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Chapter 32. 인턴전쟁 (1)
위이이잉.
별안간 휴대폰이 울리고.
[02-20xx - 0119]
발신 번호를 확인한 시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1년차 주간 당직이 응급실 콜을 받는 시간에 시현을 찾는 전화라면 전화 건 사람은 뻔했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 선생님~ 환자 있어서 노티 하려고요.
‘그래. 너구나…….’
역시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건너왔다.
“저, 심소현 선생님?”
-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알지. 알 수밖에.
당직도 아닌 2년차를 찾는 인턴이 또 있을까.
“어떻게 아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주간 이 시간에는 1년차 당직에게 노티하세요.”
어차피 회귀 전부터 별다른 접점이 없던 인물이었다.
얽혀봐야 좋을 게 없는지라 노티를 받지 않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 저기…… 35세 남자분이고 팔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고 해서 오셨어요.
이어진 그녀의 보고에 시현은 눈을 부릅떴다.
‘환자는 괜찮을까?’
무시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 뇌경색이나 뇌출혈과 같은 신경계 질환을 의심해야 하는데, 보고가 지체됐다가는 골든 타임을 놓칠 수도 있었다.
“아니! 팔에 위약감을 호소하는데 정신과 부르면 어떡합니까?”
시현의 반응에 다른 레지던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게 판단하신 근거가 대체 뭔가요?”
- 아무래도 다른 과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요.
“Onset은 언제부터죠? Motor grade는요? 혹시 두통이 동반되어 있나요?”
- ……
시현의 질문에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면 그렇지.’
보호자나 할 법한 말을 그대로를 읊어대는 데다 진찰 소견 하나 없이 다짜고짜 내려와 보라는 식의 태도까지.
하지만 당장은 환자가 우선이었다.
심소현을 혼내는 건 그 뒤로 미뤄야 했고.
“편측성으로 위약감이 있다면 우선 신경과나 신경외과적 평가가 필요합니다! 빨리요!”
“환자가 젊어요. 다친 적도 없대요. 정신과에도 그런 질환 있지 않아요? 갑자기 몸을 못 움직이는 거…… 뭐더라? 그…….”
다그치는 시현을 향해 심소현은 느긋하게 딴소리를 할 뿐이었다.
기저질환은 무엇인지 신경학적 진찰은 어떻게 했는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혹시 전환장애를 의심하는 거예요?”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
별다른 뇌질환 없이도 운동이나 감각 이상이 발생하는 상당히 드문 질환이었다.
“네, 맞아요. 그거요! 제가 보기에는 전환장애가 확실해요. 선생님이 꼭 와서 봐주셔야 해요.”
‘혹시…… 그 환자인가?’
전환장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시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내려가서 직접 진찰해보고 판단할게요.”
심소현이 환자를 대충 보고 잘못 노티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시현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 환자는 꽤 위험한 상태였다.
‘바로 준비해줘.’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시현은 레지던트들을 뒤로 한 채 곧바로 응급실을 향했다.
* * *
잠시 후 응급실.
“이상하네. 어젯밤까지 괜찮았는데 왜 힘을 못 쓰겠지?”
환자는 침상에 누워 오른손으로 왼손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신과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네? 잘못 찾아오신 것 아닌가요? 저는 손에 힘이 안 들어가서 온 건데…….”
환자는 정신과 의사의 방문에 의아해했다.
“맞아요. 저희 남편이 왜 정신과 진료를…… 정형외과 선생님은 안 오시나요?”
당황하기는 보호자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진찰부터 하고 맞는 과를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증상이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자고 일어나니 왼팔에 힘이 안 들어갔어요. 쥐가 난 건가 해서 기다려봤는데 계속 그렇더라고요. 머리도 아팠고요.”
‘미묘하지만, 왼팔에 힘이 떨어져 있다…….’
환자를 진찰한 시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환자가 맞네.’
회귀 전, 심소현은 스트레스를 받은 후에 모호한 증상이 생겼다며 정신과를 호출했었다.
당시 김원기는 정신과 환자 같지 않으니 신경과나 신경외과 진료를 먼저 보도록 지시했지만,
심소현은 의식이 명료하고 증상이 경하다는 이유로 환자를 돌려보냈다.
괜찮을 것 같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날 저녁, 환자는 의식이 저하된 상태로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
최종 진단은 뇌출혈.
다행히 환자는 응급수술 후 목숨을 건졌지만, 구두지시만 하고 내려와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원기는 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환자한테는 오히려 잘 된 건가.’
이번에는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증상이 심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집으로 가서 지켜볼까요?”
“아니오. 신경외과 진료 바로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뇌출혈이 아닌지 평가해야 합니다.”
진찰을 마친 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뇌출혈요? 아까 저 선생님은 별것 아닌 것 같다고 안심하라던데.”
환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심소현을 바라보았다.
“신경외과 선생님 오실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어요. 몇 가지 검사부터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아까부터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심소현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저, 선생님…… 아까는 분명히 저런 상태가 아니었…….”
딩동!
[system : 인턴 심소현이 거짓을 말합니다.(99.9%)]
“나중에 따로 이야기합시다.”
구차한 변명까지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시현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휴대폰을 들었다.
- 시현아, 무슨 일이야?
신경외과 2년차 국규환이었다.
“형, 응급실에 뇌출혈 의심되는 환자가 있어.”
- 아니, 그걸 왜 네가 보고 있어? 인턴이 너한테 노티 하든?
국규환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 지금 수술방이라 바로는 못 나가는데, 확실해?
“응. 위약감이 좌측 전완부에 있어. 증상이 혈관 분포하고는 전혀 안 맞는데…… 인팍(뇌경색) 보다는 헤모리지(뇌출혈) 가능성이 커 보여.”
- 정, 정말? 바로 갈게!
“우선 Brain CT 촬영 보냈으니까 최대한 빨리 와줘요!”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오는 동안 미리 검사를 해두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시현이 처방을 입력하기가 무섭게 환자는 검사실로 내려갔다.
* * *
15분 뒤.
환자는 Brain CT 촬영을 마치고 응급실로 돌아왔다.
‘헉…….’
업로드 된 영상을 확인한 심소현의 눈이 커졌다.
영상 판독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보기에도 뚜렷한 뇌출혈 소견이었다.
‘망했다. 또 저 사람이야…….’
시현의 연락을 받고 신경외과 2년차 국규환이 응급실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환자를 대충 보는 인턴에게는 누구보다도 무서운 레지던트가 그였다.
상대가 부원장, 그것도 같은 신경외과 출신인 심철호의 딸이라고 해도 할 말은 하는 스타일.
이번에는 또 얼마나 소리를 질러댈지 벌써부터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아…… 어떡하지?’
심소현은 이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영상 넘어왔어?”
국규환은 시현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응, ICH(intracranial hemorrhage, 뇌내출혈) 맞아. 여기 세 번째 사진 보면 사이즈는 2cm x 3cm 정도 되는 것 같고…….”
시현이 모니터에 뜬 환자의 뇌 사진을 보며 말했다.
“어? 정말이네? ICU(중환자실)에 자리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지금은 의식도 명료하고 대화도 가능한 상태였지만, 병변이 급속도로 커질 수 있었다.
응급수술 후 중환자실 집중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야! 이거 노티한 인턴 누구야? 얼른 나와!”
국규환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저, 전데요.”
심소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담당 인턴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야! 심소현! 너 자꾸 이럴 거야? 지난번에도 피지컬(진찰) 개판으로 해서 환자 놓칠 뻔했잖아! 내가 경고했지?”
“실은 저도 뇌졸중 의심을 하긴 했는데…….”
“의심을 했으면 바로 불러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선생님이 맨날 야단만 하니까 겁나서…… 무서워서 노티를 못한 거 아니에요! 이게 다 선생님 때문이라고요!”
“인턴, 너 방금 뭐라고…….”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어진 그녀의 말에 국규환은 뒷목을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형, 잠깐만.”
보다 못한 시현이 나섰다.
“인턴 선생님, 레지던트에게 노티하기 전까지는 선생님 환자 아닌가요?”
“네? 저는 아직 인턴인데…….”
“응급실 환자 명단에는 담당 인턴과 담당 레지던트 이름이 같이 올라갑니다. 인턴도 면허번호를 부여받은 의사이기 때문이에요. 앞으로는 ‘담당 의사’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시현은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국규환처럼 화를 내고도 싶었지만, 그래서는 앞뒤 다 자르고 응급실에서 레지던트들이 자기에게 소리를 질렀다며 일러바칠 게 뻔했다.
“…….”
심소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딩동!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동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알림음이 울렸다.
[system : 인턴 심소현의 주된 감정은 ‘경멸’입니다.]
‘경멸이라고? 이게 무슨…….’
뇌출혈 환자를 진찰조차 하지 않고 대충 노티 했다가 와장창 깨진 상황.
부끄러움이라면 모를까 경멸이라니?
“뭐? 의사로서 책임감?”
알림창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기가 무섭게 심소현은 냉소를 띈 얼굴로 시현을 노려보았다.
“지금 누굴 가르치려 들어요? 몇 년 선배라고 ‘갑질’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 당신들은 내가 이 병원에서…….”
다음 순간 스테이션에 앉아있던 시현과 국규환을 비롯한 레지던트들이 일제히 일어나 심소현이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다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래 봐야 레지던트인 주제에…….”
기세등등하게 악담을 퍼붓던 심소현이 순간 움찔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원장님 오셨습니까?”
응급의학과 치프 엄주영이 원일웅 쪽을 보며 90도로 인사했다.
그 옆에는 심철호가 난처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는 하지만, 인턴이 레지던트들을 상대로 큰소리를 치고 있는 해괴한 상황이었다.
원일웅과 식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
딸에게서 도와달라는 다급한 문자가 왔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보러 왔을 뿐인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인턴 선생,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병원에서…… 뭐라고?”
“아, 별거 아닐 겁니다.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원일웅의 말에 심철호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최근 삼아그룹에서 ‘조직 진단’을 시작하면서 교수 자제들 행실을 특별히 조심하도록 하지 않았던가.
딸의 못난 모습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아니, 한번 들어봅시다. 무슨 일인지.”
원일웅의 시선이 레지던트들을 향했다.
“뇌출혈 환자 초진 후 당직 레지던트에게 보고하는데 그 절차에 문제가 있어서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음…….”
시현의 대답에 원일웅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소현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오랜 친분이 있는 그라면, 인턴에게 ‘갑질’하는 레지던트들을 따끔하게 혼내줄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어진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까 뇌출혈 환자를…… 정신과에 노티했다는 겁니까? 신경외과가 아니고?”
“네. 그렇습니다.”
시현이 최대한 완곡하게 말했음에도 원일웅은 단번에 자초지종을 파악했다.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그 부분에 대해 티칭하고 있었던 거군요.”
이유가 뭐가 됐든 심소현이 잘못한 것이 명백했고, 당연히 레지던트들에게 소리를 지를 상황도 아니었다.
“심소현 선생.”
“네?”
원일웅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심소현을 불렀다.
“선배들 덕분에 의료 사고를 면했으면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태도는 매우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특히 레지던트 ‘선생님’들 앞에서.”
굳은 얼굴로 ‘선생님’에 힘을 준 그의 말에 심소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