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42화 (142/195)

142화 Chapter 32. 인턴전쟁 (5)

* * *

“어서 와. 웬일인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조광필은 냉장고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 건넸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일전에 그 연구 문제로? 그거라면…….”

최근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이라면 응급환자 AI 모델뿐이었다. 처음에야 조광필이 받은 국책사업 연구비에서 일부를 지원해줄 생각이었지만, 삼아전자 쪽에서 관심을 가진 이상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입니다. 응급실 인턴 문제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고채연 선생이라고…….”

“아, 그 이름 알아. 근무하면서 실수가 좀 있었던 모양이던데? 치프가 따로 보고하더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겁니다. 그럴 친구가 아닙니다.”

“그럴 친구가 아니다……. 전부터 잘 알고 지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조광필이 흥미롭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네만, 명백한 잘못을 했어. 자네와 인연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봐줄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잘못한 게 있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겠지요. 다만 고채연 선생이 적절하게 소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면 됩니다.”

인턴 혼자 힘으로 윤리위원회를 감당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윗선에서는 인턴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운 뒤, 레지던트 선발에서 탈락시키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으니까.

“기회라. 그건 어떻게 주면 좋겠나?”

“우선 필요한 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었고,

범인이 누군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시현은 자신의 계획을 조광필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띠띠띠띠 띠리링.

“아빠, 나 왔어!”

평소 같으면 심철호가 부원장실에 있어야 할 시간.

‘어? 어디 가셨지?’

진료 시간도 아닌데 자리를 비운 것이 이상했다.

심소현은 소파에 몸을 파묻듯 앉아 핸드폰을 열었다.

- 노티하기 어려운 환자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도와줄게요.

“나한테 관심 있는 거 맞겠지?”

며칠 전 김정현이 보낸 문자였다.

레지던트 3년차.

내년이면 치프 연차인 데다 응급실에 상주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도움받을 것도 많다.

“뭐 그 정도면 얼굴도 그럭저럭 괜찮고.”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화들짝.

“아빤 인기척 좀 해!”

딸 방에 불쑥 들어온 아빠 대하듯 심소현이 황급히 핸드폰을 가렸다.

“소현아, 여기 부원장실이다.”

“…….”

실상은 반대였지만.

“쉴 때는 인턴 숙소에 있으라고 몇 번을 말하니?”

“거긴 애들 많아서 쉬기 불편하다니까.”

“그래도 조심해야지. 병원에 보는 눈도 많은데.”

“근데 어디 다녀와? 이 시간에?”

심소현이 민망한 듯 말을 돌렸다.

“조광필 교수 만나고 왔다. 응급실 일로 골치 아파하는 것 같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골치가 아프다니?”

“환자가 병원 상대로 고소를 했어. 하필이면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조만간 기사도 낸다더구나. 그 인턴 평소 행실이 어때?”

“음, 착한 척하는 게 좀 짜증나는 스타일? 아무튼, 이대로만 가면 나 그냥 합격하는 거 맞지?”

“교육수련부장한테 얘기해뒀다. 그 애만 아니면 아마 네가 무난하게 합격할 거야. 너, 혹시 나 모르게 사고 친 건 없지?”

심철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빤 날 뭘로 보는 거야? ER 레지던트한테 칭찬도 받았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너무 좋은 티 내지 말고 지내. 남은 기간 조심 또 조심하고.”

* * *

며칠 뒤 본관 15층 대회의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올라와 있었다.

“이것으로 개인정보보호 및 보안 교육을 마치겠습니다. 끝으로 선생님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교육수련부장 전민성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병원 PC에 임의로 불법 소프트웨어를 설치한다던가 아이디 돌려쓰는 문제 이런 건 사실 마이너한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진료 중 부주의로 환자 정보를 노출하는 행위죠.”

“정보를 노출하는 행위? 그게 뭔 소리야?”

“최근에 무슨 사고 있었나?”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 있을 윤리위원회에서도 그 이슈를 다룰 예정입니다.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우리 병원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원칙적으로 처리할 생각입니다. 선생님들도 각별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전민성은 연단에서 내려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 * *

잠시 후 소회의실.

회의실 테이블에는 8명의 교수가 둘러 앉아있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이 안건에 대해서는 일단 설명 들으신 후에 자유롭게 의견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윤리위원회라곤 했지만 사실상 징계위원회.

평소와 달리 원장과 부원장, 그리고 법무팀 직원들도 눈에 띄었다.

“법무팀장님, 시작해주십시오.”

전민성이 말했다.

“법무팀 황영수입니다. 일단 환자는 산부인과적인 증상으로 응급실을 방문하셨던 30세 여자분입니다.”

황영수가 자료를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환자는 복통을 주된 호소로 응급실을 방문했습니다. 문제는 처음 환자를 데려온 보호자와 수술 사인을 한 보호자가 달랐다는 점인데요.”

“야밤에 갑자기 난소 염전이 왔는데 하필이면 다른 남자랑? 이거 불륜이네.”

산부인과 과장, 이정광이 끼어들었다.

난소 염전이라고 다 성관계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케이스는 딱 봐도 감이 온다는 말투였다.

“네, 정확하십니다. 상간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환자가 주장하는 것은 병원 과실로 두 사람의 관계를 남편이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어허, 바람피우다 걸렸으면 남편한테 잘못했다고 빌 것이지 왜 병원을 걸고넘어져? 아무튼, 우리 과 레지던트는 이런 실수 안 해요. 환자의 임신력이나 출산력 기록할 때도 보호자에게 비밀로 해야 할 부분을 따로 정리하니까요.”

이정광이 혀를 찼다.

혹여 자기 과에 불똥이 튈까 일찌감치 선을 긋는 모습이었다.

“네, 맞습니다. 환자분도 산부인과에는 불만이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응급실 의사’ 때문에 남편이 이런 사정을 알게 됐다고 컴플레인을 하고 있습니다.”

“응급실 의사라면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이번에는 원일웅이 물었다.

“당시에 응급실 당직은 응급의학과 3년차 김정현 그리고 인턴 4명이 서고 있었습니다. 면담결과 김정현 선생은 다른 응급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고 하고 환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턴 중 한 명이라는 건데. 도대체 누가?”

“그거야 환자를 초진했던 인턴 아니겠습니까?”

심철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응급실 인턴들 정신없이 바쁜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 다른 환자 히스토리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겠지요. 환자 초진은 고채연 선생이 봤던 것으로 나와 있네요?”

“그렇습니다. 실제로 환자도 응급실을 찾아와 고채연 선생에게 항의했었습니다.”

법무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환자의 주장 아닙니까? 일방적인 주장에 우리가 책임을 진다는 건 좀. 실제로는 환자 남편이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었는데, 괜히 응급실을 걸고넘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요.”

조광필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불법 흥신소에 의뢰해서 불륜 사실을 안 것일 수도 있는데, 그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응급실 의사에게 들었다고 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가 응급실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낌새는 없었다고 합니다. 제 딸…… 아니, 다른 인턴 선생 말로는 오히려 환자 잘 봐줘서 고맙다고 음료수도 사주고 갔다는데요?”

심철호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그때까지 보호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배우자의 외도를 알고 화가 난 상황이면 굳이 고맙다는 말을 하러 다시 올 이유가 없었다.

“물론 고채연 선생의 실수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제 더 커지기 전에 누군가 책임은 져야 할 겁니다.”

법무팀장의 건너편에 앉은 안경 쓴 교수가 한마디 보탰다.

그의 말에 심철호는 속으로 웃었다.

“환자분이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신문에 오르내려서 병원 이미지에 먹칠하기 전에 마무리 짓죠.”

“그럼 더 이야기할 것은 없이 고채연 선생에 대한 처벌 수위만 결정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다른 교수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고채연에게 불리했다.

“내규에 따르면, 비밀유지의무 위반 시 고의성이 있는 경우라면 감봉에서 정직까지도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료를 통해 얻은 정보를 사사로이 사용한 경우…….”

전민성이 미리 준비한 답변을 읽어내려갔고,

심철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좋아. 원칙대로 하자고.’

비정규직 의사인 인턴에게 징계란 레지던트 탈락과도 같았다.

가뜩이나 공정한 레지던트 선발을 강조하는 분위기라 꼼수를 쓸 수 없는 상황인데, 경쟁자가 알아서 떨어져 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의견 잘 들었습니다. 조광필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체로 이견이 없는 가운데 심철호가 입을 열었다.

응급실 책임자인 그만 동의한다면, 회의를 마무리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해명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징계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상황.

조광필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해명이라. 굳이 그렇게까지…….”

“당사자 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당시에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도 불러서요.”

철컥.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고,

줄지어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심철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회의실 뒤편으로 3년차 김정현, ER 차지간호사 그리고 인턴 4명이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그중에는 고채연과 심소현도 있었다.

“환자는 응급실 의사에게 들은 내용 때문에 본인이 이혼하게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법무팀장이 고채연을 노려보았다.

“…….”

“법무팀에서는 이 문제가 정식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고 환자분과 최대한 원만한 합의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신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 보호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고채연은 억울한 표정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저,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대화가 평행선을 이어간 지 10여 분. 불편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 손을 들었다.

“응급의학과 3년차 김정현입니다. 이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고채연 선생과 환자 보호자가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철렁.

고채연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응급실 출구 앞 로비에서 두 분 잠깐 같이 계시지 않았나요?”

“아, 커피 잘 마시겠다는 인사 정도만 했습니다. 화장실 다녀오다가 아주 잠깐요.”

“짧은 시간이라도 아내분이 다른 보호자랑 오셨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로비에서 고채연과 보호자가 인사를 하며 지나간 시간은 몇 초 남짓.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지만 회의실 분위기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가 왜 그런 얘기를…….”

“선생님, 환자분께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법무팀장의 말에 고채연은 입술을 깨물었고,

조광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명할 기회를 주긴 했는데.’

애초에 교수회의 수준에서 끝날 일이었음에도 굳이 당사자를 부른 건 시현의 부탁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의실의 누구도 고채연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추가 논의 후에 최종 결정 사항은 서면으로 통보하도록…….”

‘결국 이렇게 된다면…….’

징계는 피할 수 없다.

조광필이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똑똑.

“혹시 여기가 소회의실인가요?”

의외의 인물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법무팀에서 연락받고 왔습니다.”

멋쩍어하며 회의실로 들어온 그는 김미나 환자의 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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