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50화 (150/195)

150화 Chapter 33. 휴가 (7)

“네, 작은아버지.”

- 그래. 잘 지내니? 병원 일은 할 만하고?

“그럼요. 곧 3년차 되는걸요. 마침 휴가예요.”

시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 휴가면 집에도 좀 오고 그래. 작은 엄마가 네 소식 궁금하대.

“네, 조만간 뵈러 갈게요. 작은어머니도 방학이라 집에 계시겠네요? 작년 겨울방학 때는…….”

‘격의 없는 사이인가 보네.’

한준식이 시현의 표정을 살폈다.

작은아버지와 오랜만에 통화하는 듯했지만 어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 참, 설날엔 시간 어떠니?

하지만 그의 다음 말에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휴가 끝나갈 즈음이라 병원에 미리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업무 파악도 해야 해서요.”

에둘러 말했지만 명백한 거절이었다.

- 시간 좀 내봐. 밥은 먹고 일해야지. 큰집 식구들 얼굴도 좀 보고.

“……네.”

시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 그래. 설날 저녁 6시에 큰아버지 집에서 보자.

“네. 그때 뵐게요.”

“가족 모임 있나 봐? 불편한 자리야?”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한준식이 말했다.

“뭐, 약간은?”

시현은 회귀 전의 가족 모임을 떠올렸다.

* * *

4년 전.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시현이 왔구나.”

누군가 반갑게 시현을 맞았다.

천태일. 시현의 백부로 한국대병원 외과 교수이자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어째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나?”

“아, 아닙니다.”

태연한 척하려 했으나 표정 관리가 될 리 없었다.

회귀 전 그날은 최만기의 발인이 있고 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 너 안 오면 형님이랑 형수님이 우리한테 잔소리하셔. 꼭 와야 해. 부탁이다.

작은아버지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레지던트 생활은 할 만하고?”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무조건 잘해야 해. 레지던트라는 건 말이야…….”

‘또 시작이시네.’

시현은 지겨운 표정을 간신히 감추며 천태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열심히 하고 또 잘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시현은 천태일의 일장 연설이 잠깐 끊긴 틈을 타 잽싸게 술을 따랐다. 더 듣다가는 귀에서 피가 날지도 모르니 일단 흐름을 끊어 놓아야 했다.

“모름지기 의사라면 말이다. 바이탈을 해야 해. 환자 잘 보는 거야 너무 당연한 거고 교수를 목표로 레지던트 때부터 연구도 열심히…….”

“…….”

하지만 단숨에 술잔을 들이킨 천태일은 금세 훈화 말씀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우리 교실에서 JAMA(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미국의사협회의 공식 학술지)에 논문을 냈다는 말이지…….”

“아, 네……. 축하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외과 계열 수련하는 거 생각해봐.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 대를 이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지.”

의사가 되고 나면 명절 잔소리는 없겠지 싶었는데, 어째 갈수록 더 디테일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여러 번 들어서 이제는 식상한 큰아버지의 레파토리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휴. 이제 끝났나?’

시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드는 순간, 큰아버지의 허를 찌르는 질문이 들어왔다.

“시현아, 그리고 말이다. 조금 이른 감이 없지는 않다만…… 선을 보면 어떻겠니?”

쿨럭쿨럭.

시현은 먹던 떡국이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형님, 무슨 선이에요? 이제 갓 취직한 애한테…….”

“그래도 레지던트 때 바쁘다고 그저 그런 연애 하다가 얼렁뚱땅 결혼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일찍부터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야지. 너 장가가서 좋은 가정 꾸리는 거 봐야지…… 아니면 나중에 동생 볼 면목이 없어.”

“아직 일도 바쁘고 여유가 없어서요. 다음에 하면 어떻겠습니까?”

시현이 완곡히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여유가 없기는! 정신과에 무슨 중환자가 있어? 응급 수술이 있기를 해? 잔말 말고 꼭 만나봐!”

하지만 제법 취기가 오른 탓인지 천태일은 평소보다 더 막무가내였다.

“저희 과도 그렇게 한가하진 않습니다. 물론 외과에 비할 바는 아니…….”

시현이 항변하려 했으나 천태일이 즉각 말을 잘랐다.

“긴말 안 하마. 큰아빠 소원인데 정말 안 만나 볼 거냐?”

“알겠습니다…….”

잔소리가 많다고는 해도 시현을 가장 많이 챙겼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잠깐 가서 얼굴만 보고 오는 정도일 텐데.

까짓것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끌려간 자리에서 만난 맞선녀는 기대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박봉에 집도 차도 없는 레지던트라고 얼마나 무시를 해 대던지.

의사면 다 부자인 줄 알았다나.

큰아버지 지인 소개만 아니었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상대였다.

* * *

“그때 참 민망했었는데.”

지력이 높아진 탓일까.

예전 기억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응? 뭐가?”

한준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다른 건 몰라도 그 자리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 * *

며칠 뒤 설날 당일.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연락도 자주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그래, 시현이 왔구나.”

천태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반갑게 시현을 맞았다.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보기로 했다.

잔소리할 틈을 주지 않는 쪽으로.

이럴 때는 아첨이 제일이었다.

‘CHEON TI 이름으로 가장 최근에 출간된 논문 검색해줘.’

[SORA : 의학 정보실에 접속합니다.]

[SORA : JAMA oncology 최신 호에 수록된 논문을 출력합니다.]

“큰아버지, 이번에 위암 수술 후 항암요법의 예후 예측 인자에 대한 논문 JAMA에서 봤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응? 뭘 그런 것까지 찾아봤어? 레지던트가 정신과 공부만도 바쁠 텐데. 허허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천태일은 조카의 칭찬에 입꼬리를 올렸다.

“식당에서 저희 병원 외과 선생님들 이야기하는 것 듣고 알게 됐습니다. 다음 판 교과서에 꼭 들어갈 내용이라고 하던데요? 이원태 교수가 너무 부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원태 교수라면 삼아대 출신의 위암 분야의 권위자로 천태일과는 라이벌 관계였다.

위암 명의 투표에서 매년 1, 2위를 다툴 정도였으니까.

“그래? 그 친구는 욕심만 많아서 탈이야. 아직은 증례 수도 그렇고 외과는 삼아대병원이 우리한테 안되지.”

그런 이원태가 배 아파한다는 말에 천태일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

그의 어깨가 한 뼘은 더 높아진 것 같았다.

딩동!

[system : 천태일의 사용자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그래, 레지던트 생활은 할 만하고?”

“네,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조광필 교수한테 들었어. 아주 유능한 레지던트라고 하더구나.”

‘조광필 교수님에게?’

원래라면 잘해야 한다고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아야 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두 분 원래 아는 사이셨던가요?”

“아, 조광필 선생 하고는 외상 학회 만들 때 인연이 좀 있지. 원래는 흉부외과 보드잖아? 이번에 통화할 일이 있어서 하는 김에 네 이야기도 슬쩍 물어봤지.”

두 사람이 지인인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 조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 평판도 좋고 연구도 열심히 하고 병원 생활 아주 훌륭하게 잘하고 있다던데.”

“교수님이 좋게 봐주신 모양입니다.”

“당연히 좋게 봐줘야지. 누구 조카인데. 자, 한잔 받아. 허허허.”

그를 오랫동안 봐왔지만, 이렇게 덕담만을 주고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큰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 먼저 간 동생이 네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조광필 교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하셨길래?’

원래라면 정신과 그만두고 외과로 돌리라는 말을 할 타이밍.

이런 식의 칭찬은 예상외였다.

“일을 잘하면 뭐하나. 몸이 고생인걸.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었다.

시현의 큰고모, 천미화였다.

“의사들은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수명도 짧다잖아? 몸 챙기면서 살살 좀 해. 뭐하러 그런 고생을 하는지…… 요즘 보니까 돈도 얼마 못 버는 것 같더구먼.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 말에 시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해주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거들먹거리는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네, 이제 3년차 됐으니까 건강도 챙길게요.”

시현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데, 천미화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배우자도 잘 만나야 해. 우리 영민이는 유학 중에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그 집이 회사를 크게 한다고 하더라고? 둘이 결혼까지 생각한다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자식 자랑.

공부에 뜻이 없어 억지로 유학 보낸 사촌 형이 거기서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였다.

“뭐 하는 회사인데요?”

큰고모의 말에 큰어머니가 관심을 보였다.

“GSS테크라고 언니도 들어보셨죠?”

“GSS테크… 거기 삼아전자와 거래하는 회사 아닌가?”

“맞아요! 새언니가 잘 알고 계시네! 건실한 회사 맞죠? 이번 분기만 해도 순이익이…….”

“글쎄요. 좀 더 알아봐야겠네요.”

큰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아꼈다.

“아무튼, 우리 영민이가 고등학교 때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머리는 정말 좋았잖아? 인물도 훤칠하고. 여자친구가 영민이한테 푹 빠져서…….”

큰고모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지만, 하나도 부럽지가 않았다.

‘어차피 거기하고는 잘 안될 건데.’

형이 바람피우다가 딱 걸려서 결국 헤어졌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시현아. 장가는 무조건 부잣집으로 가야 해. 공부한다고 그 고생 다 해놓고 결혼 잘못하면 와이프랑 장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고모 말 새겨들어.”

‘오, 이건 좀 설득력 있네.’

시현이 보기에 큰고모는 성격도 까칠하고 별로 잘하는 것도 없어 보였는데, 성실한 고모부 덕분에 지금껏 잘먹고 잘살고 있었으니까.

당사자의 말이니만큼 믿을만했다.

“네. 좋은 사람 만나야죠.”

“시현아, 말 나온 김에 말이다…….”

그 대답에 천태일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지인 딸을 만나보라고 강권할 차례.

“……선을 보면 어떻겠니?”

회귀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는 훨씬 좋았지만, 이 부분 만큼은 같았다.

‘이번엔 무조건 피한다!’

“아직은 생각 없습니다.”

시현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바쁘기도 하고 환자 보는 게 더 재밌어서요. 최근에 시작한 연구도 바쁘고요.”

평소 천태일이 가장 강조해왔던 것들을 핑계로.

“그래. 다 중요한 것들이지. 하지만 큰아빠는 말이다. 네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

‘응? 이게 무슨…….’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조광필 교수한테 네가 잘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랑스럽고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어린 나이에 부모 여의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고. 그동안…… 정말 애썼다.”

그리고는 술 한잔을 권했다.

노파심에 매번 잔소리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울컥.

꼰대 같다고만 여겼던 큰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어떠냐? 한번 만나볼 생각 있니? 신붓감으로는 손색이 없을 것 같다만.”

“그건…….”

손색이 있어요. 인성에 손색이…….

그의 진심을 알았지만, 싫은 마음은 여전했다.

“왜? 혹시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자 천태일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물었다.

“네? 그게… 있습니다. 실은 만난 지도 좀 됐고요.”

맞선녀를 다시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일단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네가 적은 나이도 아니고…… 결혼까지 염두에 둔 ‘진지한 관계’인 거겠지?”

“물, 물론이죠! 그러니까 선은 따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SORA : 며칠 사이에 연기력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네요.]

‘후후. 이 정도면 더는 말씀 안 하시겠지.’

SORA의 말에 의기양양한 것도 잠시.

“그랬구나, 그랬어……. 실은 짐작하고 있었단다.”

‘응? 이게 무슨…….’

[SORA : …….]

“네? 큰아버님 방금 뭐라고?”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를 큰아버지가 어떻게?

시현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내 따로 들은 게 있지. 역시 내 조카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시현을 향해 천태일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짐작은 했다만, 요 녀석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언제 또 그런 훌륭한 신붓감을 만나고 있었던 게냐? 허허허.”

“시현아, 축하한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도 진작 말해줬어야지. 하하하.”

작은아버지까지 가세했다.

‘그… 그게 누군데요?’

모두가 ‘여자친구’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시현 본인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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