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Chapter 32. 인턴전쟁 (4)
* * *
“저, 이거 드시고 하세요.”
[Cafe Gustav]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차지간호사에게 음료가 담긴 캐리어를 내밀었다.
“누구…… 실까요?”
“김미나 환자 보호잡니다. 덕분에 아내는 방금 지금 수술실 들어갔어요.”
“아,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제가 더 감사하죠. 응급실 선생님들이 빨리 조치해준 덕분에 별문제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남자는 차지간호사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응급실을 떠났다.
“맛있겠다! 마침 좀 졸렸는데.”
“담당 인턴 고채연 선생님이었죠? 덕분에 커피도 얻어 마시네요.”
순식간에 스테이션 분위기가 밝아졌다.
“선생님들도 어서 드세요.”
잠시 환자가 끊긴 틈을 타 인턴들도 음료를 한 잔씩 들었다.
“채연아, 잘 마실게. 까다로운 환자였는데…… 나 대신 보느라 고생했지?”
심소현이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때그때 시간 되는 사람이 보는 거지. 신경쓰지 마.”
고채연이 대답했다.
“아냐. 정말 고마워! 앞으로 열심히 할게!”
콜록. 콜록.
남자 인턴의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갑자기 왜 저래? 심소현 너 뭘 잘못 먹은 거냐?’
생전 못 보던 광경에 마시던 커피가 사레들릴 지경이었다.
“근데 처음에 환자랑 같이 왔던 남자 있잖아. 불륜남 맞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고채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에이, 다 알면서. 저 보호자 착한 사람 같은데 좀 마음이 그렇다. 이거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심소현이 이죽거렸다.
“그 이야긴 그만하자. 환자 사생활이고 우리가 얘기하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
“농담이야, 농담. 얘는 왜 정색을 다 하고 그래? 하하하.”
‘방금 잠깐 얼굴 굳어진 것 같은데.’
별일 아니라는 듯 웃는 것 같았지만 남자 인턴은 심소현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잠시만, 나 어지러운 것 같은데. 어어…….”
휘청.
다음 순간 심소현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소현아, 괜찮아?”
고채연이 부축해준 덕분에 간신히 쓰러지는 것은 면했으나 들고 있던 커피를 엎지르면서 두 사람의 가운이 엉망이 됐다.
“아, 미안해. 오래 서 있으면 가끔 이래. 숙소에 메토프롤롤 있는데 하나 먹고 오려고…… 잠깐 다녀와도 될까?”
메토프롤롤은 베타 차단제의 일종으로 미주혈관성 실신에 쓰는 약이었다.
“힘들면 잠깐 누워있다가 와. 환자 많이 오면 부를게.”
“정말? 그럼 오는 길에 새 가운 가져올게. 고마워.”
심소현은 미안한 듯 황급히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그녀의 뒷모습에 남자 인턴은 미간을 찌푸렸다.
* * *
며칠 뒤 응급실.
“선생님, 나랑 얘기 좀 해요.”
고채연을 찾아온 30대 초반 여성.
난소 염전으로 응급수술을 받고 퇴원한 환자, 김미나였다.
“아, 여긴 어쩐 일이세요? 수술 잘 받으셨나요?”
“지금 수술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도대체 남편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안부를 묻는 고채연에게 김미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편이 다 알아버렸다고요! 병원에서 말해줬다는데, 선생님밖에 더 있어요?”
“전 남편분과 따로 면담한 적이…….”
“시치미 떼지 말아요! 내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환자는 언성을 높이며 고채연의 말을 끊었다.
“환자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보안요원이 환자를 말렸다.
“이러다 이혼당하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으라고요?”
“이쪽으로 오시죠.”
보안요원의 안내에도 환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이거 놔! 나 저 인턴한테 할 말 있다고!”
극도로 흥분한 환자가 고채연에게 가방을 던지려 하는 찰나.
텁.
누군가 순식간에 환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안 놔? 당신 뭐야?”
김미나 환자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을 쥔 남자의 명찰을 향했다.
[정신과 레지던트 천시현]
“환자분, 진정하세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잘못하면 위자료 물게 생겼다고!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빠져요!”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적절한 방법이 아닙니다.”
시현은 턱짓으로 응급실 벽에 걸린 포스터를 가리켰다.
[응급실 폭행은 공공의 안전과 생명을 해치는 중범죄입니다. 의료법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징역 5년 또는 5천만 원 이하 벌금……]
“뭐 이런 병원이 다 있어! 정식으로 문제 제기할 거니까 그리 아세요!”
시현이 손을 놓자 환자는 씩씩거리며 보안요원과 함께 응급실을 나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고채연이 시현에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탓인지 가늘게 손을 떨고 있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환자분께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
시현이 대답하는데 누군가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왔다.
“고채연 선생,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김정현]
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다가와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고채연을 나무랐다.
“정신과 하겠다는 사람이 도대체…… 비밀보장의 의무 몰라요? 이건 기본이 안 된 거죠!”
“죄,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환자분께 엄청 실례한 겁니다. 이 건은 과장님께 보고 드릴 테니까 그리 아세요.”
김정현의 말에 스테이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system : 레지던트 김정현의 감정은 ‘즐거움’ 입니다.]
‘이것…… 봐라.’
전후 사정을 따지지 않고 고채연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고채연 쌤이 보호자한테 따로 얘기했다고?”
“아니, 우리한테는 그렇게 입단속을 시키더니?”
간호사들이 수군대는 사이.
[system : 인턴 심소현이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새로 떠오른 알림창에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 *
일식당 청산.
“형님, 무슨 일이세요? 밥을 다 먹자고 하시고?”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해? ‘우리 사이’에 그냥 볼 수도 있는 거지.”
심철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 양반이 무슨 꿍꿍이야.’
전민성. 삼아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이자 교육수련부장으로 심철호의 5년 후배였다.
‘우리 사이’라고 하기에는 몇 년 전에 라운딩 같이 간 게 전부. 부원장과의 독대가 그리 편치는 않았다.
“우리 소현이 말이야. 벌써 내년이면 레지던트라고. 세월 참 빠르지?”
“그러게 말입니다. 예과 들어갔다고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무슨 과 시킬지 고민이 많아. 잘 좀 부탁해.”
심철호가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어휴. 형님, 저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이놈 보게.’
자신이 무려 하늘 같은 본과 4학년일 때 새파란 예과 1학년 신입생으로 들어왔던 후배였다.
‘아무 힘도 없다고?’
비록 지금이야 같이 나이 먹는 처지라고는 해도 선배 대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에이, 레지던트 선발하는데 교육수련부장이 힘이 없으면 누가 힘이 있어?”
“레지던트야 인턴 성적하고 선발 시험 점수 단순 합산인데요, 뭘.”
전민성이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면접 들어가면 전 교수가 예쁘게 좀 봐줘.”
“아… 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정신과 쓸 모양이야. 요즘 정재영(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이 괜찮다잖아.”
“아, 요즘 그렇긴 하죠.”
“다행히 정신과 같이 쓴다는 인턴이 이번에 사고를 좀 친 모양이야. 알아서 탈락할 것 같기는 한데.”
“사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영혼 없는 대답을 반복하던 전민성은 정신이 번쩍 든 기분이었다.
“법무팀장한테 들었는데 얼마 전에 응급실에서…….”
심철호는 최근 응급실에서 고채연이 봤던 환자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 인턴 때문에 환자가 이혼하게 생겼다는 거예요? 그 집 남편한테 환자가 외도한 걸 따로 전해서?”
“그렇다니까! 의사가 환자만 잘 치료하면 됐지 오지랖도 그런 오지랖이 없어. 안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법적 처벌도 문제지만 병원 내에서도 윤리위원회를 열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전민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 바로 그거지.”
“확실히 문제가 될 사안이네요.”
“소현이 잘 봐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위원회 열리면 잘 처리해줘. ‘원칙대로’ 말이지. 하하하.”
심철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전민성에게 술을 한잔 더 건넸다.
* * *
며칠 뒤 정신과 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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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인턴 및 전공의 대상 개인정보보호 및 보안 교육 11월 5일 12 : 30 본관 15층 대회의실(중식 제공)
[공지] 윤리위원회 회의 일정 안내 11월 5일 13 : 30 본관 15층 소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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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은 OCS에 뜬 원내 회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나.’
전에 없던 정보 보호 교육과 윤리위원회 회의가 잡힌 이유는 알만했다.
“시현아, 그거 알아? 응급실에서 채연이 실수로 보호자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걸 전해서 이 사달이 난 거래.”
황진호가 시현의 모니터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설마, 정말 채연이가 그랬을까?”
“이거 응급실에서 직접 들은 얘기야. 환자가 법무팀까지 쫓아와서 난리 치고 갔다는데?”
평소 고채연을 좋게 보던 황진호까지 이렇게 생각할 정도라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 * *
“벌써 연말이 다 돼가는데 내년 지원자들은 몇 명 정도 되나요?”
아침 회진을 마치고 이광섭 교수가 물었다.
“일단 지금까지는 원내 4명 원외 1명이 있습니다. 최종 경쟁률은 3대 1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권원주가 대답했다.
“심소현 선생도 지원한다고 들었는데 평판이 어떤가?”
이광섭의 질문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의국장은 좀 아는 거 있나?”
“네, 좀 더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권원주 또한 즉답을 피했다.
“아무래도 인턴은 1년차가 더 잘 알겠지? 김 선생이 보기엔 어때?”
“아직 정신과 인턴을 돌지 않아서 잘…….”
그야말로 두루뭉술한 대답.
객관적인 평판은 최악이었지만, 상대가 부원장의 딸인 만큼 있는 그대로 혹평하기란 부담스러웠다.
“그래요?”
이광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대화였음에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모자라는 부분이 ‘실력’이라면 과에 들어오고 나서 채워도 됩니다. 더 중요한 건 환자를 대하는 ‘태도’죠. 남은 몇 달 동안 잘 평가해 보세요.”
평소 이광섭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고채연이 신입 1년차가 되어야 하는데, 다른 일도 아니고 환자의 비밀을 노출했다는 이유로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으니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의국원 한 명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야.’
회귀 전 고채연이 진료했던 모든 환자의 담당의가 바뀌는 셈이었다. 그것도 무능한데 불친절하기까지 한 최악의 의사로.
- 선생님은 너무 착한 게 탈이에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해보세요. 내가 튈 수 없다면 상대방을 끌어내려서라도.
시현은 이내 면담실에서 김정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쪽도 굳이 사정 봐줄 필요는 없겠지.’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먼저 시작한 싸움. 정당방위는 필수였다.
회진이 끝나자마자 시현은 핸드폰부터 열었다.
- 어, 천 선생. 무슨 일이야?
수화기에서 익숙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센터장님.”
꽈악.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시현은 병동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