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Chapter 33. 휴가 (8)
“아주 참한 아이지. 둘째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아아, 작은 형님…….”
두 형제는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아니, 그게 누구냐고요?’
답답한 마음에 직접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 좋은 사람 멀리서 찾을 필요 없지. 역시 우리 시현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레지던트 생활이 그렇게 힘들다던데 서로 의지도 되고 좋겠네. 이거 메디컬 드라마를 찍고 있었구나? 하하하.”
‘서로 의지에 메디컬 드라마…… 혹시?’
시현이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현의 ‘여자친구’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듯했다.
“채종우 교수한테 얼핏 듣기는 했다만. 그렇게 ‘진지한 관계’일 줄은 몰랐구나.”
“이미 인사도 드리고 밥도 몇 번 같이 먹었다면서?”
맙소사.
그게 그렇게 되나?
시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천태일과 채종우.
대학 선후배에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안면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친한 사이일 줄은 몰랐다.
‘채종우 교수님? 아… 안 돼…….’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이거 채 교수랑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야겠는걸? 다음 주에 골프 약속이 있는데 그때 좀 더 이야기해봐야겠구나.”
두 사람은 시현과 채이진의 관계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망했다.’
병원에서 채이진을 볼 생각을 하니 등에 식은땀 한줄기가 내려갔다.
“뭐? 진지한 관계? 뭐 하는 사람인데?”
시현만 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천미화가 다시 끼어들었다.
“같은 병원 의사야. 내과 레지던트.”
천태일이 채이진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에이, 부부 의사면 좀 그렇지 않아요? 너무 바빠서 내조도 못 하고. 둘 중 하나라도 집안에 신경을 써야지! 아직 시간 있으니까 우리 영민이처럼 사업하는 집안 쪽으로 천천히 찾아보는 게…….”
“사업이라……. 시현이 여자친구는 ‘삼아가’ 사람이라면 어떨까?”
천태일이 여동생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삼아가요? 에이, 무슨 농담도…….”
천미화는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기려 했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진, 진짜로? 시현아, 정말이냐?”
“…….”
모르겠다.
여자친구의 존재도 처음 알았는데, 이제는 재벌가 사람이라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저는 연애와는 거리가 먼 모태솔로이며 채이진과는 협진 의뢰 주고받은 것밖에 인연이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려는데,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너무 성급한 거 아니니?”
시현의 큰어머니, 이정숙이 입을 열었다.
“만난 기간이 중요한가? 서로 마음만 맞으면 됐지. 그리고 그 친구 내가 학생 때부터 봐서 잘 아는데…….”
“당신도 참! 집안에 어른이라는 분이 어쩜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니, 나는 그게 저…….”
“인륜지대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신중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천태일 또한 자기주장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지만 아내의 말에는 꼼짝 못 했다.
‘큰어머니, 감사합니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제동을 걸어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회장님이 특별히 아끼는 손녀라는 말이 있어요. 나중에 시현이가 마음고생 할 수도 있잖아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그녀의 다음 말에 시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척도 아니고 손녀? 진짜로?’
“평범한 집안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지.”
“두 사람 부담스럽지 않게 채 교수님께도 내색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아가씨, 혹시라도 어디 가서 이런 얘기 절대로 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이정숙이 은태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알았어요. 언니.”
“그리고 시현아. 네 판단을 존중하지만, 중요한 일이니 조금 더 신중했으면 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시현이 이정숙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삼아 쪽 사람이면 그녀에게는 나쁠 게 없을 텐데. 도리어 시현이 곤란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인물 정보’
[SORA : 이정숙의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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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여/53 삼아전자 상무이사]
칭호 : 유리천장의 파괴자
주요 능력치 : 지력 65 덕력 55 체력 63 감각 59 행운 62
특기 : 프레젠테이션(Lv.9), 인재발굴(Lv.8), 골프(L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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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의 큰어머니 이정숙.
그녀는 굴지의 대기업 삼아전자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능력치 합이 300 이상…….’
일이면 일 가사면 가사 운동이면 운동,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커리어 우먼.
능력치는 지금껏 봐온 누구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았다.
“그래도 언제 시간 되면 집에 한 번 데리고 오렴.”
“…….”
“왜? 무슨 문제라도?”
시원시원한 성격에 추진력 있는 인물인 만큼 거침이 없었다.
“네? 그래도 아직은…….”
“결혼까지 생각한다면서?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볼 수는 없잖니.”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시현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곤란했던 일들은 모조리 피해온 시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네. 상의해보겠습니다.”
‘왠지 토를 달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실질적인 엄마 역할을 해왔던 그녀였다.
이정숙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조금 이른 감이 없진 않다만, 그래도 네가 좋은 사람과 만나고 있다니 기쁘구나.”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큰아빠가 오늘 기분이 아주 좋다. 시현아, 한잔 받거라.”
천태일 또한 아까부터 싱글벙글 이었다.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훈훈한 가족 모임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 것만 빼면.
‘이진이한테 뭐라고 이야기하지?’
시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천태일이 건넨 술잔들 쭉 들이켰다.
“아주버님이 저렇게 좋아하시는 거 오랜만에 보네?”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시현을 콕 찌르며 속삭였다.
시현의 작은어머니, 김수진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연락 좀 하고 지내지 그랬어?”
“아, 죄송합니다. 병원에만 있느라…….”
“알지, 알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벌써 3년차가 되네?”
여장부 스타일의 이정숙과는 정반대로 상냥하고 밝은 성격의 그녀는 시조카인 시현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곤 했었다.
“네, 세종이랑 세령이도 잘 지내죠?”
지금은 고3이려나. 문득 이란성 쌍둥이 사촌 동생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걔들은 공부한다고 정신없지. 가족 모임도 안 온다고 하고.”
“그럴 때죠. 열심히 하니까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세종이는 시현이 너 따라서 삼아대 간다고 벼르고 있던데.”
“뭐어? 삼아대? 큰아빠가 있는 한국대 의대로 와서 외과를 해야지 무슨 소리야?”
천태일이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발끈했다.
“하하.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누가 뭐래도 국내 최고는 한국대니까요.”
“요즘은 삼아대병원이 더 낫다고도 하던데요? 그룹에서 적극적으로 투자도 한다고 하고. 아이들 원하는 대로 쓰라고 해요.”
이번에는 이정숙이 끼어들었다.
“어허!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안 되는 게 있어! 역사와 전통으로 보면…….”
천태일과 이정숙 사이에서는 리액션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시현아, 자녀가 고3이면 부모도 고3이라는 말도 있잖아? 혹시 수험생 부모들도 상담받으러 종종 오니?”
김수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흔한 편이죠. 부모님들도 한창 신경 쓰실 때니까요. 학생 본인보다 부모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 분도 있었어요. 작은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작은어머니야 워낙 밝은 성격이었고, 사촌 동생들도 속썩일 녀석들은 아닌데.
시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내 이야기는 아니고. 친구 이야기인데……. 아이 진로 문제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 우울증 아닌가 걱정도 되고. 한번 가보라고 할까?”
“얼마나 심한지는 모르겠지만, 진료 보는 거야 나쁠 건 없죠.”
“그렇겠지? 친구가 병원 찾아보다가 어디서 너희 병원 정신과가 좋다고 들었대.”
“저희 교수님들 전부 실력 있는 분들이세요. 어떤 분야 진료를 원하시는지…….”
“아니, 거기 의사 중에 천시현 ‘교수님’이 잘 본다고 들었다는데? 조카라고 자랑했는데, 내가 다 뿌듯하더라니까? 입소문이 그렇게 날 정도면 환자 정말 열심히 봤나 봐?”
“네? 그게 무슨…….”
작은어머니 주변에 우울증이 의심되는 지인 한둘이 있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김영화 환자 때문인가?’
전에 TMS 치료로 호전된 임산부 환자가 아직도 홍보 글을 쓰고 있나 생각했지만, 사실은 최근 삼아대병원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다른 환자들이 추천 글을 꾸준히 올리는 중이었다.
좋은 평판이 더 많은 환자를 병원에 오도록 만들었고, 거기서 효과를 본 환자들이 더 많은 후기를 남기는, 그야말로 선순환이었던 것.
그 커뮤니티에서 시현은 어느 대학병원 교수 못지않게 훌륭한 의사로 호평이 자자했다.
“허허. 우리 시현이가 벌써 교수가 됐네?”
작은아버지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이거 시현이 진료 보려면 몇 달 기다려야 되는 거 아냐?”
“몇 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음 달 예약은 다 찼을 거예요.”
아직 일주일에 외래 진료가 두 타임뿐인 데다 신환 수에도 제한이 있어서, 얼마 전부터는 환자 대기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레지던트 진료가? 오, 대단한데!”
그저 장난삼아 물어봤는데, 시현의 대답에 작은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증상이 심하면 빠른 진료 보실 수 있는 곳으로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집 근처에도 분명 좋은 병원이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의료 접근성은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시에 살고 있다면, 특정 의사 진료를 고집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경우 당일 전문의 진료가 가능했으니까.
“아냐. 그 친구가 우울증 말고 다른 것도 너하고 상담하고 싶은 것 같아.”
“다른 거요?”
“그 집 애가 언젠가부터 공부를 놔버린 것 같대. 사춘기가 뒤늦게 온 건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교 10등 안에 들던 애였거든? 요즘 ‘멘탈 관리’가 안되는 것 같다던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정신과적 증상이 있으면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단순한 학업 문제라면 의사보다 교사와 상의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상담을 한다니. 확실히 예전에 비해 정신과 문턱이 낮아진 게 실감이 났다.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가 보지.”
“알겠습니다. 진료협력센터 통해서 예약 잡으시면 될 거예요. 지인이라고 진료 당겨주는 걸 못하게 해서요…….”
“응. 좀 늦더라도 괜찮아.”
가족 모임에서 칭찬을 다 듣고 환자 소개까지 받을 줄이야.
올해 명절 분위기는 여느 해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