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Chapter 34. 터닝포인트 (3)
‘준비해줘.’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시현의 홍채에 형형한 빛이 감돌고, 손끝에 닿는 감각이 극도로 민감해졌다.
환자의 흉부와 복부를 차례로 진찰하고, 사지에 멍든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찾아봤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뭐지 이 환자?’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 협진 담당 레지던트일 때 섬망 환자는 수도 없이 봐왔지만, 이 정도로 모든 검사 결과가 깨끗하면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으… 으음.”
얕은 잠을 자던 환자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다음 순간, 환자의 후두부가 시현의 눈에 들어왔다.
‘피부 색깔이 다르다.’
평소였다면 놓쳤을 만큼의 미묘한 차이였지만, 지금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환자의 뒤통수 쪽 두피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이건 뭔가요? 부딪혀서 멍든 것 같은데.”
시현이 그 부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멍이요? 그게 무슨?”
중년 여인이 화들짝 놀라 환자 상태를 살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다친 걸까요?”
“글쎄요… 저는 보지 못했는데.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그러셨을까요?”
“추가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환자분 의식이 명료하지 못한데 이대로 두면…….”
시현은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옆에서 듣고 있는 이예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저도 얼른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아주 잠깐 가볍게 부딪친 정도겠죠? 다친 걸 알았으면 이모님이 바로 말씀하셨을 거예요. 평소에 할머니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인데요.”
묘한 기류가 흐르자 이예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중년 여인을 배려하는 듯한 태도.
“아이고 이를 어째… 제가 더 잘 챙겼어야 했는데…….”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진심으로 환자를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응? 미숙이냐?”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잠에서 깬 환자가 중년 여인을 보며 말했다.
“네, 어머니. 저 왔어요.”
간병인이 이내 상냥한 태도로 환자를 일으켜 세웠다.
환자를 오래 돌본 탓인지 ‘어머니’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미숙아. 문단속을 잘해야 해. 간밤에 누가 왔다 간 것 같더라.”
“여기 병원이에요. 어제도 병실에서 주무셨는데 누가 왔다 갔겠어요?”
환자는 일주일 전부터 입원 상태. 중년 여인이 환자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아니야. 어제도 누가 집에 왔다 갔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환자는 여전히 시간과 장소에 대한 혼동이 심했다.
“혹시 집에 계실 때는 밤에 다녀간 사람이 있나요?”
시현이 이예진에게 물었다.
“아뇨. 할머니는 혼자 사시고 밤에는 여기 이모님하고 같이 계실 때가 많아요.”
“맞아요. 어머님이 헛것을 보신 거겠죠. 밤에 올 사람이 없는데…….”
모두가 환자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지남력 저하에 환각…… 환시와 환청이 모두 있는 것 같은데?’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가 계속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 * *
“저녁에 퇴근하고 다시 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라.”
이예진은 환자에게 인사한 뒤 병실을 나왔고, 시현과 서혁상도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일단 뇌출혈이 있는지 만이라도 확인해야…….’
섬망이 왜 생겼는지 원인은 다양했지만, 자칫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인을 먼저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환자분 일단은 Brain imaging(뇌영상 촬영)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병실을 나온 시현은 곧장 채이진에게 가서 말했다.
“그건 왜……. 당장 뇌졸중이나 신경계 감염을 의심할 상태는 아니지 않나요?”
채이진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후두부 쪽으로 옅은 멍자국도 있고 왠지 찜찜해서요. 그것 말고는 의심되는 다른 원인이 없기도 하고요.”
“멍이요? 그게 증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는……. 그럼 두부 외상도 배제하고 신경계 질환 평가할 겸 MRI가 낫겠네요. MRA(Magnetic resonance angiography, 자기혈관조영술)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고요.”
“그렇긴 한데 지금 상태로 MRI 촬영하려면 환자 진정시켜야 할 겁니다. 섬망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MRI는 정밀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좁은 통속에 30분 이상 가만히 누워있어야 하는 검사였다.
의식이 혼탁한 환자의 경우 촬영 중 몸을 움직이지 않도록 진정제를 써야 하는데, 도리어 그 때문에 의식 저하가 심해질 수도 있었다.
“환자가 움직여서 협조가 안된다면, 간단하게 Brain CT만 찍어도 될 것 같아요. 조영제 없이요.”
반면 CT는 촬영 시간이 짧아 진정제 없이 찍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뇌출혈도 진단할 수 있었다.
“그래요? 그건 외상 외에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을 텐데요. 보호자는 환자 다친 적 없다고 하긴 했는데…….”
“노인분들이야 잠깐 한눈판 사이에 다치기도 하니까요. 보호자가 모를 수도 있죠.”
거기에 환자 본인도 의식이 온전치 않은 상태이니 다친 것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검사 진행할게요.”
채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사 처방을 입력했다.
* * *
2시간 뒤 11병동.
회진을 마친 감염내과 엄호태 교수와 채이진이 스테이션에 앉아 검사 결과를 리뷰하고 있었다.
“일단 주말 사이에 특별히 나빠진 건 없는 것 같고. 열도 없는 상태고?”
“네, 교수님.”
“Brain CT 촬영한 건?”
“네, 방금 촬영 마쳤습니다. 곧 영상 올라옵니다.”
엄호태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이진이 PACS(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을 열어 방금 찍은 사진들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별 게 있을까 싶은데? 정신과에서 뇌 영상 촬영해보라고 코멘트 남겨둬서 찍어보긴 했는데…….”
“어? 교수님 여기 뭔가…….”
채이진이 한 화면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천시현 선생님이 맞았어.’
우측 전두엽 부위의 증가 된 음영.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분명 뇌출혈을 시사하는 소견이었다.
“낙상으로 생긴 뇌출혈 같은데요?”
“음… 뇌출혈이 생길 정도로 다쳤는데 보호자가 모를 수가 있나? 자발성 뇌출혈(고혈압 등의 이유로 외상없이 발생하는 뇌출혈)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멍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래 보이지도 않고…….”
엄호태가 채이진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신이 미처 환자 파악을 하지 못한 것보다 자발성으로 생긴 출혈을 늦게 발견했다고 하는 편이 받아들이기 쉬운 듯했다.
“CT를 보면 충돌 부위는 후두부이고 전두엽 출혈은 카운터 쿱(충격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손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영상도 잘 보고…….’
채이진의 설명에 엄호태가 주춤했다.
2년차라고 하기에는 너무 뛰어났다.
“전향성 기억상실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환자가 다치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 그런가? 음…….”
엄호태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흠.”
“과장님 오셨습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엄호태는 다급히 일어나 이종관에게 의자를 양보했다.
“어머니가 낙상이 있으셨던 것 같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이종관 교수는 벌써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저 그게……. CT상에서 전두엽 부분에 소량의 출혈이 발견되었습니다. 정식 판독을 받아봐야 하겠지만 외상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뇌출혈을 놓치고 있었다니…… 그럼 단순한 수술 후 섬망이 아니었던 건가?”
엄호태의 말에 이종관 교수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신경외과에 협진 의뢰하겠습니다.”
채이진이 서둘러 의뢰서를 작성했다.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자신 또한 환자를 꼼꼼히 진찰했으나 미처 모르고 있었던 부분.
협진 와서 잠시 본 것만으로 섬망의 원인을 짚어낸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위이이잉.
그렇게 회진이 끝날 때 즈음 휴대폰이 울렸다.
[아빠]
레지던트 생활을 뻔히 아는지라 근무 중에는 좀처럼 전화하는 일이 없었는데.
채이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 * *
며칠 뒤 11병동 스테이션.
“이거 드시고 하세요!”
이예진이 커피 3잔이 담긴 캐리어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제가 더 감사하죠. 아침마다 이렇게 시간 내서 와주시는데.”
그녀가 스테이션에 앉아있는 시현과 채이진 그리고 서혁상을 보며 말했다.
“벌써 출근 시간이 다 돼가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 뇌출혈이 조금 있지만, 병변이 더 커지지 않고 있어요. 일단은 지켜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맞아. 곧 괜찮아지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채이진과 서혁상이 그녀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반면 시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요 며칠간 출근 전에 잠시 11병동을 들러 아침마다 환자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담당의는 아니었지만, 회귀 전 환자의 경과를 알고 있는 터라 마음이 쓰였기 때문.
문제는 며칠째 환자 상태가 그대로라는 점이었다.
[치료진척도 17/100 생존 확률 21%]
“그나저나 시현이는 대단해! 어떻게 그걸 바로 찾았을까?”
이예진이 떠나자 서혁상이 시현을 치켜세웠다.
“대단은 무슨… 운 좋게 발견한 것뿐이야.”
“운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다시 봐도 모르겠던데. 시현쌤 눈이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눈이 좋긴 했다.
‘시청타촉의 포션’을 쓴 상태에서 경험하는 감각은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보호자가 다친 적 없다고 하길래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앞으론 직접 본 것만 믿어야겠어요.”
“보호자면 그 간병인? 사실 그 사람 말이 좀 신뢰가 안 가긴 했어.”
채이진의 말에 서혁상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 어떤 면이?”
채이진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중환자실 면회할 때 봤는데, 환자 본체만체하고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더라고.”
“그래? 아까랑은 딴판이네?”
병실에서 환자를 극진히 돌보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보니까 며칠 전에는 잔뜩 멋을 내고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왔더라고. 병원에 간병하러 왔다는 사람이…… 일하기 불편할 텐데. 아무튼, 뭔가 부적절해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렇단 말이지…….’
환자에게 잘하는 모습만 보였었는데, 서혁상의 말을 들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뇌출혈이 더 심해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낮은 치료 진척도와 생존 확률이 마음에 걸렸다.
“아, 늦었다! 나도 이만 가볼게! 수고해!”
서혁상이 서둘러 스테이션을 떠났다. 이예진을 보러 일찍 나오긴 했지만, 그 또한 아침 회진 준비로 바쁠 시간이었다.
“그럼 저도…….”
시현도 일어나 정신과 병동으로 가려는 찰나, 채이진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혹시 저한테 할 말 없어요?”
흡사 뭘 잘못한 건지는 아느냐고 묻는 여친의 말투.
시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보니 늘 웃는 얼굴로 시현을 대하던 그녀가, 오늘은 조금 차가운 느낌이었다.
‘맙소사…….’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