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Chapter 34. 터닝포인트 (4)
‘맙소사…….’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큰어머니가 단단히 입단속 하도록 신신당부했기에 채이진에게는 차차 이야기하려 했는데,
조카 사랑이 지극한 큰아버지가 그새 채종우 교수에게 뭔가 이야기한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뭐라고 말씀을 하신 걸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른들이 착각하신 것 같다고?
그건 너무 무책임하다.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선생님과 사귀고 있다고 둘러댔다고?
사실과 다를뿐더러 이상하기까지 하다.
‘망했다.’
어떤 설명도 적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어떻게 말하든 이상한 놈과 약간 덜 이상한 놈 정도 차이뿐이겠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얼버무린 대가가 이렇게 컸다.
한겨울인데 열이 오르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 어른들이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 오해를요?”
“네.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제 탓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시현이 고개를 숙였으나, 채이진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지난번 연구 회의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연구요?”
“네! AI 연구 같이하기로 했잖아요. 그때 저 학회 때문에 회의 참석을 못 해서…… 분위기 어땠어요?”
“아, 그 건은 삼아전자에서 적극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아주 좋았어요.”
“정말요? 잘됐네요!”
그제야 채이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회의한 지 한참 됐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서운했다고요. 시작은 자살 예방이지만, 나중에 내과 분야까지 확장해야 하는데…… 설마 잊은 건 아니죠?”
“그, 그럼요! 심혈관계 질환까지 포함하는 게 목표니까요. 앞으론 바로 알려드릴게요.”
서운함의 포인트가 연구 쪽이었다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어른들 오해라는 건…… 뭐예요?”
하지만 채이진의 다음 말에 시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저, 그게…….”
언젠가는 풀어야 할 문제였다.
나중에 다른 경로로 알게 되느니 이참에 직접 설명하고 정식으로 사과하는 게 나았다.
어찌 됐건 자신이 불편한 자리 피하려다 벌어진 헤프닝이었으니까.
“저희 큰아버지, 그러니까 천태일 교수님께서 저와 선생님 사이를 오해하고 계세요. 이번 명절 때 잠깐 뵀었는데…….”
시현이 채이진의 눈치를 살피며 며칠 전 상황을 설명했다.
“천태일 교수님이 큰아버지셨군요. 전혀 몰랐어요.”
채이진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그리고 보니 시현도 그녀가 채종우 교수의 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좀처럼 집안 이야기는 꺼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맞선 자리가 들어와서 거절했고. 만나는 사람이 있냐는 말에 그냥 그렇다고 했다고요?”
“네.”
“그랬더니 천 교수님은 그게 저인 줄로 아셨다는 건가요?”
“네네.”
믿기지 않겠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아마도 아빠가 선생님을 너무 좋게 이야기해서 그렇게 생각하신 거 아닐까요? 식사도 두 번이나 같이 한 것도 맞고요.”
우려와는 달리 채이진은 별일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그녀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왜 그분은 안 만나려고 한 거예요? 그냥 밥 한번 먹고 오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아직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그럴 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회귀 전에 봤을 때 너무 이상했던 사람이라 피한 것도 있지만, 요즘 들어 바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때도 지금도 정신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예전엔 미숙해서 그랬고, 지금은 일을 잘해서 일이 더 늘어 버렸다.
“그럴 때가 아니다, 라. ‘선생님다운’ 생각이네요.”
채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연애 못… 아니, 안 하는 게 나다운 건가?’
그게 뭐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지던트 때는 연애보다 환자와 연구가 더 중요하다는 거죠?”
“…….”
“역시, 그런 생각일 줄 알았어요. 선생님이 한눈을 팔 리가…… 제가 오해했던 것 같네요.”
그거 아닌데.
타이밍 놓치고 퀘스트 패널티로 소개팅도 안 들어와서 그랬을 뿐인데?
채이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시현을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레지던트는 환자를 봐야지? – 환자 진료와 연구에 매진한 결과 향후 1년간 중매, 소개팅, 자연스러운 만남 및 부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와. 이건 진짜… 아니, 와…….’
1년차 초반에 황진호가 해주기로 한 소개팅이야 퀘스트 실패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건 명색이 보상인데.
달랑 1천 포인트 주면서 너무한 것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SORA : 사용자의 연애를 희망하지 않는 존재들이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그게 누군데? 혹시… 시스템 관리자?’
시스템 관리자 강성진.
교수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SORA : 시스템 관리자의 의견도 있지만, 또 다른 고귀한 존재들의 뜻이기도 합니다.]
‘고귀한 존재들이라면…….’
[SORA : 이 세계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분들입니다. 사용자께서 위험에 처하지 않고 환자를 잘 치료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뭐, 진료가 가장 중요하긴 하지.’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환자를 열심히 봐야 한다는 말인 것 같았다.
동시에 익숙한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딩동!
[system : 누적 획득 포인트가 70만을 돌파하였습니다.]
그간 획득한 것이 69만 9천 포인트였던 모양이다.
[보유 자원 300,500P]
‘착실하게 많이 모았네.’
연애는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포인트가 있었다.
매일 쓸 포션과 카이트만의 안경을 유지하는 데 상당히 많은 자원을 소비했음에도 포인트는 조금씩 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초고가 아이템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부자가 된 기분이 흐뭇해하는 사이 또 다른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누적 획득 포인트 70만 돌파로 신규 아이템을 오픈합니다.]
‘오호!
시현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의사 장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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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향상의 포션(A) : 짧은 시간 동안 사용자가 지정한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3,000P)]
[능력치 향상의 포션(A) : 짧은 시간 동안 사용자가 지정한 능력치가 10P 상승합니다. (3,0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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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잘 보는 의사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더니, 이번에는 의사로서의 역량을 올려주는 포션들이 나왔다.
‘5개씩 구매할게.’
[SORA : 신규 포션 출시 기념 모든 포션 1+1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그렇다면 10개씩만…….’
[system : 30,000P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응급상황에서야 유용할 것 같았지만 정신과 특성상 자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SORA : 기존 포션들도 추가 구매할까요?]
‘좋은 생각이야. 종류별로 ‘적당히’ 구매해줘.’
[system : 270,000P를 사용하였습니다.]
[보유 자원 500P]
‘응?’
알림창에 뜬 숫자를 본 시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30만 포인트를 다 태웠어?’
[SORA : ‘의사 장터’ 특가행사 1+1 구성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쇼호스트라도 만나고 온 것일까. 그녀가 보는 ‘의사 장터’ 인터페이스는 시현이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 그래. 유통기한이 있는 건 아니지?’
[SORA : 수련 기간 내에만 사용하시면 됩니다.]
쌀 때 미리 사두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회복 포션과 숙면 포션은 거의 매일 쓰다시피 했으니까.
[보유 자원 500P]
갑자기 가난해진 기분에 시현은 알림창을 닫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런 자리가 들어오면 거절하실 건가요? 레지던트 생활에 전념하려고?”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채이진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시현을 보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 선생님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때를 놓쳤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해드렸네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제대로 해명하지 않은 건 잘못이었다.
“선생님이 죄송하실 것까지야.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네. 그렇지만…….”
“어떻게 된 건지 이해했으니 됐어요. 원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보려고 하잖아요. 천 교수님은 선생님이 안정된 가정 꾸리고 잘 지내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으신가 봐요.”
자칫 당혹스러울 상황임에도 따뜻하게 말해주는 마음 씀씀이까지.
‘괜찮은 사람이야. 볼수록.’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등 뒤에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궁금했던 것이 해결되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다음에 큰아버님 뵙게 되면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러실 필요 없어요.”
“네? 그게 무슨…….”
해명할 필요가 없다니.
시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찰나, 채이진이 대답했다.
“저희 아빠도 그렇게 알고 계시니까요.”
* *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하고 선생님이 굉장히 ‘진지한’ 관계인 걸로 알고 계신다고요.”
시현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돌아온 대답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가족 모임에서 상황을 모면하려 던진 말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침 저도 비슷한 상황이었거든요. 누굴 만날 생각은 없는데 어른들이 자꾸 압박하셔서요. 선생님도 그런 경우 아니셨을까… 생각했죠.”
채이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괜찮은가요?”
“뭐, 어른들이 오해하시는 대로 둬도 나쁠 건 없잖아요? 최소한 원치 않는 자리에 불려 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집중하고 싶어서요. 지금 하는 일에.”
채이진의 눈이 빛났다.
내과에 자부심을 가지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시현이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친구들한테 듣기로…….”
“사실 의대 다닐 때, 아니 한국대에서 인턴 할 때까지만 해도 누구 못지않게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여기 오고 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우리 병원에 좋은 선생님들 참 많으시죠.”
“그런 뜻이 아니에요.”
채이진이 옅은 미소를 띠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환자 참 열심히 보시는 것 같아요. 잠깐 협진 보러 내려온 환자한테도 그렇고 어려운 환자 볼 땐 번뜩이는 면도 있고…… 저도 뭔가 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뜻밖의 칭찬이었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생각해보면 채이진이 의뢰한 환자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쉬운 환자였다면 그녀 선에서 다 치료했을 테니 협진 의뢰가 올 일도 없었을 터였다.
[장영숙 여/79 R2 채이진 / Prof. 엄호태]
[치료진척도 17/100 생존 확률 21%]
‘장영숙 환자도 마찬가지…….’
며칠째 생존 확률이 오르지 않는 이유를 밝혀야 했다.
* * *
같은 날 저녁, 정신과 의국.
‘특별히 나쁜 건 없어.’
장영숙 환자의 차트를 열어 최근 검사 결과들을 살펴보았으나 소득은 없었다.
다른 의사 같았으면 이대로 지켜보자고 할 정도.
하지만 환자의 경과를 알고 있는 시현으로서는 걱정이 앞섰다.
‘뭔가 더 해야 할 텐데.’
뇌출혈도 발견했고 신경외과 진료를 보도록 했음에도 그대로라는 건 다른 원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시현이 섬망의 원인으로 생각했던 것이 두부 외상과 약물이었다.
‘약물은 변한 게 없어…….’
막막한 기분이 들던 찰나.
딩동!
[SORA : 추천 아이템이 있습니다.]
‘아이템이라면 어떤?’
[SORA : ‘능력치 향상의 포션’을 쓰시겠습니까? (Y/N)]
‘아, 그거…….’
짧은 시간 동안 사용자가 지정한 능력치가 10 상승하는 아이템이었다.
신규 포션 출시 기념 이벤트 때 SORA가 충동구매를 해둔 탓에 재고는 넘쳐났다.
‘지력에 사용할게.’
시스템 내에서 지력은 집중력이나 판단력과 같은 인지기능 전반을 아우르는 능력치.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할 법한 능력치였다.
[system : 레지던트 천시현의 지력이 75-> 85로 일시 상향됩니다.]
[system : 의무 기록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