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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47화 (147/195)

147화 Chapter 33. 휴가 (4)

“환자분 청진해보기를 잘했네요. 집으로 가시면 절대 안 되고 구급차부터 불러야 해요. 지금 바로요!”

‘됐다!’

한준식의 말에 시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 만철이가 어디 안 좋소? 상처 치료 했응게 내일 가면 안 될까?”

식당 주인 할머니가 걱정스레 말했다.

“겉으로 난 상처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폐에 문제가 생겼어요. 기흉이라고 하는데요…….”

“기흉? 그것이 뭔 소리라요?”

“폐를 싸고 있는 흉막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한준식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할 적절한 단어를 찾고 있었다.

“아드님 허파에 구멍이 난 거예요. 여기 서울에서 오신 삼아대병원 선생님이 진찰하셨는데, 허파에서 바람이 새서 쪼그라든 풍선처럼 됐다고 합니다.”

지켜보던 최만기가 주인 할머니에게 말했다.

시골 어르신들을 많이 본 탓인지 훨씬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니오?”

“네. 허파에 숨이 안 들어가고 있어요.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워매. 그렇다믄 당장에 큰 병원으로 가봐야 쓰겄소.”

주인 할머니는 지금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구급차 부를게요.”

정현미가 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으나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생님, 가까운 소방서 구급차가 하필 출동 나가 있어서 여기 오려면 30분 걸린답니다.”

“그러면 자가용으로 가야지 되는 것 아니냐?”

그 말에 주인 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일단은 여기서 안정 취하면서 기다리시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셋이나 있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맞아요. 괜히 옮기다가 상태 나빠지면 차 안에서는 뭘 할 수가 없어요.”

최만기와 정현미가 보호자를 안심시켰다.

“휴. 하마터면 청진도 안 해보고 그냥 보낼 뻔했네.”

한준식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역시, 거금을 들여 산 이 키트만 9000시리즈가…….”

“그러게 이 청진기 너무 좋다. 3년차 올라가는 기념으로 하나 사야겠어.”

한준식은 최만기의 신상 청진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심야의 쇼호스트 – 사용자의 상품 소개가 실구매로 이어집니다. (어려움 난이도, 500P)]

‘이번 퀘스트…… 이 정도는 괜찮겠지?’

[SORA : 특별히 문제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기력은 좀 더 키우셔야겠어요.]

SORA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가? 뭐 아무렴 어때…….’

구급차가 약간 늦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일단 최만기가 직접 환자를 이송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엄니, 나 좀 어지러운 것 같은디…….”

침상에 누워있던 김만철 환자가 주인 할머니에게 말했다.

“아이고 슨상님, 여기 좀 봐주시요.”

“혈압이 많이 떨어졌어. Systolic 90이 안 되는데.”

최만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으으으…….”

“만철아! 괜찮냐? 아이고 만철아!”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런다냐…….”

“고모, 조금만 기다리면 구급차 와요. 괜찮을 거예요.”

정현미가 주인 할머니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환자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흉관(폐에 찬 공기를 배출시키기 위한 관) 삽입할 상황이 안되니까 일단 니들(주삿바늘) 최대한 두꺼운 걸로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정현미가 굵은 주삿바늘을 챙기는 동안 최만기는 환자의 흉부를 소독했고 한준식은 서둘러 라텍스 장갑을 꼈다.

“할머니, 지금 아드님 혈압이 많이 떨어져서 지금 바로 응급 처치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한준식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BP(혈압) 안 잡힌다! 이대로 가면 어레스트 날 수도 있겠어!”

최만기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소에 있는 니들은 18G가 최대예요.”

숫자가 낮을수록 바늘이 굵다는 뜻인데, 18G 정도면 이쑤시개보다 살짝 가는 굵기의 바늘이었다.

“우선 그거라도 주세요.”

한준식은 정현미가 건네준 18G 바늘을 쥐고 환자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비뼈 사이 공간에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토옥.

피유유유.

흉막이 뚫기는 느낌과 함께 주삿바늘을 통해 공기가 빠르게 배출되기 시작했다.

폐를 압박하고 있던 공기의 양이 상당히 많았는지 공기가 한참 동안 뿜어져 나왔다.

“으으으…….”

환자는 바늘 들어간 곳의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렸지만, 확실히 몇 분 전에 비하면 혈색이 나아 보였다.

딩동!

[system : 김만철 환자의 생존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치료 진척도 31 -> 67]

치료에 개입할 수는 없었지만, 환자가 급한 고비를 넘겼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후. 혈압이 조금 올랐어. 이제는 맥박도 잡히고.”

최만기 또한 한숨 돌렸다는 표정이었다.

“구급차가 많이 늦네……. 일단은 안정 상태긴 한데.”

한준식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최만기가 근무하던 지소는 면 소재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비슷한 시간대에 신고까지 겹쳐 구급차는 생각보다 더 늦어지고 있었다.

“현미야, 전화 좀 다시 해보그라.”

주인 할머니가 채근할 무렵 멀리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자 숨넘어갈 뻔했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정현미가 날카로운 말투로 구급 대원에게 말했다.

“흉강에 찬 공기를 일부 빼냈기에 망정이지 손 놓고 기다렸다가는 위험할 뻔했습니다.”

한준식도 한마디 보탰다.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출동이 많이 겹쳤습니다. 그리고 오는 길에 화물차 한 대가 논두렁에 굴러떨어져 있더라고요…….”

구급대원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운전자 구조하고 인계하고 오느라 좀 늦었네요. 여기가 이렇게 급한 줄 알았으면 먼저 오는 건데…….”

“혹시 음주 운전 차량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시현의 물음에 구급대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이 이렇게 됐구나.’

회귀 전에는 최만기의 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죽거나 크게 다친 반면, 이번에는 음주 운전자의 단독 사고로 마무리되었다.

“저…… 환자분 이송할 때 의사 한 분 동행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갈게요.”

구급대원의 요청에 최만기가 대답했다.

“너희 휴가인데 이런 일이 다 있네. 금방 다녀올게. 쉬고 있어.”

최만기는 시현과 한준식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하며 구급차에 올랐다.

‘제발 이번에는…….’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멀어져가는 구급차를 바라보며 시현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 *

관사로 돌아오자 최만기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와, 이 사진 봐봐. 진짜 까마득하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스물한 두 살쯤 돼 보이는 대학생 여럿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예과 마치고 겨울방학 때였지?”

“맞아. 본과 가기 전에 놀아야 한다고 같이 제주도 갔었잖아.”

“자전거 타고 섬 일주했었던 것 같은데. 우도였던가?”

사진 속 최만기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시현은 말없이 액자를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예과 때는 열심히 이곳저곳 많이도 돌아다녔다.

인생을 통틀어 성적 고민 없이 놀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었으니까.

본과 때는 시험에 재시에 치여 사느라 도서관에서 밤샘하기 일쑤였지만, 그것도 여럿이 다 같이 하는 고생이라 썩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6년을 같이 보냈던 만큼, 의대 동기들과는 추억이 참 많았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최만기가 허망하게 죽고 난 뒤로는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고, 그를 마지막으로 본 그날의 모습과 후회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었네.’

그의 책상 위에는 당뇨 환자 최신 진료 가이드라인과 논문 여러 편이 펼쳐져 있었다.

마이너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바이탈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어? 만기 USMLE(미국의사면허시험) 준비하나?”

한준식이 원서 한 권을 펼치며 말했다.

“벌써 Step 2(미국의사고시의 2차 시험으로 내과, 외과, 소아과, 정신과, 산부인과 등의 지식에 대해 평가) 공부하네?”

“응. 작년에 Step 1은 봤다고 하더라.”

“어디 우리 정신과 선생님, 학교 다닐 때 배운 거 안 까먹고 있는지 볼까?”

한준식이 문제집에 나온 심전도(심장의 전기적 활성을 보여주는 검사) 한 장을 보여주며 물었다.

“65세 남자. 호흡곤란과 흉통을 주소로 찾아온 환자의 심전도야.”

시현이 한준식이 보여준 문제를 유심히 살폈다.

“일단 ST 절 상승이니 심근경색이 의심되고…….”

“좋아. 그렇다면 바로 해야 할 처치는?”

‘국가고시 공부할 때 열심히 하긴 했었는데…….’

정신과에서 심장 문제로 응급 상황이 터지는 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

시현의 체감으로는 6년 만에 다시 보는 내용이었다.

“글쎄,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

‘의학 정보실’을 이용해서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실제 환자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한준식의 표정을 보니 뭔가 설명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고.

“후훗. 천하의 천시현도 모르는 게 있구나! 이 환자는 말이지…….”

띠띠띠띠 띠리링.

한준식이 뭔가 말하려는데 도어락 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관사로 들어왔다.

* * *

최만기는 정현미의 차를 타고 밤늦게 관사로 돌아왔다.

“환자는 잘 입원했어?”

“응. 바이탈 안정되는 거 보고 오느라 좀 늦었어. 흉관 삽입하고 좀 지켜보자고 하시더라.”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휴, 인계만 하고 오라니까. 피곤할 텐데 어서 쉬어.”

“괜찮아. 환자도 살아나고…… 피곤한데 안 피곤한 그런 기분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니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기분 자~알 알지!”

한준식이 그를 바라보며 씩 웃어 보였다.

“자, 이거 먹자.”

최만기가 치킨과 생맥주가 든 봉지를 내밀었다.

“이게 웬 거야?”

“주인 할머니가 주시더라. 너무 고맙다고…… 꼭 서울에서 온 ‘슨상님’들하고 같이 먹으래.”

“그래, 먹자… 어서…….”

뭉클.

그 모습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시현아, 너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왜 자꾸 울려고 해?”

“아냐. 아무것도.”

“이 시간에 시키지도 않은 치킨이 와서 감동먹은 거 같은데.”

“그래. 감동이다. 감동…….”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야식을 사들고 돌아온 기분.

시현은 얼른 말을 잇지 못했다.

혹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사고가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최만기는 무사히 돌아왔다.

사고 소식으로 충격에 휩싸였던 그 날의 장면들이 점점 지워져 갔다.

‘바뀌었어. 정말로…….’

밝게 웃는 최만기를 보니 새삼 실감이 난다.

딩동!

다음 순간 또다시 알림음이 들렸다.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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