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Chapter 32. 인턴전쟁 (6)
“늦어서 죄송합니다. 법무팀에서 연락받고 왔습니다.”
멋쩍어하며 회의실로 들어온 그는 김미나 환자의 남편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우리 팀에서 연락했다고?’
법무팀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호자를 바라보았다.
“아, 김미나 환자 보호자시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제가 아내를 오해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고 해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그런 자리가 아닌데…….’
회의실의 교수들은 서로 눈치를 살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며칠 전 응급의료센터 센터장실.
“기회라. 그건 어떻게 주면 좋겠나?”
“일단 회의실에 당시 근무했던 인원들을 모두 불러주십시오.”
“그 사람들은 왜?”
“일을 꾸민 사람이…… 그 안에 있습니다.”
“사람만 모은다고 해결이 될까? 다들 아니라고 할 게 뻔한데.”
“그리고 회의 시간에 맞춰 보호자 올려보내겠습니다. 직접 확인할 것이 있으니까요.”
시현은 다 계획이 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알겠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고.”
“네, 위원회 두 번 열지 않도록 준비하겠습니다.”
* * *
‘정말 왔군.’
시현이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호자를 데려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저희 의료진 실수로 두 분을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네요.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은데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조광필이 보호자에게 물었다.
“응급실에서 나오는데 담당 의사라는 분이 따라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굳이…… 따라 나와서요?”
“네, 아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어떤 남자랑 같이 있었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묘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상당히 주관적인 평가 아닌가요? 심증일 뿐인 거고요.”
“맞아요. 아내도 아니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분 말로는 난소가 꼬여서 복통이 생긴 게 성관계 때문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정말인가요?”
“그건…….”
‘도대체 왜 그런 말을?’
난소 염전을 무슨 성병이나 되는 것처럼 설명하다니. 보호자의 말에 조광필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번졌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산부인과 과장 이정광이 대신 대답했다.
“난소 염전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낭종이 있는 경우나 인공 수정을 위한 과배란 유도가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 심지어 등산하다가 생길 수도 있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어요.”
애초에 자료만 보고도 불륜임을 눈치챘던 그였지만, 보호자용 설명은 따로 있었다.
“맞아요, 전날 친구랑 등산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마침 예로 든 경우가 환자의 상황과 일치하기까지.
이정광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글쎄요. 이해할 수 없군요. 의사라는 사람이 객관적인 것만 이야기해야지 소설을 쓰고 앉았으면 어떡하나. 이거야 원!”
이정광이 회의실 뒤쪽에 앉아있는 인턴들을 보며 혀를 찼다.
“도대체 누가 그런 설명을 하던가요?”
조광필이 물었다.
“‘고채연’이라는 의사였습니다. 응급실 인턴이라고 했어요.”
째릿.
회의실 내 교수들이 일제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고채연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고채연 선생, 보호자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계속 발뺌을 해요? 사과를 드려도 모자랄 판에! 위원회 처분에 따르도록 하세요.”
심철호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젠 별수 없나.’
조광필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근무자들을 물론 환자의 남편까지 데려왔는데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보호자께서 어렵게 오셨는데 사과도 하시죠.”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로 환자분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고채연는 여전히 울먹이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보호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잘못을 했고 환자가 피해를 입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결국 담당 의사였던 자신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 저한테 설명해주신 분은 이분이 아닌데요?”
응? 뭐지 이 상황은?
회의실의 모두가 벙찐 표정으로 고채연과 보호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명은 저기 저 선생님이 해주셨는데요?”
보호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그 끝에는 하얗게 질린 심소현이 앉아있었다.
* * *
“보, 보호자님. 아까는 분명 고채연 선생한테 들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심철호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네, 맞아요. 저분이 고채연 선생님 아닌가요?”
“잘,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전 심소현이에요. 담당 환자도 아닌데…… 제가 왜 보호자님을 따로 만나요? 저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요.”
“그럴 리가요. 하고 계신 귀걸이에 목걸이 구두까지 같은 ‘CHANNEL’ 브랜드라서 제가 똑똑히 기억하는걸요. 지금도 같은 거 하고 계신 것 같은데.”
“…….”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딸을 보자 심철호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엉뚱한 일 벌이지 말랬더니!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거야!’
똑똑똑.
예상치 못한 전개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누군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각진 얼굴에 스포츠머리 그리고 우람한 팔 근육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센터장님, 여기 말씀하신 영상 가져왔습니다.”
정보지원팀장 주용대가 조광필에게 USB를 건넸다.
‘내가 언제?’
조광필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이내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이리될 줄 알고 있었나?’
“고맙습니다. 여기서 같이 볼 수 있을까요?”
“네, 준비하겠습니다.”
주용대는 회의실 스크린을 내린 뒤 빔프로젝터를 켰다.
영상에는 응급실에 커피를 들고 찾아온 보호자의 모습이 담겼다.
이내 응급실을 떠나는 보호자. 로비에서 고채연와 마주치는 장면이 잠깐 있었지만 별다른 대화 없이 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정말 잠깐 지나간 게 전부네? 거의 스친 수준이잖아?”
교수들이 수군거렸다.
다음 영상이 연속 재생되고.
보호자가 다시 나타난 것은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
깍지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초조한 듯 바닥을 바라보는 보호자에게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거 누구야?”
“고채연 선생은 아닌 것 같은데?”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5분 넘게 이어지는 대화.
그 대화 끝에 고개를 돌려 대기실을 떠나는 얼굴은 다름 아닌 심소현이었다.
“헉, 진짜 심소현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있던 차지간호사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털썩.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심소현을 향해 조광필이 노기를 띠며 물었다.
“심소현 선생,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해보세요.”
* * *
소회의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B회의실.
[system : ‘시청타촉의 포션’ 효과가 곧 종료됩니다.]
[남은 시간 00 : 00 : 09]
조광필이 심소현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시현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일단 여기는 정리 됐고.’
먹먹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 * *
2주일 뒤.
“심소현 사직서 썼다던데 무슨 일 있었나?”
회진이 끝나고 치프 권원주가 레지던트들에게 물었다.
“소현이가 평소에 편두통이 워낙 심했는데 인턴 하는 내내 고생을 했었나 봐요. 1년 쉬기로 하고 그만뒀습니다.”
김원기가 대답했다.
“아냐. 인턴들 하는 말 들었는데, 응급실에서 환자한테 고소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뒀다는 말도 있던데?”
“하긴, 평소 하는 거 보면 그러고도 남지.”
“사고 친 거 동기한테 떠넘기려다가 딱 걸렸다던데.”
비밀 유지 의무를 어긴 것으로도 모자라 동료 의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까지 했으니.
징계 수위는 최소 정직, 사실상 퇴출이었다.
정식 발표가 나기 전에 미리 사직서를 제출한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 이상으로 회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최종 결과는 추후 서면으로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심철호는 당시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을 모두 나가도록 했고, 교수들에게 울며 사정도 했으나 증거가 너무도 명백했다.
“지금 분위기면 내년에 인턴 다시 하는 것도 힘들 거예요.”
“심소현은 그렇다 치고 고채연은 윤리위원회 불려갔다더니…… 괜찮은 거 맞아? 올해 지원자들은 뭔가 못 미더운 것 같은데?”
“아, 고채연 선생은 별다른 처벌 없이 근무 계속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
“환자 보호자 사이에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환자가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맞아요. 고채연 선생은 일도 잘하고 평판도 좋아요.”
권원주의 말에 1년차들이 고채연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렇담 다행이고. 그럼 고채연하고 장미은 두 명이 되는 건가? 원외 지원자는 아무래도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순혈주의 탓에 아직까지도 모교 졸업생에 원내 인턴 출신에 대한 선호가 높았다.
그렇게 보면 한국대 출신의 채이진이 내과에 지원하여 합격한 것이 이례적일 정도였다.
“휴. 사실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네.”
권원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퀘스트 ‘재앙의 발걸음’의 성공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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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재앙의 발걸음]
난이도 A+
성공 조건 : 공정하고 투명한 레지던트 선발
성공 보상 : 50,000P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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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50,000P)]
예기치 못한 변수만 없다면 고채연이 정신과에 합격할 가능성이 컸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잘 못 뽑은 레지던트 한 명이 과 분위기를 망치기 마련.
사실, 과 분위기는 둘째 문제였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들의 경과.
입원 시 만나는 병동 담당의가 때론 주치의인 교수님보다 환자 경과에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폐쇄병동도 지켰고 환자도 넘쳐난다.
연구 주제도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것들뿐.
지금의 의국 분위기라면 그녀 또한 회귀 전보다 더 뛰어난 역량을 갖춘 레지던트로 성장시킬 자신이 있었다.
딩동!
연이은 알림음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시현아, 무슨 좋은 일 있어?”
“그러게. 왜 혼자서 실실 웃고 있냐?”
“곧 3년차 된다고 너무 들떠있는 거 아냐?”
“아, 아닙니다.”
권원주와 김석용의 말에 시현이 손사래를 쳤다.
“시현이야 워낙 열심히 하니까 걱정은 안 되는데…… 연말이고 하니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해. 이제 시니어니까 1, 2년차 교육도 챙기고.”
“네. 앞으로 혹독하게 굴…… 아니, 최선을 다해서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시현은 새로 떠오른 알림창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system : 추가 보상(+a)을 지급합니다.]
[너로 정했다! - 역량있는 레지던트 선발로 입원환자에게 양질의 진료를 제공합니다. 후배 레지던트가 환자 치료에 성공할 경우 사용자에게도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1,000 ~ 3,000P/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