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Chapter 33. 휴가 (5)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동료는 나의 형제다 - 동료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불가능 난이도, 30,000P)]
시현은 이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스승과 동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의사가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3만 포인트면…….’
단일 업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의 보상.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만기가 살아 돌아왔으면 됐지. 보상이 뭐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알림창을 닫으려는 찰나.
딩동!
[system : 추가 보상을 지급합니다.]
[이어쓰기 - 세상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난이도 측정 불가, 보상 설정 불가)]
[system : 보상 설정 불가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총 2개의 ‘랜덤 박스’가 지급됩니다. 열어 보시겠습니까? < Y/ N >]
얼마 전 자살 위험도가 높았던 환자를 치료했을 때 받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내용.
다만 이번엔 2개였다.
‘관련된 사람들이 여럿이라 그런가?’
시현은 알림창이 사라질세라 곧바로 Y를 눌렀다.
-----
[랜덤박스]
- 포인트, 능력치, 아이템 등 다양한 구성의 보상이 무작위로 제공됩니다.
-----
[보상내역 1]
포인트 + 50,000P
능력치 + 7P
[보상내역 2]
능력치 + 9P
아이템 + 흉부외과 스킬북
(가슴관 삽입술(thoracostomy))
-----
‘스킬…… 북?’
[SORA : 타과의 술기를 스킬화하여 바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아이템입니다.]
인벤토리에 들어온 흉부외과 스킬북을 터치하자 시현의 머릿속에 한준식이 김만철 환자의 갈비뼈 사이 공간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는 장면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단순히 동영상을 보는 것과는 다르게 환자에게 바늘의 삽입할 때 손끝의 감촉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런 느낌으로 하는 거구나.’
딩동!
[system : 신규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
[가슴관 삽입술(thoracostomy)]
- 흉벽에 구멍을 내어 공기나 체액을 빼낼 수 있는 기술입니다.
- 현재는 니들을 통한 가슴관 삽입술만 가능합니다.
-----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술기였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나중에는 수술도 가능해지는 거 아냐?’
스킬만 다수 확보할 수 있다면 정신과 외에 다른 과 영역으로 확장도 가능했다.
이제 남은 것은 능력치 분배였다.
두 랜덤 박스에서 나온 추가 능력치 합은 16P.
‘16P 모두 지력에.’
시현은 이번에도 지력을 선택했다.
[SORA : 지력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아무래도 그게 유리하지 않을까? 우리 과가 장시간 서서 수술하는 과도 아니고.’
10시간 넘는 대수술을 밥 먹듯이 하는 외과의들에게는 체력이나 감각을 올리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과의 경우 전 임상과를 통틀어 가장 정적인 편에 속했다.
[SORA : 능력치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system : 시스템 사용자 레지던트 천시현의 지력이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이 정도면 꽤 높은 편인 것 같은데.’
정확한 수치는 확인이 안 되지만, 뭔가 더 또렷해진 기분이 드는 찰나.
“야, 오랜만에 이렇게 셋이서 한잔하고 좋다! 졸업하고는 처음이지?”
한준식이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그래. 거의 3년 만이지. 내가 시골에 있는 동안 준식이는 진짜 의사가 된 것 같네. 오늘 아주 멋있던데!”
“진짜 의사는 무슨. 시골에 내려와서도 USMLE까지 준비하는 우리 최만기 선생님이 참의사지.”
한준식이 손사래를 쳤다.
“아, 책 봤구나? 혹시나 해서 준비하는 거야.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미국 갈 게 아니어도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거 복습하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미국 의학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용은 비슷하니까.”
“그럼 다행이고.”
“무조건 도움 될 거야. 아까 시현이 보니까 내과 문제 못 풀던데? 졸업하고 정신과만 2년 보느라 감이 많이 떨어진 듯?”
한준식이 이쪽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러게. 틈틈이 다른 과 공부도 해야…….”
시현이 멋쩍은 듯 대답하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준식아, 잠깐만. 아까 그 심전도 문제…… 리드 II, III, aVF의 ST 절 상승 소견이 있었어. 좌측 레시프로칼은 없고. 우심실 기능이 약해진 상태라 NS(노말 셀라인, 수액의 일종) 로딩해야 할 상황…… 맞지?”
“너 어떻게…….”
그 대답에 한준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고, 최만기도 놀랍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심전도 판독과 처치 모두 정답이었기 때문이었다.
“본과 3학년 때 ER 실습 돌면서 본 환자 심전도가 이랬어. 그때 응급의학과 선생님이 설명하시기를…….”
학생 때 경험한 케이스가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떠오르다니 뜻밖이었다.
“올. 역시 천시현! 기억력 진짜 좋은데!”
한준식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놀라기는 시현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SORA : 지력 상승으로 저장된 기억에 대한 인출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졌다는 말인데…….’
오래된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진다.
하지만 저장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서 적당한 단서만 주어지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능력치가 상승하면서 최소한의 단서만으로도 예전 기억을 금방 꺼내 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SORA : 사용자 특성과의 시너지가 기대됩니다.]
‘확실히 그렇겠어.’
회귀자에게 보다 자세한 과거의 기억만큼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오랜만에 불이나 좀 피워볼까?”
치킨을 다 먹어갈 때쯤 최만기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불을 피운다고?”
“관사에 화로가 있거든 장작 때면 꽤 따뜻해! 좀 추우려나?”
“아냐! 가자! 오늘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어?”
고즈넉한 시골 마당에서의 불멍이라니.
한준식이 어린아이처럼 신난 표정으로 앞장섰다.
뒷마당으로 나가자 드럼통을 가공해서 만든 대형화로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전전전대 공보의 선생님 계실 때부터 있던 거야.”
최만기가 화로에 우드필렛을 넣으며 말했다.
“그 선생님이 여기 마을 주민분들한테 엄청 잘하셨대. 그래서 저기 뒷집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신 거라고 하더라고.”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오늘처럼 멀리서 손님들이 오면 캠핑 분위기도 내고 고기도 구워 먹는다고 했다.
토치로 불을 붙이고 장작을 얹자 이내 불꽃이 피어올랐다.
한겨울이지만 훈훈함이 느껴질 정도. 세 사람은 접이식 의자에 자리를 잡고 그 불을 바라보았다.
“좋다. 좋아. 허허허.”
아까 화로에 넣어둔 고구마 익는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배도 부르고 등도 따시고.
무엇보다 환자를 구했다는 뿌듯함에 신이 났다.
럭셔리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니들 보니까 참 좋다.”
“인턴 시작하면 병원에서 날마다 볼 수 있어. 기대하라고. 좋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한준식이 최만기를 보며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인턴…… 힘들겠지?”
“인턴은 걱정마. 1년차가 더 힘드니까.”
“…….”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보람은 있겠지.”
“야,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 쌓여가고 며칠씩 잠 못 봐라…… 그냥 짜증만 난다고. 그게 겉보기만 멋지지, 잘못하면 나처럼 그릇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한준식이 혀를 찼으나 시현은 알고 있었다.
말만 저렇게 해도, 그가 자신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음을.
“힘들어도…… 한 번쯤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최만기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오늘, 너희가 오지 않았으면 환자 못 살렸을 거 아냐? 사람 운명이라는 게 참……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의사’가 되고 싶다.”
오늘 밤 죽을 운명을 피해간 최만기 본인이 하는 말이라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의사…….’
최만기의 말을 곱씹으며 시현은 회귀 전을 떠올렸다.
환자의 죽음을 숱하게 봐왔다.
심장과 뇌혈관의 문제로, 암과 같은 난치병으로, 더러는 불의의 사고로.
익숙한 일이니만큼 이내 잊어버리기도 잘했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있었으나, 누군가의 죽음 앞에 시현은 언제나 3인칭 관찰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죽다 살아난 친구와 모닥불 앞에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1인칭 시점의 죽음을.
그리고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의 의미까지도.
* * *
“곧 3년차 선생님 되네. 미리 잘 부탁해!”
“넌 잘할 거야. 분명히…….”
겪어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늘 성실했고 진중했던 그가 훌륭한 의사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그렇게 대답하며 시현은 먼 곳을 올려다보았다.
빛 한점 없는 어두운 산 너머로 깊고 푸른 밤하늘이 드리웠고,
먼지 하나 없이 투명한 대기에 별이 총총했다.
불현듯 지난 2년간의 기억이 밀려왔다.
예전의 삶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조언이 있었음에도 따를 수 없었던 이유.
나빠질 게 분명한 환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의사가 해야 할 일이란 정해져 있었다.
이전 회차의 ‘나’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저 그뿐이었다.
새로운 변수가 생기든, 예기치 못한 위협에 처하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갈 따름이었다.
다른 누군가의 ‘소소한 이야기’를 위해서.
생각이 거기에 돌연 익숙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시스템 사용자 ‘천시현’에 대한 이해도가 큰 폭으로 증가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인물 정보’ 열람이 가능했었는데, 정작 자신에 관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해도 상승…… 지금이라면?’
자신에 대한 시스템의 평가가 궁금해질 무렵.
“불이 약해지네. 장작 더 가지고 올게.”
“나도 화장실 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인물 정보.’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인물 정보’를 요청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이해도도 올랐는데…… 왜?’
[SORA : 주위에 ‘인물 정보’를 출력할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 정보는 어떻게 알 수 있어?’
[SORA : ‘인물 정보’는 담당 환자 및 이해도 조건을 충족하는 타인의 정보를 출력합니다. 사용자 정보 요청은 ‘별도의 명령어’가 존재합니다.]
이어진 SORA의 말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그 ‘별도의 명령어’라는 게…… 설마?’
[SORA : 네, 생각하시는 그게 맞을 겁니다.]
회귀물의 주인공처럼 살아보겠다고 결심만 했지, 막상 시도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말.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시현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상태……창.”
[SORA : 시스템 사용자 ‘천시현’의 정보를 출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