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Chapter 33. 휴가 (3)
‘그때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이 사건의 영향 탓이었을까.
시현은 레지던트 기간 내내 알코올 환자들 보는 것을 힘들어했다.
특히 술 문제로 보호자들을 힘들게 하거나 음주 운전과 같은 법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가 더 문제였다.
그들 또한 도움이 필요한 환자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화를 누르고 치료자로서의 마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 * *
“시현아?”
“으, 응?”
“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밥도 맛있게 먹었으니까 고흥 구경 한번 해야지?”
시현과 한준식은 최만기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멀리서 온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후 반차를 냈다고 했다.
그렇게 경치 좋은 해안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이쪽으로 쭉 가서 나로도 보고 돌아오려는 거지?”
시현이 이정표를 보며 말했다.
“어, 여기 지리를 좀 아네? 와본 적이 있어?”
“아, 아니. 지난번에 로켓 발사한다고 해서 한 번 찾아봤어.”
최만기의 질문에 시현은 대충 얼버무렸다.
일단 여기까지는 회귀 전의 전개와 같다. 점심 메뉴와 드라이브 코스까지도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라면 한준식과 같이 셋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 정도.
사실상 유일한 변수라고 할 수 있었다.
“경치 조오타! 이제 휴가 분위기가 좀 나네.”
“너희는 병원만 아니면 다 좋은 거 아니었어?”
“뭐 사실 그렇긴 해. 하하하.”
시현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준식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컨디션은 나빠 보이지 않아.’
병원에서 멀어질수록 체력을 회복하는 레지던트 특성상 피로에 찌들어있던 오전과는 180도 달랐다.
그 모습에 시현은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고흥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시장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산 뒤 관사로 돌아왔다.
“와, 이 해산물 싱싱한 것 좀 봐. 여기에 소주 한 잔 어때?”
한준식이 슬쩍 최만기의 눈치를 살폈다.
최만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음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만기 술 안 하는 거 알잖아?”
“그래? 그럼 시현이랑 마셔야겠네.”
“오늘은 왠지 나도 술이 별로 안 당기는데.”
“에이 뭐야. 천시현 지난번에는 술 잘만 먹더니만.”
시현 또한 몸을 사리자 한준식은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준식아, 이따가 잘 부탁한다. 나중에 술은 얼마든지 살게.’
시현은 한껏 긴장된 얼굴로 한준식을 바라보았다.
“술은 그렇고 대신 커피는 어때?”
“밤에 커피를?”
“한잔 씩들 해. 밤은 기니까.”
최만기가 주방에서 유리병에 담긴 원두를 가지고 나왔다.
물이 끓는 동안 드리퍼에 여과지를 올리고 그라인더로 원두를 가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핸드드립 하게? 자주 마시나 봐?”
“공보의야 남는 게 시간인데 뭘. 그리고 이 지역은 커피 생산지야. 알고 있었어?”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나온다고?”
커피는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수입하는 거 아니었나?
한준식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내 진한 커피 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 여기 한잔…….”
최만기가 갓 내린 커피 한잔을 건네는 찰나.
똑똑똑.
“누구 있소? 아이고 선생님 계셨구마잉.”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또다시 관사 문을 두드렸다.
* * *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또다시.
주인 할머니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최만기의 시선이 식당 주인의 아들을 향했다.
몸 곳곳에 난 지저분한 상처들과 퉁퉁 부은 얼굴.
시현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엄니, 나 암시랑도 안하당께. 아까 그놈들을 내가 확.”
“아야, 가만히 좀 있어봐야. 이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랴?”
환자는 여전히 심각성이 없어 보였다.
‘이 사람이 술만 안 마셨어도.’
잊은 줄 알았던 분노감이 치밀어 올랐다.
‘심하게 다쳤어. 몇 시간 뒤에 올 쇼크도 문제고.’
아무리 봐도 보건지소의 시설로 진료할 수 있는 환자가 아닌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 응급실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휴, 많이 다치셨네요.”
최만기가 환자 상태를 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밝은 데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만기는 식당 할머니와 정현미로부터 전후 사정을 듣고 환자를 진료실로 옮겼다.
“만기야, 환자 상태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이 정도면 병원급으로 보내서…….”
시현이 최만기를 만류하는데 돌연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현재 퀘스트 ‘휴가는 휴가답게’를 수행 중입니다. 환자의 Severity(심한 정도)평가와 Transfer(환자 이송)에 대한 의사 결정을 삼가십시오.]
시스템은 환자에 대한 직접적인 진료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개입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현은 퀘스트 실패 조건을 떠올렸다.
[실패시 : 시스템 과부하로 주요 기능 셧다운]
‘패널티가 너무 과한데…….’
앞으로 만나게 될 환자들을 위해서도.
시현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도 시스템의 도움은 꼭 필요했다.
최만기가 결국 회귀 전과 똑같은 선택을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려야겠지만,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오염이 많이 됐네요.”
외상에 대한 경험이 훨씬 많은 만큼, 한준식이 나서서 환자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는 일단 보이는 곳부터 생리 식염수로 닦기 시작했는데, 상처에 들러붙은 이물질들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휴. 이대로는 안 돼. 흙도 많이 묻고 아스팔트 찌꺼기가 너무 많이 박혔어.”
한준식이 환자의 상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환자분. 아프더라도 이물질을 제대로 제거해야 하니까 좀 참으세요. 일단 상의부터 벗으시고요. 상처 확인할게요.”
“아따 아프단 말이오. 살살 좀 해달랑게.”
“제대로 이물질 제거를 안 하면 아저씨 잘생긴 얼굴에 흉터 남으니까 가만히 좀 계세요.”
3년차를 앞둔 한준식이 능숙한 솜씨로 드레싱을 이어나갔다.
“아! 뜨드……. 워매! 나 죽네.”
“가만히 좀 계세요! 싸움을 그렇게 잘 하시는 분이…… 엄살 좀 그만 피워요!”
한준식은 넉살 좋게 웃으며 상처 부위를 벅벅 문질러 댔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 보니 뭐든 신속하게 처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환자의 투정을 받아줄 여유 따위는 없었고,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빨리 처치를 마쳤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진짜 문제는…….’
시현은 진료실의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환자가 흉통을 호소하며 쓰러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 됐습니다. 다른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아까부터 가슴팍이 쪼까 아픈 것 같기도 허고…….”
최만기의 물음에 환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정확히 어디가 아프신데요?”
이번에는 한준식이 물었다.
역시나 환자가 자신의 우측 흉곽을 가리켰다.
아직 상의를 탈의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략적인 위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긴 했다.
“아…… 아야야!”
한준식이 갈비뼈를 눌러보자 환자가 화들짝 놀랐다.
“여기가 아프신가요?”
환자가 이를 꽉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비뼈 골절이 있어 보이는데요. 여러 개가 동시에 부러진 게 아닌 이상은 수술 없이 지켜보긴 합니다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셔서 확인해보세요.”
한준식이 환자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준식아, 그 환자 그냥 보내면 안 돼.’
여기서 별다른 치료를 하지 않고 환자를 돌려보낸다면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드레싱을 빨리 마쳐서 시간을 번 것도 자칫 독이 될 수 있었다.
환자가 보건지소를 빨리 떠나면 뒤늦게 발생한 증상으로 복도가 아닌 길에서 쓰러질 것 같았다.
‘저 환자 상태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안되는 건가? 아니면 당장 필요한 검사라도.’
[SORA : 퀘스트 실패로 판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동료 의료인에게 환자에 대한 소견을 제시하는 것 또한 유의해야 합니다.]
‘시스템 관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알고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회귀 전의 사고 후 환자의 시신은 국과수로 보내졌다.
사망 원인이 교통사고인지 그 전에 발생한 외상인지를 감별하기 위함이었다.
‘부검 결과는 경막외출혈에 기흉이 있었다고 했어.’
사실 뇌출혈은 양도 적고 환자의 뇌를 압박하는 정도도 심하지 않아서 직접 사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문제는 기흉이었다.
기흉이 심하면 폐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 공기가 차서 숨을 들이쉬어도 폐가 제대로 부풀지 못한다.
자칫 호흡곤란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
‘우측 폐뿐 아니라 심장과 반대쪽 폐까지 압박한다면…….’
기흉이 더 심해져 긴장성 기흉이 되면 심정지도 발생할 수 있었다.
빠른 시간 내에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초응급 상황이었다.
“한숨 자믄 괜찮을 거 같응께 가볼랍니다.”
환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병원은 최대한 빨리 가보세요.”
최만기도 한준식도 통증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피떡이 되어 왔는데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지금이라도 환자 상태를 알려줘야 해. 기흉이 문제였어. 고인 공기 빼내지 않으면 환자 죽는다고!’
[SORA : 패널티를 감수해야 합니다.]
‘상관없어. 이대로 보내는 것보다 낫잖아?’
시현은 곧바로 진료실 한쪽 벽에 걸려있던 청진기를 집어 들었다.
‘이거 혹시……?’
다음 순간, 유독 크고 묵직한 청진기의 헤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어어? 이게 뭐어-야? 이거 그 ‘신상’ 모델 맞지? 우리 공보의 선생님 장비 너-무 좋은 거 아냐?”
시현은 돌연 최만기의 청진기를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완벽한 발연기였지만, 두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이건 괜찮겠지?’
[SORA : …….]
청진기를 든 것뿐인데 의료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역시! 시현이가 안목이 있네. 맞아. 그거 키트만 모델 9000시리즈야.”
최만기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교수님들도 이거 쓰시는 분들 별로 없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이거 꽤 비싸지 않아?”
“이게 그렇게 좋은 거야?”
시현이 감탄하자 한준식도 최만기의 신상 청진기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소에 X-ray도 없고 해서 청진이라도 제대로 해보려고 큰맘 먹고 샀다. 이게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어서 호흡음이 훨씬 잘 들려.”
“오, 그렇단 말이지?”
최만기는 신이 나서 청진기의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거 좋은 기계 같은디…… 돈 드는 거 아니믄 나도 좀 봐주실 수 있소? 그러고 본께 아까부터 숨이 좀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세 사람의 대화에 환자와 보호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만기야 나 잠깐 이거 써봐도 되지?”
“당연하지. 잘 봐드려.”
최만기가 전자식 청진기, 키트만 9000을 한준식에게 건넸다.
럽덥- 럽덥-
“오오오. 이거 정말 클리어하게 잘 들리네.”
한준식이 환자의 심음(심장 뛰는 소리)을 들어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심장 박동이 약간 빠르긴 한데요 아마 통증 때문에 그런 것 같고요. 심장 소리는 아주 좋습니다.”
한준식은 뒤이어 환자의 가슴팍에 청진기를 댔다.
“숨 들이쉬고 내쉬고 크게 해보세요.”
오른쪽 왼쪽을 오가며 환자의 숨소리를 듣던 한준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이번에는 잘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응? 그럴 리가 있나. 이거 키트만 9000이야! 천천히 다시 들어봐.”
한준식은 환자의 흉곽 여러 곳에 청진기를 대보며 호흡음을 다시 확인했다.
“왼쪽은 전체적으로 잘 들리는 것 같은데 오른쪽 호흡음이 너무 떨어져 있어. 혹시 이게 전자식이라 됐다 안 됐다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적은 없었는데? 내가 한 번 들어볼게.”
이번에는 최만기이 환자를 청진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청진을 마친 최만기 또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오른쪽 호흡음이 많이 떨어져 있어. 청진기가 잘못된 게 아니야.”
최만기의 말에 한준식은 환자의 우측 흉벽을 타진(두드려 진찰하는 법)하기 시작했다.
“어휴. 하마터면 이걸 그냥 보낼 뻔했네…….”
한준식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째 뭐시 이상허요?”
식당 주인 할머니가 걱정스레 묻자 한준식이 대답했다.
“환자분 청진해보기를 잘 했네요. 집으로 가시면 절대 안 되고 구급차부터 불러야 해요. 지금 바로요!”
‘됐다!’
한준식의 말에 시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