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Chapter 33. 휴가 (1)
어느덧 2년차의 12월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 결과 나오는 날 아냐?”
“맞아! 얼른 확인해봐!”
오늘은 레지던트 1년차 합격자 발표일.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미처 파악하지 못한 변수가 있을 수도 있었다.
시현은 자신이 다시 1년차가 된 것 마냥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 홈페이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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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아대병원에서 환자 중심 진료를 실천하실 예비 레지던트 선생님들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201x 삼아대병원 레지던트 합격자
…
안과 - 20208 안형근 20209 조민우
정신과 - 20210 고채연 20211 장미은
정형외과 - 20212 신승범 20213 윤호민
피부과 - 20214 양재승 20215 이유진
...
...
* 아울러 지원해 주신 많은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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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합격했구나.’
시현은 결과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채연과 장미은.
두 사람이면 믿을 수 있다.
‘안과 레지던트 안형근…….’
낯선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뜻밖의 알림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딩동!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 – 불특정 다수 환자의 눈 건강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5,000P)]
이제는 안과에서도 보상이 들어온다.
심소현 대신 공정한 경쟁을 통해 합격한 레지던트는 훨씬 더 좋은 안과 의사가 될 터였다.
[피부가 좋아졌어요! - 불특정 다수 환자의 눈 건강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5,000P)]
거기에 피부과까지. 그리고 보니 피부과 레지던트 이름도 시현의 기억과 달라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차트’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보상이 달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궁금증이 일었다.
“아, 이제 12월 말이니까 겨울 휴가 일정들 제출해.”
“벌써 휴가 시즌이 됐네요.”
권원주의 말에 레지던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12월 말부터 2월 말까지는 별도의 학술 행사 없이 통상적인 진료 업무만 보는 기간이었다.
각종 발표와 증례 준비가 없는 것만으로도 레지던트들은 한숨을 돌렸다.
그래 봐야 주당 근무 시간은 80시간 이상일 것이 분명했지만.
‘시간 빠르네…….’
1년차 때는 휴가라고 해도 며칠 집에서 쉬다 복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2년차 여름에도 TMS에 연구에 일정이 바빠 제대로 쉬지 못했고.
병원에 갇힌 지 2년쯤 되다 보니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휴가 스케쥴 정리해서 올리면 우린 공부하러 들어갈 거야. 이제 나랑 하도영 선생님은 전문의 시험만 신경 쓸게.”
학기 말이 되면 4년차들은 외래진료 외의 의국일은 대폭 줄이고 수험생처럼 생활하는 것이 관례였다.
“김석용 선생은 다음 치프 임기 동안 1년차들 잘 봐주고 인턴 선생들 평가 잘 하고…… 뭐니뭐니해도 사람 잘 뽑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네, 선생님.”
권원주가 다음 치프인 김석용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자, 올해도 제비를 한번 만들어볼까?”
김석용이 메모지에 1부터 6까지의 숫자를 쓰고 두 번 접어 종이 상자에 넣었다. 4년차 두 사람은 시험 기간이라 해당 사항이 없었다.
“각자 한 장씩들 뽑아.”
시현이 입국하기 훨씬 전부터 휴가 기간은 제비뽑기로 정하곤 했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룰이 있었는데, 일단 휴가를 나갈 수 있는 레지던트는 한주에 1명으로 제한했다.
가뜩이나 4년차 두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2명 이상이 휴가를 가면 업무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규칙.
윗년차와 아랫년차는 제비를 교환할 수 없다.
1등을 뽑은 레지던트가 가장 먼저 원하는 휴가 기간을 고를 수 있는데,
1년차들이 좋은 기간을 선점하더라도 윗년차들 눈치 보느라 양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앗, 3등입니다!”
“저는 4등이요.”
일단 1년차들이 무난한 3, 4등을 뽑았다.
“아…… 5등이네.”
“앗싸! 나는 2등.”
3년차 두 사람은 희비가 엇갈렸다.
남은 건 1등과 6등. 시현과 황진호의 쪽지에 의국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 안돼! 내가 6등이라니!”
황진호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그는 망연자실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여자친구와 휴가 일정을 맞춰보는데, 그때 말고는 도저히 맞는 시간이 없었다.
“시현아, 내가 1월 말에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런데…… 그때 휴가 써도 될까?”
황진호가 시현에게 물었다.
그 모습에 시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직도 만나고 있다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자친구와 어디 가기로 한 모양인데, 회귀 전 이 무렵은 두 사람이 이미 헤어지고 난 뒤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연말은 따로 보냈는데…….’
겨울 휴가를 같이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쁘지 않은 관계로 봐야 했다.
“그래, 바꿔줄게.”
“크흡. 고맙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1번이 적힌 쪽지를 건네자 황진호는 감동한 눈빛으로 시현을 껴안을 기세였다.
“어차피 내가 고를 일정은 별로 인기가 없어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거야.”
시현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달력 위에 하나둘 레지던트들의 이름이 적히고, 시현이 마지막으로 이름을 올렸다.
“시현아, 이러면 네가 너무 못 쉬는 거 같아서 미안한데…….”
“괜찮아. 마침 그때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시현이 선택한 휴가 기간에는 설 명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굳이 휴가를 쓰지 않아도 당직만 아니면 쉴 수 있는 날들.
쉬는 날 하루가 간절한 레지던트에게는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오케이. 일정 어레인지 끝났고…… 다들 열심히 일하느라 정신없었을 테니까, 휴가 때는 푹 쉬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갖도록 해.”
권원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치프 마지막 업무를 마친 터라 홀가분한 표정.
다음 순간, 뜻밖의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뭐지?’
시현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사이 레지던트들은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황진호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시현아 진짜 고맙다. 나 실은 그때…….”
“여자친구랑 재밌게 놀고 와.”
“역시! 너밖에 없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불타오르는 겨울밤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시현이 빙긋 웃으며 허공에 뜬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너도 이번 휴가 때는 푹 쉬어. 레지던트 시작하고 제대로 쉰 걸 못 본 것 같아.”
레지던트 업무가 바쁘다고는 해도 1년차만 지나면 어느 정도 여유를 찾기 마련인데, 시현은 전보다 더 바쁘게 보내는 듯했다.
‘회복 포션’과 ‘숙면 포션’ 효과도 있었고, 꾸준히 운동한 덕에 체력이 좋아진 탓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과로로 몸을 상하지 않을지 걱정할 만했다.
“정세일 교수님도 걱정하시더라고.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고.”
“교수님이? 그래…… 쉬어야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시스템 알림음이 들렸다.
딩동!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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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휴가는 휴가답게]
난이도 E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 휴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용자에게도 ‘세상의 모든 차트’ 시스템에도 때로는 ABR(Absolute Bed Rest, 절대안정) 이 필요합니다.
성공조건 : 일주일 동안 휴식에 전념하면서 일체의 의료 행위 중단
성공 보상 : 체력 +10
실패시 : 시스템 과부하로 주요 기능 셧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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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휴가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데…….’
수락 여부도 묻지 않고 바로 진행되는 퀘스트.
특별한 노력 없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회귀 전의 겨울 휴가에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찔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
시현이 굳이 예전과 같은 기간에 휴가를 쓴 이유기도 했다.
‘난이도 E라고? 천만에. 그런데 왜 이런 퀘스트가…….’
시스템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 * *
시현은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직접 환자를 볼 수 없다면…….’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
[흉부외과 한준식]
뚜 - 뚜 -
- 어, 시현아. 무슨 일?
수화기 너머로 흉부외과 1년차 한준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식아, 휴가 일정 잡았어?”
- 아니? 아직.
“혹시 설 연휴 전후로 잡을 수 있어? 같이 국내 여행 다녀보는 거 어때?”
- 잠깐만…… 가능할 것 같은데? 어디 가게?
다행히도 한준식은 아직 별다른 일정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이번 휴가는 전국 곳곳에 있는 공중보건의 투어 어때?”
“오! 좋아! 그거 괜찮겠네. 올해가 마지막이니까.”
의대 졸업 동기 중 인턴보다 공중보건의를 먼저 시작한 친구들은 보건소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다.
“우선 만기한테 전화해서 시간 되는지 물어볼게.”
시현과 한준식의 대학 동기 최만기.
그는 전라남도 고흥의 한 보건지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좋아! 만기 못 본 지 오래됐네.”
“그래, 그럼 그때 보자.”
한준식은 시현이 짠 휴가 계획을 반기는 듯했다.
‘이번에는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한준식과 통화를 마친 시현은 걱정 섞인 표정으로 2월 달력을 바라보았다.
* * *
2주 뒤 일요일 저녁.
“시현아, 덕분에 잘 다녀왔다.”
황진호는 원래 계획했던 대로 1월 말에 휴가를 떠났고 일요일 저녁에 병원으로 복귀했다.
“네가 휴가 일정 안 바꿔줬으면 숙소랑 항공권 못 구할 뻔했어.”
황진호가 말린 망고와 견과류를 건넸다.
동남아 여행에서 사온 기념품들이었다.
“고마워. 잘 보내고 왔지?”
시현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잘 놀기는 뭘~ 그냥 그렇더라고.”
[system : 황진호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카이트만의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알림창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환자 인계 사항 있으면 알려줘.”
황진호는 멋쩍어하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시현은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의 상태와 치료 계획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902호 환자는 어제 퇴원했고…… 904호에 입원한 신환은…….”
어려운 환자들은 거의 다 퇴원하고 난 뒤라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접수 완료. 이제 내일부터 휴가네? 어디로 가기로 했어?”
“준식이랑 같이 의대 동기 공보의들 찾아갈까 해.”
“오, 힐링 여행인가? 오랜만에 잘 쉬다 와. 병원 일은 다 잊어버리고.”
그의 말에 퀘스트 목록 가장 윗줄의 ‘휴가는 휴가답게’가 빛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시현과 한준식은 아침 근무 교대 시간이 되자마자 병원을 빠져나왔다.
“와 병원 나오니까 살 것 같다.”
한준식은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차 시간 맞추려면 서둘러야 해.”
타이밍 좋게 들어오는 택시를 잡아타고 두 사람은 센트럴시티 터미널을 향했다. 병원으로 들어오는 출근 차량들을 뒤로하고 병원에서 멀어지는 기분이 묘했다.
“요즘 좀 어때? 할만하니?”
“그럴 리가. 지난주도 120시간 근무했는데?”
한준식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3년차가 다 되어가는데 후배들이 적게 들어오다 보니 그의 생활은 1년차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더 문제가 뭔 줄 알아? 올해는 3월에 신규 전공의가 한 명도 없다는 거야. 새로운 1년차가 군의관 마치고 들어오느라…… 5월까지는 모든 게 똑같아.”
“설현수 선생은 잘 버티고 있지?”
“그래. 그나마 현수가 열심히 해서 다행이지.”
회귀 전부터 한준식이 칭찬했었던 후배인 만큼 여전히 1년차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설현수 선생 그 다음은 서동석 선생이었던가.’
수는 적지만, 다행히 인성과 실력 모두 훌륭한 레지던트들이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너희 과는 어때?”
“우리는 고채연 그리고 장미은. 둘 다 괜찮아.”
“이야, 부럽다. 걔들 흉부외과 돌 때 보니까 잘하던데. 역시 정재영이라 이건가.”
한준식이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착하면 깨워줘. 하아암.”
“그래, 한숨 자둬라.”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도 한준식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준식아, 미안하다.’
회귀 전의 흐름대로라면 시골 보건지소에서의 힐링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터미널에서 내려 잠시 정신을 차리는 듯하더니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의식 불명이었다.
휴가 전 연당으로 잠을 거의 자지 못한 탓이었다.
그럼에도 한준식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한 것은 유능한 외과 계열 레지던트 한 명이 합류한다면 뭔가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 * *
PM 12:15
직통 버스는 4시간을 넘게 달려 전남 고흥에 도착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배고프지?”
최만기가 터미널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만기야 밥 좀 맛있는 걸로 사줘라. 당직 끝나고 바로 오느라고 쫄쫄 굶었어.”
한준식이 말했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눈이 반쯤 감긴 얼굴이었다.
“반갑다. 정말…….”
최만기를 본 시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할 지경이었다.
“짜식. 그렇게 반갑냐? 이산가족 상봉 분위긴데?”
최만기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자, 밥 먹으러 가자.”
최만기가 앞장섰고 한준식이 따라나섰다.
시현은 몇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다.’
체감상 4년 만의 재회가 되는 셈.
하지만 단순히 오랜만에 봤다는 이유만으로 만감이 교차한 것은 아니었다.
공중보건의 최만기.
그가 시현이 알던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번 휴가에 꼭 구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