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Chapter 34. 터닝포인트 (5)
‘의무기록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라…….’
그래서인지 평소의 차트 리뷰와는 뭔가 달랐다.
환자가 암을 진단받고 병기를 평가하는 과정부터 수술 후 경과까지의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행간을 읽는 느낌. 다른 과 기록이었지만, 담당 교수의 의도마저 알 듯했다.
시현은 뒤이어 간호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23일 14:00 수술 후 의식 회복. 지남력 명료함 중환자실 간호사 김주희>
<23일 17:30 수술 부위 통증 호소 있으나 참을 만하다고 보고함. 담당의 노티. 의식 명료함. 중환자실 간호사 이민경>
<24일 7:00 전날 잠을 설쳤다고 자발적으로 보고함. 안정 상태. 혈액검사 및 흉부 x-ray 검사에 협조적. 일반병실로 전실 예정. 중환자실 간호사 김혜지>
‘수술 다음 날까지는 문제가 없었던 것 같고.’
장영숙 환자는 수술을 마친 뒤 금세 의식을 회복하였고 중환자실에서도 줄곧 안정된 상태였다.
환자가 왜 갑자기 나빠졌는지가 의문일 정도였다.
<24일 11 : 00 중환자실에서 전실 옴. 바이탈 안정. 지남력 양호. 11병동 간호사 김세린>
<24일 17 : 00 통증 호소. 담당의 보고 후 진통제 추가 투여. 목마름 호소하나 물 섭취 안 되는 점 설명하였고 충분히 이해함. 11병동 간호사 이민지>
<24일 23:30 환자가 잠을 못 자는 것 같다며 간병인이 여러 차례 컴플레인. 통증 사정 후 진통제 추가 투여. 11병동 간호사 이유진>
<25일 3:30 혈압, 체온 측정 시 담당 간호사 못 알아보고 여기가 어디냐고 되물음. 11병동 간호사 이유진>
‘의식이 혼탁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25일 새벽…….’
간호기록을 빠르게 읽어내려가던 중 시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전실 온 바로 그날 밤부터였기 때문.
중환자실에서 섬망 증상을 보이다가도 일반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이 돌보면 안정을 찾기 마련인데, 이 경우는 정확히 반대였다.
‘병실 환경에 문제가 있나?’
하지만 환경을 탓하기에는 쾌적한 1인실에 전담 간호사와 간병인까지 있었고, 수시로 아들과 손녀가 방문하여 환자 상태를 살피기까지 했다.
지력이 상승한 덕분에 포션 효과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차트 리뷰를 마친 상황.
섬망. 수술. 두부 외상. 약물. 중환자실. 일반병실. 간병인. 다녀간 손님.
여전히 환자와 관련된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딱히 짚이는 곳은 없었다.
‘아… 피곤하다.’
숙소 불을 끄고 2층 침대의 1층에 누운 시현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딩동!
[system : 능력치 향상 효과가 잠시 후 종료됩니다.]
‘뭔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텐데…….’
생각은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추가 검사 결과에 기대를 걸며 의식이 아득히 흐려지려는 순간.
딩동!
잠결에 시스템 알림음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system : 특정 조건을 충족하여 새로운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system : 스킬 ‘꿈의…’을 사용…….]
시현은 미처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시현 씨, 일어나세요.”
시현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까지 와서 졸고 있으면 어떡해요?”
낯선 목소리의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극장?’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시현은 자신이 객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현 씨는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네?”
알 수 없는 여인의 더 알 수 없는 질문.
시현은 유심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소파나 탁자를 보면 무대의 배경은 분명 실내인데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무대 중앙에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여배우가 쓰러져 있다.
머리에서 흐른 피는 빗물을 타고 객석으로 흘렀다.
소름이 돋을 만큼 실감 나는 연출이었다.
“이제 알겠어요? 누가 범인인지?”
‘꿈인가.’
뜬금없이 범인을 맞춰보라니. 자다 일어난 시현에게는 여간 당혹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깜빡 잠들어서 전 상황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참 동안 무대를 들여다봤음에도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다.
무대는 여배우가 쓰러져있는 그 상황에서 멈춰있는 듯했다.
‘그런데 왜 다른 등장인물들은…….’
여배우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목격자라던가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경찰이나 탐정이 있을 법도 한데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부터 연극 진행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왜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건가요?”
“연극이요? 시현 씨 눈에는 지금 이게 연극처럼 보이는 모양이죠?”
“네? 그게 무슨…….”
이따금 치는 번개에 여인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표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굳은 얼굴.
‘묘하게 낯이 익어……’
손목과 팔꿈치 그리고 어깨에 이르는 관절 곳곳이 천장에서 내려온 끈으로 묶여있었다.
‘마리오네트?’
이건 분명 꿈이다.
무대에 내리는 폭우도 사진처럼 멈춰있는 연극도 사람인지 인형인지 모를 여인도 모두 비현실적이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곧 다 씻겨 나가고 말 테니까.”
객석이 어두운 탓에 여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서두르라고 말하는 것 치고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씻겨… 나간다고?’
여인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만요!”
시현이 뒤쫓았지만,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 * *
“헉헉…….”
시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5 : 26 AM
아직 알람도 울리기 전.
‘이렇게 생생한 꿈이라니…….’
미처 갈아입지 못한 셔츠가 땀으로 흥건했다.
‘잠들기 전에 메시지가 떴던 것 같은데.’
시현은 시스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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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 특정 조건을 충족하여 새로운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system : 스킬 ‘꿈의 해석’을 사용합니다.]
‘스킬 설명서.’
[SORA : 스킬 설명서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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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 의식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잠들었을 때 발동합니다.
- 문제 해결의 다양한 실마리들을 꿈의 형태로 제공합니다.
- 최소 요구 지력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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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결의… 실마리…….’
꿈의 해석.
프로이트가 쓴 유명한 저서 ‘꿈의 해석’과 이름이 같은 스킬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여겨 중요하게 다뤘다.
‘특정 조건이란 게 지력 80이었어?’
[SORA : 네. 일시적이지만 ‘능력치 향상 포션’의 효과로 조건을 충족한 상태에서 잠드셨습니다.]
의도치 않게 새로운 스킬을 오픈한 셈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시현은 방금 꾼 꿈 내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일단 무대에 쓰러져 있던 여배우.
‘이건 누가 보더라도 이종관 교수님 어머님인데.’
깨어있는 동안 겪은 일들은 꿈에서 다른 형태로 가공되어 나타난다.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현실에서는 장영숙 환자뿐이었다.
문제는 그것 외에 특별히 짚이는 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배우가 쓰러지게 된 과정이라 알면 도움이 될 텐데 꿈이 시작된 시점은 이미 사건이 벌어진 뒤였다.
위이이잉.
[일어났냐? 운동 가야지!]
서혁상의 문자였다.
그는 아침 운동이 완전히 몸에 배었는지 이제는 깨우지 않아도 먼저 연락해오곤 했다.
‘걸으면서 생각하면 나으려나.’
[바로 갈게.]
시현은 짧게 답한 뒤 병원을 나섰다.
* * *
“요즘 예진 씨는 운동 안 나오나 봐?”
“응. 할머니 보고 출근한다고 새벽 운동 대신 저녁에 한다던데.”
두 사람은 나란히 런닝머신에 올라 몸을 풀고 있었다.
“섬망이 오래 가서 걱정이다.”
“그러게. 어제도 주무시다가 깨서 엉뚱한 소리를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 그래도 금방 좋아지지 않을까? 수술 후 섬망이야 워낙 흔하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뭐, 보호자가 다른 분도 아니고 무려 이종관 교수님인데. 내과에서 가장 학술적인 분이시잖아?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기시지 않을까?”
다들 환자 상태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게 오히려 불안했다.
그렇다고 아무 근거도 없이 환자가 위험하니 뭔가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내과 의사들은 의학적 판단에 객관적인 근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설득을 위해서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는 게…….’
띠리리링. 띠리리링.
시현은 서혁상의 전화가 울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어젯밤 꿈에 몰두하고 있었다.
“네, 내과 서혁상입니다.”
- 선생님, 8병동인데요. 김종수 환자 아침 PO med(경구약) 처방이 없어서요. 안 들어가는 게 맞는 건가요?
“아, 네. 그 환자는 며칠간 약물 중단하고 경과관찰 할 거예요.”
- 네, 알겠습니다.
“무슨 환자인데 약을 중단해?”
시현이 통화를 마친 그에게 물었다.
“전신 가려움이 있는 환자인데 혹시 약물 알러지가 아닌가 해서. 복용 중인 모든 약물 홀드(중단) 하고 배출 기간 갖기로 했어.”
‘배출 기간…….’
서혁상의 말이 시현의 뇌리에 맴돌았다.
“그럼 일단 다 중지했다가 하나씩 다시 시도해보려고?”
“그렇지! 그럼 어떤 약이 ‘범인’인지 알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숙 환자도 그렇게 해볼까?’
모든 약을 끊는다.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 * *
1시간 뒤 11병동 스테이션.
“그래서, 모든 약을 중단하고 며칠만 지켜보자는 거예요?”
“네, 환자 상태는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 다른 원인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지만…….”
시현의 제안에 채이진은 청진기를 만지작거릴 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장영숙 환자의 기저질환이 복잡했기 때문.
평소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거기에 10년 전 갑상선암 수술 후 갑상선 호르몬까지 복용하고 있었다.
갑상선이 없는 상태니 끊어서는 안 될 약이었다.
“그럼 갑상선 호르몬 제외하고 나머지는 끊어보는 게 어떨까요?”
채이진의 우려를 눈치챈 듯 시현이 물었다.
“네, 그렇게 해보죠.”
그녀는 잠시 망설인 끝에 당일 처방을 모두 삭제했다.
“어? 선생님, 장영숙 환자 아침약부터 안 들어가요?”
오더를 확인한 담당 간호사가 물었다.
“네. 오늘은 처방 없어요.”
“아침에 혈압이 140/90이던데…… 괜찮을까요?”
가뜩이나 혈압 조절이 쉽지 않았던 환자였는데, 위암 수술 후 고혈압약 흡수에 영향이 생기면서 혈압이 더 들쭉날쭉해졌다.
“바이탈 자주 하면서 며칠만 지켜볼게요.”
“네…….”
간호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최근 바뀐 약은 없다고 했고, 채이진 또한 약물 영향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시현이 하는 이야기라 신경이 쓰였다.
* * *
이틀 뒤.
“그래서, 모든 약을 중단하고 지켜봤다는 건가?”
“네, 교수님.”
“고령에 기저질환도 많고, 수술 후 흡인성 폐렴도 있었던 환자야. 일시적으로 섬망이야 생길 수도 있는 건데. 좀 더 느긋하게 기다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채이진의 대답에 감염내과 교수 엄호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공복혈당 140mg/dL 혈압 150/100mmHg]
혈압 혈당이 전혀 조절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
“오늘부터 다시 약물 시작하게. 이 정도면 과장님도 걱정하실 것 같은데.”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채이진이 다시 처방을 입력하려는 찰나,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아니야, 난 괜찮아. 개의치 말게.”
“아, 과장님 오셨습니까?”
엄호태가 일어나 이종관에게 고개를 숙였다.
“협진 기록 읽어봤어. 천시현 선생이 며칠 약 중단하고 보자고 회신했던데.”
“네, 약물이 원인인 것 같다고 그렇게 해보자고…….”
채이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엄호태가 말했다.
“레지던트 의견일 뿐입니다. 약 끊고 특별히 섬망이 좋아진다는 느낌도 없고, 혈당 조절이 안 되는 게 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의 설명에 이종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루만 더 지켜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