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Chapter 33. 휴가 (6)
“상태……창.”
[SORA : 시스템 사용자 ‘천시현’의 정보를 출력합니다.]
‘맙소사.’
이게 되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 문제도 있었지만, 애초에 시도해볼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들은 회귀와 동시에 펼치는 상태창을 시현은 2년 만에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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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시현 남/27 삼아대병원 정신과 레지던트 2년차]
칭호 : 회귀물의 주인공 / 시스템 사용자
주요 능력치 : 지력 59->75 덕력 51 체력 45 감각 50 행운 49
특기 : 연구 설계(Lv.6 -> 7), 약물치료(Lv.6 -> 7), 지지정신치료(Lv.5 -> 6)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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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 박스’에서 얻은 능력치 덕분에 지력이 70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능력치 총합도 250 이상으로 준수한 수준.
[system : 지력 관련 특기들의 숙련도가 1씩 상승하였습니다.]
거기에 특기 상승까지.
시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정도라면 남은 3, 4년차 생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최만기는 장작을 넉넉하게 챙겨왔고,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번에 우리 과 김근형 교수님이 쓴 논문이 NEJM에 실렸는데…….”
학술적인 내용.
“글쎄 성형외과 치프 선생님 있잖아? 그 병동간호사랑 바람이 났는데 결국 삼자대면을…….”
요즘 핫한 병원 내 스캔들.
“내과 남혜미 펠로우 하고 있잖아. 최근엔 또 어떤 만행을 저지른 줄 알아?”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말리그 윗년차에 관한 이야기.
“혜미 누나가 그랬다고? 그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어…….”
최만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생 때 모습에 속으면 절대 안 돼. 나중에 진짜 호되게 당한다.”
한준식이 말했다.
최만기가 겪은 건 의대생 남혜미까지였다.
학생 때야 서로 얼굴 붉힐 일도 별로 없고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있지만,
일단 레지던트가 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 보니 늘 예민한 상태.
내 일 네 일을 놓고 싸우느라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니까 1년차 때 하는 걸 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거야.”
시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진료실에서 면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준식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시지.”
“갑자기 왜 띄워주고 그래? 불안하게.”
한준식은 칭찬에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피식 웃어 보였다.
밤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대체로는 이미 회귀 전부터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과 쓸지가 제일 고민이네.”
“뭐, 그거라면 인턴 돌면서 천천히 생각해. 지금 결정해봤자 자꾸 바뀐다고.”
한준식이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대답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이제는 진로 정하는 것도 상의해서 해야지 싶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싶은 과 하면 됐지 누구하고 상의해?”
“그게…… 공보의 끝나기 전에 결혼할 수도 있거든. 일단 너희들만 알고 있어.”
“정말? 누군데?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뭐 하는 분인데?”
한준식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물었다.
“아니. 모르는 사람.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야.”
“어? 그럼 서울 한 번씩 왔던 거야? 연락 한번이 없더니만 이거…….”
“그렇게 됐어. 다음에 정식으로 소개해줄게. 하하하.”
안타깝게도 최만기의 약혼녀를 소개받는 일은 회귀 전에는 없었다.
‘왜 전에는 이야기를 안 했던 걸까? 결혼까지 생각한다는데.’
시현이 의아해하는 사이 최만기의 전화가 울렸다.
위이이잉.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지금? 친구들이랑 같이 있어. 그래, 내일 다시 통화하자.”
하지만 시현과 한준식을 의식했는지 서둘러 통화를 마치려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 저녁에 별일 없었던 거 맞지? 나가지 말라니까 왜 고집을 부려? 당분간은 밤에 외출 금지야! 특히 운전 절대 하지 말고. 약속해!
수화기 너머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은 왜? 나야 뭐 언제나 안전운전이지. 걱정하지 마.”
최만기를 걱정하는 통화 내용에 시현의 눈이 번뜩였다.
“어휴 남자친구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지극해. 아주 달달한데?”
한준식이 부럽다는 듯 말하는데, 듣고 있던 시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예전에 이런 통화는 확실히 없었어.’
원래대로라면 사고 후 대학병원 외상 센터로 이동 중일 때라 이런 통화가 있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오늘 저녁에 있을 일을 미리 경고라도 하듯 최만기에게 운전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걱정이 많은 것 같은데?”
“시골에서 밤에 나갈 일이 뭐 있겠어. 평소엔 전혀 안 그런데 오늘 유독 그러네.”
시현의 물음에 최만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 말 나온 김에 다음 달에 서울에서 또 보자고. 여자친구도 소개해 줄 겸.”
“좋지, 좋아!”
"여자친구가 너희 둘한테 급관심을 보이더라?"
“우리한테?”
최만기와 한준식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시현이 반문했다.
“응. 아까 돌아오는 길에 여자친구랑 통화했거든. 오늘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그랬더니 너희를 꼭 만나보고 싶대.”
“우리도 제수씨한테 관심이 아~주 많다고 전해드려. 시현아, 우리 오프 맞춰서 같이 보자!”
한준식은 최만기의 여자친구를 만날 생각에 조금 들떠 있는 듯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시현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한 편으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길래.’
과거의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그녀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듯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시현을 남은 술잔을 들이켰다.
“만기야, 연애는 또 언제 시작한 거야? 우리한테 말도 없이.”
한준식이 조금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본과 1학년 해부학 실습부터 본과 4학년 임상 실습까지 같이했었다.
“나도 자주 못 봐.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요즘 정신없이 바쁠 때거든.”
최만기의 말투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오, 아주 애틋해. 사진이라도 좀 보여줘. 얼른!”
최만기는 한준식의 성화에 못 이겨 프로필 사진 한 장을 폰에 띄웠다.
“우와. 연예인이네. 연예인이야…….”
한준식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백승미. 사진 속 그녀의 이름이었다.
최만기와는 동갑으로 사법연수원을 마친 뒤 올 초부터 서울에 있는 로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만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성격도 잘 맞고 양가 부모님들도 서로 마음에 들어하셔서 내년쯤 결혼을 생각한다고 했다.
“나중에 식 올리게 되면 너희 둘 중 한 명이 사회 봐 줘.”
“응? 난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사실 무대 울렁증이 있어서.”
한준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준식이가 의외로 소셜포비아(사회공포증)이긴 하지.”
“그럼 시현이가 해주면 되겠네.”
최만기가 시현을 보며 말했다.
시현은 그의 결혼식을 상상해 보았다.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가족, 친지, 지인들과 기념 사진도 찍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도 하는 그런 결혼식.
최만기와 백승미는 버진로드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도 평범한, 하지만 과거엔 결코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그럴까? 나야 영광이지.”
“시현아, 너 우냐? 아까부터 얘가 왜 이래?”
“난생처음 결혼식 사회도 맡고…… 뭔가 감격스러운가 보지. 이거 건배 분위기인가? 예비 새신랑을 위하여?”
한준식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위하여!”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웰컴 투 더 ㅎㅔ…… - 한 쌍의 부부가 백년가약을 맺는 경건한 결혼식에 사회자로 참석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헬? 헤븐? 이건 뭐…….’
그들의 결혼 생활이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최만기의 가족들이 영정사진을 붙들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시현에게는 충분했다.
* * *
이튿날 오후.
“어제 고마웠다. 조심히 올라가.”
“고맙긴. 오랜만에 얼굴 보고 좋았어.”
“조만간 서울에서 보자.”
최만기가 손을 흔들었고, 시현과 한준식은 서울행 버스에 올라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참 다이나믹 했다. 그치?”
“그러게. 우리 한 선생이 크게 한 건 했지. 수고 많았어.”
시현이 좌석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새삼 그와 같이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 보내러 왔다가 환자를 보게 될 줄이야. 시현아 넌 남은 휴가 기간에 뭐 할 거야?”
“글쎄, 만기는 봤으니까 지환이네 보건소에도 가볼까?”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집에는 안 가보게?”
한준식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시현은 한준식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병원 들어오고는 집에 가는 걸 거의 못 본 것 같아서.”
“실은…… 집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어.”
한참 동안 어색한 적막이 흐른 뒤, 마침내 시현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집이 없다니?”
한준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말 그대로야. 내 집이 없다는 거지.”
“네 집이 없는 건 당연한 거고. 부모님 집 말이야. 서울에 계시지 않아?”
“그게… 부모님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 됐어.”
시현의 대답에 한준식은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만기 결혼한다는 것도 그렇고 네 가족 이야기도 처음 듣고……. 전혀 모르고 있었네.”
그의 얼굴에 미안한 표정이 스쳤다.
학부 때부터 꽤 오랜 시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아냐. 내가 그동안 이야기를 안 한 건데 뭘.”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시현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어? 그럼 졸업식 때 오신 분들은 누구셨어? 그때 분명 부모님이라고…….”
“작은아버지 내외분이셨어.”
“아, 어쩐지 젊어 보이시더라.”
한준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대 6년 내내 시현은 자취를 했었다.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본가가 서울에 있어도 통학 시간을 줄이려고 학교 근처에 따로 방을 얻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시현 또한 그렇겠거니 생각했을 뿐.
시현의 자취방으로 자주 놀러 오는 친구들은 시험 기간이면 거의 얹혀살다시피 하면서도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가족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네.”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고등학생 때.”
시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때는 기숙사 생활 하면서 방학 때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잠깐씩 살기도 했는데…… 대학 오고 나선 잘 안 가게 되더라고. 한 번 찾아뵙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위이이잉.
시현이 말하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어휴, 양반은 못되시나 보다.”
[작은아버지]
시현은 휴대폰에 뜬 발신자 이름을 한준식에게 보여주며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