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Chapter 32. 인턴전쟁 (3)
잠시 후.
[김미나 여/30 인턴 고채연 / 담당의 미정 ]
“안녕하세요? 어떻게 불편해서 오셨나요?”
고채연은 하복부 통증 환자 진찰을 시작했다.
“배가, 아랫배가 너무 아파요. 아야아아…….”
침상에 걸터앉은 환자는 배를 움켜쥐고 상체를 숙였다.
“일단 반듯이 누워보세요. 진찰하겠습니다. 보호자님은 잠시만 밖에 계세요.”
‘남편인가?’
고채연은 환자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자를 커튼 뒤로 내보낸 뒤 환자의 복부를 살폈다.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삼, 아니 사십 분 전부터요.”
일단은 급성 복통.
“갑자기 그렇다는 말씀이시죠?”
“네. 심하게 아팠다가 좀 덜 아팠다가 하는데요.”
주기적인 악화를 보이는 쥐어짜는 양상의 통증.
“혹시 어떤 상황에서 증상이 처음 생겼나요?”
“상황이요? 그냥 평소처럼 집에 있다가 운동 조금 한 것 말고는…….”
환자는 말끝을 흐렸다.
‘특별한 악화 요인은 없나?’
“특별히 음식 잘못 드신 건 없나요?”
“네, 늘 먹던 대로 먹어서 의심 가는 건 없어요.”
‘체온은 정상에…… 설사도 없고 장음도 괜찮아.’
내과 질환으로 보기에 환자의 증상은 미묘하게 어긋나있었다.
“아야야…… 또 아프네.”
“괜찮아? 많이 아파? 선생님, 좀 어떤가요?”
환자의 목소리에 놀란 보호자가 커튼을 젖히고 들어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잘 손질된 머리와 한껏 멋을 낸 옷차림이 눈에 띄었고, 짙은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복부 진찰 중입니다.”
“정환 씨, 잠깐만 나가 있어 줘.”
환자가 웃옷을 걷으며 말했다.
“어? 으응.”
남자가 커튼 밖으로 나가자 고채연은 조심스럽게 환자의 배를 눌러보기 시작했다.
“아앗!”
다음 순간, 환자가 반사적으로 신음을 토했다.
‘오른쪽 하복부 통증…….’
눌렀을 때 심해지는 양상의 통증, 압통이 심했다.
“선생님, 저 누워있으니까 통증이 더 심해지는 거 같아요.”
환자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마치 기어가는 자세를 취했다.
“지금 좀 어떠세요?”
“좀 나은 것 같아요.”
급성 복통 가운데 주기적으로 악화되고 자세에 따라 변하는 통증은?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얼른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혹시 부인과적으로 치료받고 계신 질환이 있으신가요?”
“별다른 건 없어요. 물혹이 있다는 말은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어요.”
물혹이라고 하면 보통은 난소 낭종을 의미하는데, 무증상인 경우도 많아서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마침 환자가 입고 있던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끈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집에서 편하게 입을 것 같지는 않은 차림이었다.
‘집에 있다가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방금 진찰을 하느라 내보냈던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순간, 고채연의 눈이 커졌다.
“환자분, 혹시 보호자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최대한 빨리요!”
* * *
“시현아 오랜만!”
“아, 오늘 당직이야?”
시현이 응급실 환자 면담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산부인과 2년차 문수영이 시현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응. 우리 인턴 선생님이 난소 염전 환자 노티해서.”
스테이션에는 문수영과 고채연이 환자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찰만으로 이걸 먼저 의심했다는 거야?”
문수영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난소 염전(Ovarian torsion).
난소와 난소 인대가 꼬이는 질환으로 복통을 유발하지만, 진찰만으로 진단하기는 쉽지 않은 질환이었다.
“맹장염이나 게실염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인데 왜 하필 난소 염전을?”
“갑작스럽게 시작하면서 자세에 따라 바뀌는 통증 양상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고채연이 대답했다.
“흠, 그렇단 말이지. 보니까 평소에 물혹이 있었던 것 같고…… 이게 갑자기 격하게 움직이다가 꼬인 것 같네.”
난소 초음파 결과를 보던 문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 제법 똘똘한데. 선생님, 혹시 산부인과에 관심 있어요?”
“아, 저는 정신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 아쉽네. 시현이는 좋겠다! 작년에 민혜도 정신과 쓴다고 해서 서운했는데.”
문수영이 부럽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잘 진단했어. 환자는 응급수술 올라갈 거야. 지금 바로 꼬인 걸 풀어주지 않으면 난소가 괴사할 수 있거든.”
“보호자도 지금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술 사인하셔야 하니 최대한 빨리 오시라고 얘기해뒀습니다.”
“어? 아까 같이 있던 남자가 보호자 아니었어? 지금은 어디 갔지?”
“실은 그게…….”
문수영의 물음에 고채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30분 전.
“환자분, 혹시 보호자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최대한 빨리요!”
“보, 보호자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극심한 복통도 잠시 잊은 듯, 환자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초음파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난소 염전이 의심됩니다.”
“그게 심한 건가요? 아직 검사도 안 해봤는데 검사 결과 나오고 부르면 안 될까요? 아니면 일단은 약물치료로라도…….”
“응급수술을 받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난소를 절제해야 할 수도 있어요.”
“절제요? 아, 알겠어요. 잠시만요.”
환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서연이니? 지금 나 삼아대병원인데 좀 와줄 수 있어?”
- 병원? 무슨 일인데. 어디 아파?
“나 응급으로 수술받아야 할지도 모른대. 어떡해.”
- 야, 그럼 남편을 빨리 불러야지. 집도 바로 코앞인데!
“아니, 실은 나 너랑 1박 2일로 놀러 간다고 하고 나왔거든. 그이 오기 전에 먼저 와서 옆에 좀 있어 주면 안 될까?”
- 야! 너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이것아, 정신 차려!
“아, 나도 몰라. 일단 최대한 빨리 좀 와줘. 부탁할게. 응? 제발…….”
환자는 수화기 너머 여인에게 애원하듯 매달렸다.
* * *
다시 응급실 간호사 스테이션.
“어머! 그래서, 환자 바람피우는데 알리바이 만들어 줄 친구가 먼저 와야 하고 그다음에 남편이 오느라 늦어진다는 거야?”
고채연의 보고를 듣고 난 뒤 문수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환자분이 꼭 비밀 지켜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남편한테 들킬 바에는 난소 절제하시겠다고…….”
“골치 아프네. 일단 알겠어. 인턴 선생들 입단속 잘 시키도록 해. 괜히 실수로라도 같이 왔다는 남자 이야기 나오지 않게 해야겠네.”
“네, 선생님.”
하지만 문수영과 고채연의 바람과는 달리 스테이션에는 막장드라마 마니아들이 너무 많았다.
“저기 OBGY(산부인과) 환자 보호자가 바뀐 것 같지 않아?”
“아까 내가 통화하는 것 들었는데,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야.”
“헉, 그럼 아까 환자 업고 들어온 남자는? 혹시 불륜남?”
“당연하지. 딱 보면 모르겠어?”
“그럼 난소 염전이 온 게…… 혹시 ‘그거’ 하다가?”
간호사가 민망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성관계나 격한 운동으로 난소 염전이 유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지도?”
“진짜? 그런 거였어?”
그녀들은 최대한 자극적인 방향으로 퍼즐을 맞춰가고 있었다.
“보호자 불쌍하다. 이런 줄도 모르고…….”
베드 옆에서 환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남편을 두고 간호사들이 혀를 찼다.
“저, 차지 선생님. 혹시라도 아까 온 남자분 이야기는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환자분이 특별히 부탁하셨어요.”
고채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요! 설마 그런 눈치 없을까 봐요?”
차지간호사가 고채연을 안심시켰다.
“올 채연쌤, 섬세한 면이 있네.”
“정신과 하려면 비밀 유지가 중요하니까.”
“그러게. 볼수록 괜찮은 것 같은데.”
고채연이 다른 환자를 보러 떠나자 간호사들이 말했다.
‘뭐 볼수록 괜찮아?’
스테이션에 앉아있던 사람들 중 유독 한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소현 선생님, 잠깐 시간 돼요?”
“네? 무슨 일로…….”
누군가 간호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심소현을 불렀다.
“잠깐 얘기 좀 할까 하고요. 면담실로 오세요.”
[응급의학과 R3 김정현]
김정현은 한껏 인상을 쓰며 말했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걸까?”
심소현이 김정현을 따라 들어가자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심각하게 굳은 표정. 누가 봐도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
“뻔하지. 아까 소아과에서 엄청나게 화내고 돌아갔잖아.”
“김정현 선생님이 한마디 할 생각인가 본데. 그래도 싸지 뭐.”
차지간호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 한다고? 글쎄.’
[system : 레지던트 김정현의 감정은 ‘즐거움’입니다.]
시현은 턱 끝을 매만지며 한참 동안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 * *
“선생님, 요즘 많이 힘들죠?”
“네?”
“환자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는 거 알고 있어요.”
무슨 일로 야단을 할지 걱정하며 들어갔는데 의외로 김정현의 말투는 온화했다.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은 재능도 있고 환자 보는 직관도 뛰어난 것 같아요. 내년에 꼭 레지던트 합격하시길 응원할게요.”
“아, 감사합니다.”
‘그래 내가 틀린 게 아니었어.’
뭉클. 심소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형편없는 쓰레기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자신의 ‘진가’를 알아본 레지던트가 여기 있었다.
“오늘만 해도 ‘운 나쁘게’ 어려운 환자가 걸린 거잖아요? 아니면 혹시…….”
김정현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혹시…… 라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누가 봐도 비밀스러운 뭔가를 알고 있는듯한 표정.
“선생님, 그러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그 표정에 심소현이 홀린 듯 반응했다.
“누가 선생님 골탕 먹이려고 교묘하게 짱돌 환자를 줬을 수도 있잖아요?”
“그, 그런 걸까요?”
“괜히 인턴 선생님들 싸움 붙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긴 한데. 다른 인턴들이 은근히 짜고 선생님한테 환자 미루는 거 같지 않아요?”
김정현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설마 그런 거였어?’
심소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김정현의 말대로라면, 요즘 응급실에서 혼자 갖은 욕을 먹었던 것들이 한 번에 설명되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솔직히 지금 선생님 평판은 좋지 않아요. 아마 이번에 C턴 받게 될 가능성이 커요.”
철렁. 심소현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 어떻게 안 될까요? 선생님이 말씀 좀 잘 해주시면…….”
“그건 어려워요. 인턴 점수는 치프 선생님이 주시는 거라.”
김정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죠. 이건 정말 선생님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 * *
- 선생님은 너무 착한 게 탈이에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해보세요. 내가 튈 수 없다면 상대방을 끌어내려서라도.
면담실에서 나오자 김정현이 했던 마지막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현아, 무슨 일 있어? 김정현 선생님이 뭐라고 하셔?”
고채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다행이다. 환자 잠깐 끊겼으니까 좀 쉬고 있어.”
“그래. 고마워.”
‘앞에서는 착한 척 다해놓고 날 골탕 먹였단 말이지?’
다음 순간 심소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 * *
‘괜찮을까?’
고채연과 심소현. 두 사람을 보는 시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일단 일은 잘하고 있고.’
정신과 환자를 보러 내려왔다가 본의 아니게 고채연의 환자에 대해 듣게 된 상황.
환자를 노티하는 과정도 훌륭했고 평판도 좋다.
인턴 근무 성적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조직 진단’ 탓에 심철호의 영향력도 전과 같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system : 시청타촉의 포션의 효과가 곧 종료됩니다.]
[남은 시간 00 : 00 : 07]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일말의 불안.
시현은 알림창을 닫으며 응급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