 획득하였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상이 주어진다는 건…….’
김영화 환자는 TMS 치료로 우울 증상이 호전되어 곧 출산을 앞둔 상황.
퀘스트의 남은 성공 조건, 폐쇄병동 존속이 확실시되었다는 뜻이었다.
병동 폐쇄는 자살 고위험 환자 연구로 막았고, 연구 승인 거절은 삼아전자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안심인가.’
이런 상황이면 원장단에서도 섣불리 불이익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천시현 선생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박동진이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워낙 좋은 주제라서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저희 내부적으로도 논의를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조만간 실무팀과 함께 보도록 하죠.”
“네, 그때 뵙겠습니다.”
박동진은 시현과 다시 악수를 나눈 뒤 멀어져갔다.
“천 선생, 수고했어. 처음 해보는 연구 주제라 걱정했더니만…… 이거 완전 기우였네. 일이 잘 풀리려나 봐!”
삼아전자 쪽 사람들이 회의실을 나가자 정세일이 다가와 말했다.
원장단의 만류에도 삼아전자 쪽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기대감으로 들뜬 표정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 저도 걱정했었거든요.”
AI 모델은 더 많은 환자 데이터를 학습시킬수록 예측력이 상승한다.
어느 정도 쓸만한 수준으로 만들려면 최소한 수천 명 이상의 데이터가 필요할 터였다.
사실 적절한 환자를 선별하고 변수를 정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채이진에게도 레지던트 시절 수행하기는 어려운 연구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재계 수위를 다투는 삼아그룹, 그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아전자의 지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렇지. 하지만 그 부분도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야. 연구 방향만 제시하면 기술적인 부분은 전자에서 해결해줄 테니까.”
정세일의 말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력은 자체 인력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고 예산은 거의 무한대라고 봐도 좋았다.
또 다른 퀘스트, ‘나는 연구자다’의 성공 조건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 * *
같은 날 오후.
예정에 없던 회의에 원장단의 주요 인사들이 속속 원장실로 도착했다.
부원장 심철호, 기조실장 정유수 그리고 교육수련부장 전민성.
원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테이블에 앉자 원일웅이 입을 열었다.
“본사에서 말한 ‘조직 진단’이라는 거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최근 3년간 집행된 예산을 이잡듯이 뒤지고 있습니다. 신축 병동 건설비용부터 기존 병동 리모델링 공사 그리고 의학 정보실에 들어가는 도서구매 예산까지……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철호가 원일웅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가뜩이나 삼아전자 전무에게 망신을 당한 터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혀 달갑지 않은 말에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인상을 찌푸렸다.
‘돈 쓰는 걸 들여다본다, 라.’
병원 내 모든 공사는 원칙적으로 공개입찰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원장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공사 실적이나 병원 특화 설계에 대한 가산점을 임의로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업체들은 대체로 비슷한 조건을 제시하기 마련인데, 그 때문에 최종 시공업체는 원장단, 정확히는 원일웅이 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과정에서 들어오는 꼬리표 없는 돈은 그가 비공식적인 일을 처리할 때 유용하게 쓰이곤 했다.
“외부 기부금과 정부 지원 예산 사용처에 대해서도 조사 중입니다. 특히 응급의료센터 운영 보조금이 타 부서에 쓰인 것은 아닌지도 면밀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유수가 서류를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사 대금만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쪽은 그쪽대로 문제가 있었다.
응급실은 투자할수록 적자가 나니 그 예산으로 모든 과가 공용으로 쓸 수 있는 검사장비를 구입했던 것.
원래는 동선을 고려하여 응급실 바로 옆에 설치되었어야 할 CT가 옆 건물 지하에 추가 배정되었다.
‘아니, 이건 삼아그룹과 무관한…… 정부 예산 아닌가?’
엄밀히 따지면 보건복지부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어도 그룹 차원에서 왈가왈부할 거리는 아니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뭐든 약점을 잡으려는 건가.’
원일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응시했다.
강태정의 뜻인지 비서실장의 독단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모든 계열사가 똑같이 겪는 일에 자신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료만 요청했을 뿐 아직 별다른 조치는 없다는 것인데, 이건 마음만 먹으면 추후 언제라도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이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위이이잉.
휴대폰 소리가 테이블에 흐르던 무거운 적막을 깼다.
발신자를 확인한 교육수련부장 전민성의 눈이 커졌다.
“네, 전민성입니다.”
그는 원일웅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자리를 벗어나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원장실로 돌아온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명호 비서실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조직 진단’ 관련해서…… 개선 권고안도 전달받았습니다.”
‘교육수련부장에게 직접? 거기에 권고안까지?’
원일웅이 놀란 눈으로 전민성을 바라보는데, 비서가 인쇄물 몇 장을 들고 원장실로 들어왔다.
“방금 메일로 전달받은 사항입니다. 보시다시피 일부 임상과의 레지던트 선발 과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류를 확인한 원일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안과, 피부과 그리고 성형외과.
소위 인기과로 분류되는 과들이었다.
거기에는 그가 원장으로 취임한 최근 몇 년 내에 새로 뽑은 레지던트 명단이 적혀있었다.
‘이렇게까지 자세히 살펴봤다고?’
언뜻 보기에도 눈에 익은 이름들.
고위층 자제이거나 혹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점수를 후하게 주도록 그가 직접 지시한 인턴들이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의대 성적과 전공의 선발 시험 점수는 그리 좋지 못한데, 면접 점수와 인턴 근무 점수가 만점에 가까워서 합격한 사례들입니다.”
“음… 그렇긴 하지만, 절차상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 데요.”
원일웅이 짐짓 모른 척을 하며 대답했다.
성적 좋은 인턴을 일부러 떨어뜨린 것 아니냐고 지적할 수도 있었지만,
공부만 잘했지 환자를 보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의사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대충 그 정도로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룹 측에서는 향후 논란이 될 여지가 있으니 객관적인 성적 비중을 높이고 면접 점수도 최고점과 최저점 차이를 줄이는 쪽으로 변경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른 계열사도 다 그렇게 바뀌는 추세라고 하면서요.”
“그렇게…… 해야겠군요.”
그 말에 원일웅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장 내년에 피부과에 합격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국회의원 딸도 있지 않던가.
이대로라면 그가 손써볼 틈도 없이 불합격할 것이 분명했다.
‘인사권에도 개입하겠다는 건가.’
특정 지원자를 밀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공정하게 사람을 뽑아 쓰라는 말이니 개입으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원장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소중한 권리 하나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흐음.”
원일웅 못지않게, 어쩌면 그보다 더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인물, 부원장 심철호였다.
마침 하나뿐인 딸이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대로라면 있는 그대로 성적 박치기를 해야 한다는 말 아닌가.
천신만고 끝에 부원장까지 올라왔는데 아무런 이득이 없다니.
이건 너무도 불공정한 처사였다.
“아니, 공부 잘한다고 꼭 환자 잘 보라는 법도 없는데…… 너무 성적만으로 뽑으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병원 실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관여해도 되는 건가?”
그는 애꿎은 전민성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네, 그래서 인턴 성적은 기존대로 가되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하고, 지원하는 과의 레지던트 의견도 일부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최저점을 배제하면 유력한 경쟁자를 일부러 떨어뜨리기도 쉽지 않다. 레지던트 의견이 포함된다면, 그 또한 딸에게는 불리하다.
응급실에 내려가 당직 레지던트들을 혼냈던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교수나 병원 관계자 자제는 입사 때 제출한 신상기록부를 활용해서 특별히 모니터링한다고 합니다.”
“…….”
이어진 전민성의 말이 일말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삼아대병원에서 근무한 지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변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과 선택을 두고 징징거리는 딸의 모습을 볼 생각에 벌써부터 골치가 아픈 심철호였다.
* * *
며칠 뒤 정신과 병동.
“그래서 원장님이랑 IRB 위원장님이 막 반대를 하는데…… 거기서 삼아전자 전무가 뭐라고 한 줄 알아?”
황진호가 며칠 전 대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1년차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흠흠. ‘삼아대병원은 빠지셔도 됩니다.’ 이러면서 원장님을 딱 노려보는데…… 크으~ 원장님도 별거 아니더라고. 삼아전자가 최고야!”
‘오, 좀 비슷한데?’
시현은 놀랍다는 듯 황진호를 바라보았고, 김원기와 노민혜 그리고 정신과 인턴은 눈을 빛내며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무튼, 그분이 시현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월급도 많이 준다고 하고 삼아전자에 취칙도 시켜준다고 했어!”
뭔가 좀 과장된 것 같긴 하지만, 황진호는 제 일인 양 싱글벙글이었다.
동기가 좀 잘한다 싶으면 시기 질투하며 뒷담화를 하는 부류가 있는데, 다행히 황진호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 그럼 월급도 더 주는 건가요?”
“선생님, 저희도 끼워주실 거죠? 네?”
1년차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그럼 고맙지. 일손이 부족할 텐데…….”
‘얘들 왜 이러지?’
1년차들은 보통 당직에 찌들어서 일이라면 학을 떼야 하지 않나.
아무리 정신과가 외과 계열에 비해 편하다고는 해도, 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조르는 건 상식 밖이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해야지! 돈도 많이 벌고 환자도 살리고!”
연구에 의욕이 넘치는 황진호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확실히 많이 변했어.’
회귀 전을 생각해보면 일을 더 한다고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름 의대씩이나 나와서 복사에 연구 자료 스캔만 하고 있었으니 재미가 없을 만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대학병원에서 잘 낫지 않는다고 해서 온 환자들을 치료하고 신약 연구도 하면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거기에 더해 리서치 센터에서 나오는 추가 수당까지 있는 상황.
경제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보상이 더해지자 업무량이 늘었음에도 의국 분위기는 활기가 넘쳤다.
퀘스트 ‘재앙의 발걸음’이 아직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여전히 마음에 걸렸지만,
이 정도면 회귀 전보다 훨씬 더 나은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제 내년 1년차들만 잘 뽑으면…….’
그때였다.
위이이잉.
별안간 휴대폰이 울리고.
[02-20xx - 0119]
발신 번호를 확인한 시현의 눈썹이 꿈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