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Chapter 32. 인턴전쟁 (2)
“레지던트 ‘선생님’들 앞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굳은 얼굴로 ‘선생님’에 힘을 준 그의 말에 심소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그 한마디에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어떤 잘못을 해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도 지적받은 적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 참, 천시현 선생님. 지난번 발표 인상 깊게 잘 들었습니다.”
원일웅이 고개를 돌려 시현을 바라보았다.
심소현을 대할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네? 아, 감사합니다.”
뜻밖의 칭찬에 시현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속셈이지.’
그동안 정신과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아니었나.
“아주 뜻깊은 주제였는데,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조만간 따로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일개 레지던트가 아닌, 귀한 손님 대하는 듯한 태도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원일웅은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뒤 응급실을 떠났고, 마뜩잖은 표정의 심철호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심소현이 덩그러니 남았다.
레지던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꽂혔다.
다들 ‘레지던트인 주제에’ 에서 끊긴 다음 말을 기다리기는 듯했으나, 심소현은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심소현의 곁으로 다가선 시현이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
딩동!
[system : 인턴 심소현의 주된 감정은 ‘공포’입니다.]
시현은 알림창을 닫으며 응급실을 떠났다.
* * *
응급실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
심소현은 신경질적으로 청진기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지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병원에서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의대 교수이자 병원 부원장인 아버지를 둔 덕분이었다.
- ‘담당 의사’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응급실을 떠나기 전 들은 마지막 말. 듀티를 마치고 나온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낮에 시현이했던 말들이 자꾸 맴돌았다.
- 정신과 지원 한다고 들었어요. 부디 ‘공정한’ 경쟁하시고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뭐? 공정한 경쟁? 아빠 도움 없이도 정신과쯤은.”
실상은 최근 인기가 높아져 경쟁자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 합격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띠띠띠띠 띠리링.
“어? 아빠, 아직 퇴근 안 했어?”
인턴 숙소 드나들 듯, 부원장실 도어락을 열고 들어간 그녀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벌써 끝난 거냐?”
심철호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교대까지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응, 마지막에 온 환자 다음 턴한테 넘기고 일찍 나왔어. 헤헤.”
딸의 대답에 심철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 요즘 응급실 근무를 어떻게 하는 거냐?”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뭘 잘못…….”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턴이 레지던트한테 소리를 질러!!”
심철호의 목에 핏대가 올랐다.
- 소현이 근무 태도 지적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부원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주셔야겠습니다.
응급실을 나오며 원일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원장 귀까지 들어간 건지.
레지던트 몇몇을 부원장실로 따로 불러다 혼내기도 했는데, 지금 보니 딸의 잘못을 무조건 싸고돌 상황이 아니었다.
“왜 교수 자제들 근무 태도 엉망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만들어?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바른대로 얘기 못 해?”
“아빠,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심소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내가 뭘 그리 잘못했어?”
“아니… 아빠 말은 그게 아니고 사정을…….”
“아빤 맨날 그런 식이야!”
심소현이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기 시작하자 심철호는 급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나더러 이따위로 의사 할 거면 하지 말래. 인턴인데 실수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리고 아빠 믿고 설치지 말라고도 했어.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어야 해?”
“뭐어? 어떤 자식이 그딴 소리를 해?”
심철호는 이미 심소현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조직 진단’인지 뭔지만 아니었어도 이런 수모는 겪지 않을 텐데.’
딸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나 그냥 안과 쓰면 안 돼? 아빠가 김 과장님한테 잘 이야기 해주면…….”
“아니 그게…….”
심철호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분명 얼마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인턴 성적이야 A턴 만들면 되는 거고 제가 면접 점수만 잘 주면 아무 문제 없어요. 성적 좋은 애들이야 알아듣게 타일러서 다른 과 쓰게 돌리죠.
안과 김 과장은 심소현이 지원만 하면 바로 붙여줄 것처럼 호언장담했다.
그랬던 김 과장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불과 몇 주 전, 삼아그룹에서 전 레지던트 상대로 설문을 돌린 뒤였다.
레지던트 선발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과로 많은 이들이 안과를 지목했던 것.
그는 이 문제로 이명호 비서실장과 개인 면담까지 마친 상태였다.
- 형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이번에 쟁쟁한 친구들이 지원을 많이 해서…… 소현이가 쓴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운 좋게 되더라도 교수 자녀 특혜 시비 붙으면 또 골치 아프지 않겠어요?
‘형님 형님 하면서 따라다닐 땐 언제고. 기회주의자 같으니라고!’
김 과장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아빠, 이번 한 번만 도와줘. 안과가 힘들면 피부과에 이야기해주면 안 돼? 응?”
심소현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그러지 말고 다른 과도 좀 생각해보면 어떻겠니? 내과도 무난하고…… 여자 OBGY(산부인과) 의사도 경쟁력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심철호는 어떻게든 딸의 고집을 꺾어 보려 했다.
피부과 또한 매년 경쟁률 1위에 빛나는 인기과였고 피부과 최 과장의 반응 또한 김 과장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내가 바이탈과 하면서 고생하는 거 보고 싶은 거야?”
“그럼 영상의학과 써보는 건 어때? 앞으로 비전 있어 보이는데.”
“골방에 틀어박혀서 맨날 모니터만 보고 있으라고? 판독실은 지하라서 싫단 말이야!”
‘거기도 네 성적으로는 힘들지 싶은데.’
영상의학과 또한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의 준말) 못지않게 경쟁률이 높았다.
‘고생은 하기 싫고 인기과는 하고 싶고. 도대체 어쩌란 거냐.’
딸의 진로를 놓고 심철호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 * *
일주일 뒤.
“선생님! 16번 환자 BP 떨어져요!”
“어레스트입니다! 200J 차지!”
“인턴 고채연입니다. 43세 남자 환자분 의식 없는 상태로 내원하여…….”
“인턴 김원식입니다. 55세 여자 환자 교통사고 후 대퇴부 골절 의심되어…….”
언제나 정신없는 야간 응급실.
한쪽에서는 심폐소생술이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턴들은 초진을 마친 환자들을 각 과로 노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7번 자리에 66세 여자 환자 바이탈 체크 끝났습니다. 인턴 선생님, 초진 봐주세요.”
차지간호사가 스테이션에 앉아있는 인턴들에게 말했다.
“주증상은요?”
“환자분이 심하게 어지럽다고 하시네요.”
그 말에 인턴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하필이면 바쁜데.’
어지러움.
환자들이 응급실을 찾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증상이었다. 어지러움 환자 한 명 보느니 장염 환자 5명 보는 것이 훨씬 쉬울 정도였으니까.
특히나 노인환자의 경우 어지러움을 유발할 수 있는 질환이 너무 많았다.
심부전, 이석증, 뇌경색, 뇌출혈 그리고 불안장애에 이르기까지.
각각 내과, 이비인후과, 신경과, 신경외과 심지어 정신과까지 컨택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 차례지?”
“소현아, 네가 봐야 할 것 같다.”
“나? 내 차례 아닌 것 같은데?”
“민혜랑 나는 초진 기다리는 환자가 두 명씩 있어. 지금 넌 담당 없잖아.”
대답하는 남자 인턴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려있었다.
“그건 내가 환자를 빨리빨리 봐서 그런 거고. 열심히 하면 일만 더 는다더니 그런 거야?”
‘아휴, 저걸 그냥.’
열심히 하기는 개뿔. 쉬워 보이는 환자만 쏙쏙 골라본 주제에.
남자 인턴은 목 끝까지 욕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주워 삼켰다.
적어도 인턴들 사이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민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환자를 아무리 발로 봐도 레지던트들이 알아서 커버해줬으니, 굳이 어려운 환자를 피할 필요가 없었던 것.
하지만 얼마 전 뇌출혈 환자를 놓칠뻔한 일이 있고 난 뒤로는 레지던트들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원장이 직접 나타나 레지던트들의 편을 든 시점부터, 더는 그녀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그동안 당했던 것에 화가 나 더 깐깐하게 노티를 받는 레지던트도 있었다.
이후 심소현은 어려워 보이는 환자를 무조건 미루는 식으로 생존 전략을 바꿨다.
“야, 너 자꾸 그런 식이면 우리 너랑 일 못 해!”
“뭐? 어려운 환자 내가 더 많이 본 날도 있었어!”
남자 인턴의 항의에 심소현이 발끈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대충 보고 떠넘기기가 가능했을 때 이야기지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민폐가 맞았다.
“그냥…… 내가 디지니스(어지러움) 환자 볼게. 소현이가 저기 소아 환자 봐줄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고채연이 나섰다.
“그래, 알겠어.”
‘소아는 무조건 소아과니까.’
인턴들이 환자를 보러 간 사이 심소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30분 뒤.
“15번 자리에 30세 여자 환자 바이탈 체크 끝났습니다. 인턴 선생님, 초진 봐주세요.”
“주증상은요?”
“하복부 통증이라는데요?”
철렁.
어지러움만큼은 아니지만 젊은 여성의 하복부 통증 또한 만만치 않은 증상이다.
내과, 산부인과, 외과적 질환을 모조리 감별해야 하고 간혹 응급 수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심소현, 이번에는 네가 좀 봐.”
남자 인턴이 말했다.
“왜? 방금 나 2명 보고 왔어!”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이젠 DOA(Dead On Arrival, 병원 도착시 이미 상망) 환자 사망진단서 쓴 것까지 1명으로 세는 거야?”
또 다른 한 명도 경한 두드러기 환자.
심소현의 체리피킹에 남자 인턴은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그 환자 내가 볼게.”
“채연아, 네가 왜? 너 아까도…….”
“괜찮아. 빨리 보고 올게.”
고채연이 싱긋 웃어 보였다.
“고쌤은 정말 열심인 것 같아요.”
“그러게요. 진짜 착하죠? 정신과 쓴다고 했던가?”
“그럴걸요? 성적도 좋아서 내년에 레지던트 무조건 붙을 것 같던데.”
그 모습을 보고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재수 없어. 착한 척은……’
심소현은 냉소를 띄며 고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야! 이거 노티한 인턴 누구야? 빨리 나와!”
스테이션 건너편에서 한 남성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네? 전데요. 무슨…….”
“소아면 다 소아과야? 복통 환자인데 기본적인 진찰도 안 했어?”
[소아청소년과 R1 박유승]
190에 달하는 거구. 덩치만 보면 전형적인 써전인데 아이들이 좋아 소아과를 선택한 레지던트였다.
“방금 CT실에서 연락 왔어. 환자 압빼(Appendicitis, 맹장염)라잖아! 외과를 불렀어야지 괜히 수술 시간만 딜레이 되고 뭐 하는 짓이야? 교수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환자 똑바로 봐! 알겠어?”
박유승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그동안 참았던 화가 폭발시켰고,
그 모습에 인턴들은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기분이었다.
오직 한 사람, 심소현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붉혔다.
‘고채연…… 이런 ‘까다로운’ 환자인 걸 알고 나한테 보라고 한 거야?’
실상 복부 진찰만 제대로 했으면 놓치지 않았을 환자였음에도,
그녀의 분노는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