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Chapter 34. 터닝포인트 (2)
“시현쌤, 와줘서 고마워요.”
헬스장에서 자주 본 터라 낯익은 얼굴.
이예진이 보호자 침상에서 일어나 시현을 맞았다.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
“방금까지 횡설수설하시다가 금방 잠드셨어요.”
이예진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환자를 바라보았다.
“수술 직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마침 서혁상이 중환자실 담당이라 수시로 환자를 봤었는데, 당시에는 오히려 지금보다 상태가 더 좋았다고 했다.
시현의 시선이 환자 머리맡에 떠오른 정보창을 향했다.
[장영숙 여/79 R2 채이진 / Prof. 엄호태]
[치료진척도 17/100 생존 확률 21%]
역시나.
환자가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채이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생존 확률은 높지 않았다.
- 섬망의 원인질환이 치료되지 않는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특히 악성종양이나 중증의 의학적 질환이 있는 경우 입원환자의 약 40%가 1년 이내에 사망한다.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했던 교과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CBC도 괜찮고 전해질도 정상…….’
고령에 암수술까지 받은 환자라 더 위험했지만, 의무 기록에도 ‘세상의 모든 차트’에도 이상 소견은 없었다.
“무슨 과에서 오셨나요?”
혹여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생각하는데, 환자 곁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이 시현에게 물었다.
“정신과 레지던트입니다. 환자분께서 의식이 온전치 않다고 하셔서 잠시 뵈러 왔습니다.”
“정신과요? 잘 부탁합니다! 제가 종관이 형입니다. 이쪽은 여동생이고요.”
“아, 가족분들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뜻밖에도 보호자들은 시현을 반기는 기색이었다.
“어머니가 자꾸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데 왜 그런 걸까요?”
“이거 괜찮아지실 수는 있는 건가요?”
그리고는 시현이 환자 상태를 살피기도 전에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우선 진찰을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검사가 더 있으면 담당 선생님과 상의해서 진행을…….”
아직 검사 결과가 덜 나온 상황.
섬망이 가장 의심되긴 했지만, 일단은 대답을 잠시 미뤘다.
“제가 요 며칠 문병 와서 봤는데 헛소리를 많이 하시고… 어제는 저도 못 알아봤다니까요?”
“혹시 치매는 아닐까요? 이 상태가 계속될 수도 있나요?”
하지만 보호자들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여전히 질문 공세를 펼쳤다.
‘걱정이 많은 분들인가?’
이미 환자 기록은 충분히 보고 온 터라 간단한 설명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추가 검사를 더 해봐야겠지만, 당장 치매를 의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아, 그래요?”
“네. 증상이 갑자기 시작됐고 하루 중에도 변화가 심한 편이라 치매보다 섬망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 네……. 섬망이면 일시적으로 그렇다가 다시 회복하나요? 아니면 치매로 진행될 수도 있나요?”
“그 부분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섬망 증상이 사라지면 재평가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치매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 되려 실망한 눈치였다.
“예진아, 우리 갈게. 네가 고생이 많다.”
“이따가 고모가 죽 쒀온 거 꼭 챙겨드리고.”
“네, 조심히 가세요.”
두 사람은 시현에게 몇 가지를 더 묻고는 이내 병실을 떠났다.
“큰아빠하고 고모 좀 유별나죠?”
“네? 아, 할머니 걱정되셔서 그러신 거겠죠.”
특이한 구석이 있었지만, 가족 앞이라 뭐라 말하기가 꺼려졌다.
“두 분 다 할머니 건강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자꾸 물어보는 건 아마 재산 때문일 거예요. 젊어서부터 그러시더니 지금까지 할머니가 속을 썩이네요.”
‘혹시 상속 문제가 있나?’
보호자들이 환자의 진단명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지만, 치매가 의심될 때는 특히 표현에 주의해야 했다.
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더더욱.
치매가 의심된다며 환자가 생전에 했던 유언이 효력이 없다며 소송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
“휴. 저희 할머니, 젊어서부터 고생 많이 하신 분이에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삼남매를 홀로 키우셨거든요.”
“그러셨군요. 일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시현의 시선이 힘없이 누워있는 환자를 향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변형이…….’
환자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거친 손이 지난 세월을 대변하고 있었다.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식당을 크게 하셨어요. 큰아빠 사업 실패에…… 막내 고모부 도박 빚 갚는다고 들어간 돈도 다 감당하실 정도로요. 마음고생 많이 하셨죠.”
“그동안 정신과 치료받은 적은 없으셨나요?”
“전부터 잠을 잘 못 주무시고 가슴이 답답하다고는 하셨는데…….”
“그래도 교수님께서 잘 챙기지 않으셨을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아빠도 그렇게 세심한 아들은 아닌 것 같아요. 병원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순환기내과 의사로서, 환자 파악을 꼼꼼하게 하기로 정평이 난 이종관이라면 어머니의 증상을 간과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예진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 바빠서 그러셨을 겁니다. 겉으로는 그럴 게 보일지 몰라도 교수님께서 따로 전화를 주셨어요. 어머니 잘 부탁한다고…… 걱정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뭐 그래도 큰아빠하고 고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효자긴 하시죠.”
상대적 효자라니. 처음 듣는 개념이었다.
“아무튼, 할머니가 재산이 좀 있으신데…… 최근에 여기저기 아프시고 큰 수술도 앞두고 계셔서 신변 정리를 한다고 하셨대요.”
입원 전, 노모는 자녀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고, 지금 사는 집과 남은 재산 대부분을 이종관에게 물려주겠노라고 했다.
다른 자녀들에게는 물려줘 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 뻔했고, 그나마 그에게 맡기면 그래도 형과 여동생들을 챙기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남은 두 자녀는 당연히 반발했다.
공평하게 삼등분 하지 않고 한 명에게 다 주는 건 옳지 않다고.
하지만 그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두 사람 몫의 유산은 이미 예전에 증여한 셈이니, 남은 것만이라도 그동안 자신을 부양해온 둘째에게 주고 싶다고 못을 박았다.
“그래서 두 분은 환자분께서 치매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마도요? 의사 결정이 어려운 상태라고 해야 유언이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유산을 더 받기 위해 자식이 부모의 치매 진단을 바라는 웃픈 현실.
‘그건 아니지…….’
남의 집 사정이었지만 괘씸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환자를 살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는 기분이었다.
‘의학 정보실.’
[SORA : ‘의학 정보실’에 접속합니다.]
시현의 호출에 눈앞에 각종 교과서와 문헌들이 펼쳐졌다.
‘섬망 유발할 수 있는 원인 중에 아직 확인 안 된 것들 확인해줘.’
[SORA : 두부 외상과 각종 약물 남용에 대한 병력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두부 외상과 약물…….’
“혹시 할머님 최근에 머리를 다치셨다거나 쓰러진 적이 있으세요?”
“전혀요. 할머니랑 자주 통화하는데, 그런 말씀은 없으셨어요.”
이예진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최근에 새로 처방받은 약은요?”
“아마 없을 거예요. 웬만한 약은 삼아대병원에서 타다 드시는데…… 최근에 바뀐 건 없는 걸로 알아요.”
시현 또한 환자의 타과 기록을 살펴봤지만, 이예진의 말대로였다.
“그렇군요…….”
‘외상도 약물도 아닌 건가?’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한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약 드시는 건 없을까요?”
“영양제 정도 챙겨 드시는 것 같긴 한데……. 자세한 건 할머니 돌봐주시는 이모님이 와야 알 것 같아요.”
손녀치고는 환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지만, 따로 살다 보니 그녀 또한 모르는 것이 많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현이 고개를 돌려 병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어? 마침 오셨네요.”
상아색 가디건 차림의 중년 여성이 병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왔다.
“이모, 할머니 방금 잠드셨어요.”
“예진 씨, 고생 많았어. 늦지 않게 어서 출근해요. 할머니는 내가 잘 돌보고 있을게.”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집에서 살다시피 하고 계세요.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실 거예요.”
이예진은 마침 잘 됐다는 표정으로 시현에게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정신과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혹시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아, 정신과 선생님이시구나. 뭐든 말씀하세요.”
“혹시 장영숙 님께서 최근에 다치신 적이 있을까요? 특히 머리 쪽으로요.”
“아마 아닐 거예요. 수술하시기 며칠 전부터 어머님이 불안해하셔서 같은 방에서 잤었거든요. 다치셨으면 제가 모를 리 없어요.”
일단은 이예진과 같은 대답이었다.
“평소에 환자분은 침대에서 주무시나요? 침실 환경은 어떤가요?”
노인은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는 것만으로도 크게 다칠 수 있다.
심지어 기침하다 갈비뼈에 금이 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을 정도니까.
“원래는 침대에서 주무셨는데, 요즘은 바닥에서 주무세요. 침실은 암막 커튼도 있고 아늑한 편이에요.”
낙상이 걱정되어 욕실 바닥도 늘 건조하게 관리하고 부딪힐 만한 물건들도 모두 치웠다고 했다.
“혹시 환자분께서 처방 없이 따로 드시는 약은 없을까요? 일반의약품이나 건강기능식품 같은?”
“여기 사진으로 찍어뒀어요. 이건 아침에 드시는 종합비타민이고……. 혈압약은 여기 병원에서 처방하는 그대로 드시고요.”
그녀는 휴대폰을 열어 처방전과 영양제 사진을 보여주었다.
약물 종류며 복용 시간을 꼼꼼하게 챙기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이 맑지가 않으세요.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건 아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예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울먹였다.
“아버님이 내과 교수님이신데 별일이야 있겠어? 아침 거르지 말고 이거라도 좀 들고 가.”
중년 여인이 밀폐 용기에 담긴 도시락을 건넸다.
손수 만든 샌드위치와 샐러드. 평소 이예진이 먹던 식단 그대로였다.
“저까지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은 무슨. 나한테도 어머니 같은 분이야.”
그녀가 인자하게 웃으며 이예진의 등을 쓰다듬었다.
‘자식보다 낫네.’
일단 자녀들보다 환자 상태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시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종관 교수 성격상 아무나 고용했을 리 없지.’
이예진을 챙기는 것도 그렇고 환자의 주변 환경부터 먹는 약까지 세심하게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섬망은 원인을 파악해서 교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까지는 딱히 짚이는 게 없네요. 잠시 진찰 좀 하겠습니다.”
이미 혈액검사에 각종 X-ray 검사까지 마친 상황이라 진찰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지만, 시현의 진찰은 또 달랐다.
‘준비해줘.’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