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Chapter 34. 터닝포인트 (1)
다음 날 저녁.
‘좋은 휴가였다.’
공식적인 휴가가 끝났다.
한준식과 같이 휴가를 떠난 선택은 탁월했다.
덕분에 최만기를 구할 수 있었고 보상도 얻었다.
딩동!
[system : 퀘스트 ‘휴가는 휴가답게’의 성공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system : 성공 보상을 지급합니다. (체력 +10)]
화아악.
체력이 오른 탓인지 온몸에 활기가 넘치는 기분이었다.
‘피로감이 덜한 것 같기는 한데, 체력이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SORA : 체력은 근력 및 내구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근력은 힘이 세진다는 거고 내구도는?’
[SORA : 외상으로부터 받는 충격이 감소합니다. 그 밖에 운동 수행능력과 지구력도 향상됩니다.]
시현은 곧바로 상태창을 펼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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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시현 남/27 삼아대병원 정신과 레지던트 2년차]
칭호 : 회귀물의 주인공 / 시스템 사용자
주요 능력치 : 지력 75 덕력 51 체력 45->55 감각 50 행운 49
특기 : 연구 설계(Lv. 7), 약물치료(Lv. 7), 지지정신치료(Lv. 6)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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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합이 높긴 하지만…….’
지력에 치우친 능력치 구성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동안 각종 포션의 도움으로 피로를 모르고 지냈을 뿐 애초에 튼튼한 편은 아니었다.
하루 대부분 시간을 앉아서 생활하다 보니 회귀 전의 이 무렵부터는 목과 허리가 아파 고생도 했다.
이번에는 틈틈이 운동도 했고 체력도 올렸으니 앞으로는 통증에 시달리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8 : 00 PM
환자 인계를 받기로 황진호와 약속한 시각.
시현은 의국 문을 두드렸다.
“시현아! 왔어?”
“선생님! 다녀오셨어요?”
‘무슨 일 있나?’
의국에 들어서자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김원기와 황진호가 시현을 반겼다.
똑똑똑.
“아, 선생님…….”
잠시 후 노민혜도 의국으로 들어왔다.
당직이 아닌데도 당직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퇴근하지 않고 병원에서 잘 생각인 듯했다.
“병동 환자들은 어때?”
“인계할 건 따로 없어. 대체로 스테이블했고…… 네가 치료 계획 짜둔 대로 하니까 다들 좋아지시더라고.”
시현의 담당 환자들을 맡았던 황진호가 대답했다.
다행히 휴가 동안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방학이라 한가할 줄 알았는데, 요즘 환자가 너무 많다.”
황진호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시현아, 돌아와 줘서 고마워. 사… 사랑한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반주라도 한 것일까. 시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날 병원 밖으로 꺼내줄 수 있는 건 너뿐이라는 걸 깨달았어. 드디어 내일부터 집에 가서 잘 수 있다. 와하하.”
[system : 레지던트 황진호의 사용자에 대한 신뢰가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저희도요. 선생님 오셔서 너무 좋아요.”
“지난주에는 하루 내내 TMS만 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1년차들도 비슷한 반응.
열열한 환대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많이 힘들긴 했나 보네.’
늘 하던 일이라 뭐가 그리 힘들까 싶지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시현의 공백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거기에 4년차 두 사람은 졸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들 일을 나눠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래에 협진에 그리고 논문작업 그리고 학회 심사 준비까지.
거기에 올해는 실습 학생들 교육자료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집보다 병원에서 잔 날이 더 많았을 정도.
“시현이는 쉬다 와서 그런지 생기가 도네. 뭔가 몸도 더 좋아지고…… 건강해진 느낌?”
황진호가 시현의 얼굴을 찬찬히 보며 말했다.
“시골 공기가 좋더라고. 다들 수고했어. 이제 휴가도 끝났고 올해도 힘내자.”
그렇게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신나게 놀지는 못했어도 소중한 친구를 살렸으니…… 오래 가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던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위이이잉.
[02-20xx-11xx]
늦은 시간 병원 번호로 온 전화.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천시현 선생? 통화 괜찮은가? 내과 이종관이네.
“네, 교수님.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 아 어머니께서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신데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고…… 섬망 증상도 있으신 것 같아. 잠깐 와서 봐줄 수 있겠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당직 아닐 텐데 미안하네.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서.
일과 전 공식적인 당직은 1년차 몫이었지만, 뭔가 못 미덥다고 여겼는지 직접 전화한 것 같았다.
“타과 환자인가요? 그럼 저희가…….”
“아냐. 교수님이 직접 전화주신 거라 내가 가서 봐야 할 것 같다.”
이종관이 따로 부탁한 만큼 1년차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 * *
8 : 30 PM
시현은 곧바로 11병동을 향했다.
모든 병실이 1인실로 구성된 특실 병동.
1105 병실에 들어서자, 백발의 노인이 누워있는 침상 곁으로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종관아. 어서 출근해야지 꼭두새벽에 여긴 왜 왔어?”
“어머니, 지금 밤이에요. 여긴 병원이고요.”
이종관 교수가 노모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아니, 그런데 우리 집에 손님이 오셨다니? 아가씨는 뉘시우?”
그러나 노모는 이종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안녕하세요? 장영숙 님, 저는 입원 담당의 채이진이라고 합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인사.
그럼에도 노모는 채이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일주일 전, 환자는 정형외과에서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 감염 내과로 전과 되었다.
“할머니, 여기 선생님들이 잘 봐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예진이 노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같은 설명을 반복하기는 이예진도 마찬가지였다.
“나 아무렇지도 않다. 집으로 가자.”
“아무렇지도 않긴요!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회복도 못 하셨는데. 좀 더 있다가 가세요.”
“엄마, 여기 종관 오빠 병원이야. 조금만 더 있자. 응?”
환자의 아들과 딸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환자에게 말했다.
“수술? 내가 무슨 수술을 했다고?”
자녀들의 만류에도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천 선생 왔나? 잠깐 스테이션에서 보지.”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채이진과 함께 병실을 빠져나왔다.
* * *
“보다시피 아직도 지남력이 온전치 않으셔.”
이종관이 화면에 뜬 노모의 차트를 보며 말했다.
“기록상으로는 POD 4일(수술 후 4일) 째부터 증상이 더 심해지신 것 같습니다.”
“맞아. 그때부터야. 오히려 일반 병실로 오고 나서 의식이 혼탁하셔.”
통화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환자 파악을 마치고 병동에 도착했다.
그는 신뢰 가득한 시선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딱히 나빠진 건 없는데…… 왜일까?”
‘세상의 모든 차트’를 통해 환자 파악은 이미 마쳤지만,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엄 교수는 뭐라던가?”
이종관이 이번에는 채이진에게 물었다.
“최근 발열은 흡인성 폐렴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고, 경험적 항생제 치료에 반응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채이진은 모니터에 혈액검사 결과를 띄운 뒤 환자 상태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일단 열이 떨어지고 바이탈도 안정적이라 혈액과 소변 배양검사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결과 나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담당 교수가 괜찮다고 했다지만, 이종관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위이이잉.
다음 순간, 휴대폰이 울리고.
- 교수님, 61세 남자 환자 MI(심근경색)로 응급실에 방문하였습니다. 관상동맥 기형이 있어 와이어 진입이 어려운…….
당직 펠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텐트 시술 중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이종관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목숨이 꺼져가는 환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가족이 입원해있다고 병실에만 머물러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어머님 잘 부탁하네.”
“네, 교수님!”
이종관이 복도 저쪽으로 멀어질 때쯤 누군가 스테이션 쪽으로 다가왔다.
“시현아! 여긴 웬일이야?”
“협진 보느라고 들렀어. 넌?”
“나? 나는… 문병 왔달까?”
시현의 동기, 내과 레지던트 서혁상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문병이라면…….’
분명 이예진을 보러 온 것일 터였다.
“보호자 면담하러 온 건 아니고?”
시현이 그를 놀리듯 웃으며 물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예진과 잘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아니… 이진이도 있었네? 할머니 잘 부탁해!”
서혁상이 스리슬쩍 말을 돌렸다.
“당연하지. 누구 부탁인데. 특별히 더 열심히 보고 있어.”
채이진이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잠깐만… 이진이라고?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서혁상은 낯가림이 심한 터라 병원 생활 내내 서로 존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그럼 나 병실 들렀다 갈게! 시현아, 잘 부탁해!”
매일 보는 동기보다 훨씬 더 보고 싶은 사람이 안에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서혁상은 병실로 쏙 들어가 버렸고,
스테이션에는 시현과 채이진이 단둘이 남았다.
명절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만에 하나 잘못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하면…… 그다음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채이진이 물었다.
“아,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았다.
집안 어른들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덜 이상할지 고민할 뿐이었다.
“참, 그나저나 장영숙 님은 협진 낸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오신 거예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은 이내 환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과장님이 따로 연락 주셨어요. 어머님이 섬망이 심하셔서 걱정하시더라고요.”
섬망(Delirium).
의식이 흐릿해지며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인식이 감퇴 되는 상태.
입원 중인 환자, 특히 노인에게서 흔히 발생하는데, 가벼운 폐렴에도 가족조차 못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거기에 수면장애와 행동문제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아 정신과에서 협진하기도 한다.
“내과적으로 섬망의 원인이 될 만한 게……. 짚이는 데라도 있나요?”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채이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며칠 전부터는 열도 없고 CRP(감염이나 염증성 질환에서 상승하는 수치)도 정상 범위로 들어왔어요. 수술 후 섬망이야 워낙 흔하고 일시적인 거니까…… 곧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채이진이 환자의 혈액검사 결과를 쭉 살피며 말했다. 일단은 환자의 경과를 낙관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반면 시현은 말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돌연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확실히 이 무렵이었어.’
[(부고) 순환기내과 과장 이종관 교수 모친상]
[빈소 - 본원 장례식장 1 분향소. 발인…… ]
병원 원내 망을 통해 받은 회람.
정신과 의국 이름으로 근조 화환을 보낸 것도 똑똑히 기억났다.
‘이대로는 안 돼.’
섬망의 원인을 모른 채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환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잠깐 환자 보고 올게요.”
“네.”
객관적인 검사 결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정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시현은 환자 상태를 직접 살피기 위해 병실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