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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57화 (157/195)

157화 Chapter 34. 터닝포인트 (6)

“하루만 더 지켜보도록 하지.”

“약 없이 하루 더요?”

“혈압 조절 하루 이틀 안 된다고 당장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엄호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종관을 쳐다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담당 교수인 자신보다 일개 정신과 레지던트 의견을 들어보자고 하는 데서 자존심이 상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분명 지금 상황에 맞는 문헌을 찾아보고 내린 결론일 거야.”

이제 갓 2년차를 마친 레지던트였지만, 시현의 진료 스타일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동안 시현의 외래를 들렀다 온 환자들을 진료한 적이 있었기 때문.

공황장애가 의심된다고 정신과를 먼저 방문했다가 순환기내과로 협진 의뢰된 환자들이었다.

‘어김없이 부정맥이나 다른 심장질환이 발견되곤 했었어.’

처음에는 그저 내과적인 원인을 배제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보낸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시현이 언급했던 질환이 실제로 나오곤 했다.

어떻게 진찰과 면담만으로 알아낼 수 있었을까 호기심이 일 정도로.

“참, 천시현 선생이 채 선생하고 연구 같이한다고 했던가?”

“네? 아, 일단은 자살 예방에 대한 AI 예측 모델 연구이고 향후 내과 계열 중환자에게도 활용할 계획입니다.”

병원 소문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벌써 이종관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 삼아전자하고 같이 한다고 들었어. 원장님 표정이 볼만하더군.”

그는 과장 회의에서 본 원일웅의 표정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그를 오래 봐온 이종관을 알 수 있었다. 꽤나 심기가 뒤틀렸을 보이던 표정이라는 것을.

“천시현 선생이 아주 흥미로운 연구를 하고 있던데. 나중에 순환기내과 데이터도 필요할 거야. 팍팍 밀어줄 테니 채 선생도 열심히 해봐.”

“네, 과장님. 감사합니다!”

‘레지던트가 삼아전자와 연구를? 거기에 과장님이 저런 평가라니…….’

엄호태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자신이 의대생이었을 때부터 교수였던 이종관이 누군가를 저렇게 칭찬한 적은 없었다.

‘그래봐야 레지던트인데…… 환자 상태는 별 차이가 없을 테고.’

하지만 그로서는 시현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일 아침부터는 바로 약물 투여 시작하도록 해요.”

이종관이 떠나자 엄호태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 *

다음날 새벽.

시현은 여느 때와 같이 서혁상과 런닝머신에 올라 하루를 시작했다.

‘간호기록 부탁해.’

[SORA : 장영숙 환자의 간호기록을 출력합니다.]

<01:30 환자가 엉뚱한 소리를 하며 잠들지 못한다고 간병인이 컴플레인. 모든 약물 투여 중단상태로 진통제 및 수면제 투여 어려움 여러 차례 설명했으나 여전히 짜증 섞인 반응. 11병동 간호사 이유진>

‘아직도 의식이 안 돌아왔어…….’

내용을 확인한 시현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며칠 전 그 환자는 어떻게 됐어?”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시현이 물었다.

“누구?”

“약물 알러지 의심된다고 약 다 끊고 지켜보기로 한 환자 있잖아.”

“아, 그 환자? 본인은 약 바뀐 거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했는데, 결국 약이 원인이었어. 워시 아웃(Wash out, 약물 배출) 되고 나니까 피부 다 좋아졌어.”

“그래… 다행이네.”

모든 환자에게 통용되는 전략이란 없다.

약물 영향을 배제하려 극단적으로 모든 약을 끊었지만, 장영숙 환자는 나아진 게 없었다.

‘워시아웃…….’

그런데도 서혁상의 말이 자꾸 뇌리에 맴돌았다.

-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곧 다 씻겨 나가고 말 테니까.

그리고 불현듯 꿈속에서 만난 여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범인. 마리오네트. 소극장. 무대에 내리던 비. 머리에서 흐르던 피.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어느 것 하나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서두르지 않으면 씻겨 나간다고 했어. 씻겨 나간다라……. 도대체 뭐가?’

시현은 잠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어 런닝머신에서 내려왔다.

‘혹시 그런 건가?’

“혁상아, 먼저 가볼게. 급한 일이 생겨서.”

“어? 갑자기 왜?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서혁상을 돌아볼 틈도 없이 시현은 병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장영숙 환자 밤 동안 어땠나요?”

11병동으로 올라온 시현은 환자 상태부터 살폈다.

“어휴, 말도 마세요. 수액 라인 다 뽑으시고 엘튜브(비위관, 코를 통해 위로 들어가는 관) 까지 빼려고 하셔서 말리느라 혼났어요.”

“혹시 환자 유린백(도뇨관을 통해 나온 소변을 모으는 백) 비웠나요?”

“아직요. 그건 왜요?”

“다행이네요. 제가 좀 볼게요.”

“네?”

담당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분 섭취량과 배설량을 묻는다면 모를까 뜬금없이 소변을 버렸는지 궁금해하다니.

“검사 나가야 할 게 좀 있어서요.”

시현은 검체 채취용 튜브를 들고 병실에 들른 뒤 곧장 검사실을 향했다.

* * *

2시간 뒤, 11병동 아침 회진.

“환자 상태 며칠 전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 그럼 그렇지…… 고령에 기저질환이 원인이지 약물 영향일 리가 없잖아?”

감염내과 엄호태가 장영숙 환자 차트를 살피고 있었다.

“그럼 오늘부터는 약물 원래대로 시작하고, 환자분 불면 호소 있는 것 같으니까 필요하다면 수면제도 쓰도록 하자고.”

“네, 교수님.”

그의 지시에 채이진이 기존 처방을 다시 입력했다.

다음 순간, 시현이 검사 결과지 한 장을 들고 스테이션으로 뛰어왔다.

“교수님, 장영숙 환자 소변 검사 결과 확인 부탁드립니다.”

“소변 검사? 그게 무슨…….”

왜 처방하지도 않은 검사를 했냐고 시현을 나무라려던 찰나, 결과지를 확인한 엄호태의 표정이 굳어졌다.

“벤조디아제핀(진정제의 일종) 양성에… TCA(삼환계항우울제) 양성?”

“고령 환자에서 의식 저하를 유발할 수 있는 약물들입니다.”

“이게 환자 처방전에 있는 약물들인가? 채 선생,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당황한 엄호태는 애꿎은 채이진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본원 처방에는 없습니다. 타 병원에서 드시던 약물들도 다 식별했는데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당혹스럽기는 채이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것들 때문에 머리를 다친 건가?”

“진정작용이 강한 약물들이라 낙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OCS(의료정보시스템)에 올라오기도 전에 검사 결과지를 뽑아온다, 라.’

비록 감염내과적인 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타과 레지던트가 자신보다 환자 상태를 더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흠흠.”

다음 순간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무슨 약이 검출되었다고? 소변 검사에서 양성은 또 뭐야…….”

“벤조디아제핀과 TCA(삼환계 항우울제)이라고… 합니다.”

엄호태가 슬쩍 시현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정신과 약물들인데, 어머니가 평소에 그런 약들을 처방받으실 리가……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파악한 건가?”

이종관은 엄호태에게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분명 교수 대 교수의 대화였지만 그 양상은 교수가 레지던트 추궁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천 선생은 어떻게 생각해? 그 약물들이 섬망의 원인인 건가?”

이종관은 급기야 시현을 지목해 묻기 시작했다.

“두 약물 모두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TCA는 항콜린 작용이 강해서 섬망을 악화시킨다는 보고들이 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웬만한 약들은 다 우리 병원에서 처방하는데…… 기록에는 전혀 없어. 그 약들을 도대체 어디서 받으신 걸까?”

이종관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로컬(1, 2차 병원)에서 워낙 많이 쓰는 약들이니까요. 모르고 드셨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엄호태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겠지……. 일단 약물은 다 중단하도록 했으니 괜찮겠지.”

이종관은 엄호태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입원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소변에서 약물이 검출된다는 게…… 그리고 이상한 점이…….”

“아니 그건 검사 민감도가 높으면 미량이라도 검출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엄호태가 시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타과 레지던트라 대놓고 지적하지 못할 뿐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태도가 달가울 리 없었다.

“잠깐만, 엄 교수. 천 선생, 계속해보게.”

“네, 과장님. 소변에서 검출된 TCA의 경우 카디악톡시시티(심장 독성) 때문에 고령층에서 선호되지 않는 약물입니다.”

“그야 확실히 그렇지.”

이종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뭔가?”

이종관은 몹시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천시현을 바라보았다.

“잠깐 PC 좀 쓸 수 있을까요?”

“그래. 뭐든 어서 해보게.”

이종관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권했다.

이종관, 엄호태, 채이진의 시선이 시현의 모니터에 집중되었다.

Enafon 10mg HS Sensival 10mg HS

Rivotril 0.5mg HS Xanax 0.5mg HS

...

...

Stilnox 10mg HS Halcion 0.25mg HS

시현은 장영순 환자의 처방 창을 열어 여러 종류의 약물들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엄호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다 됐습니다.”

시현이 처방 전송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됐다니 뭐가?”

놀랍게도 화면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이종관 교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DUR!”

채이진이 뭔가 알았다는 듯 외쳤다.

DUR(Drug Utilization Review, 의약품 안전 사용 서비스).

병용 금지 약물 처방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타 병원에서 받은 약과 동일 처방을 추가로 입력하면 중복 처방으로 경고 메시지를 띄워주기 때문에 꽤나 유용했다.

“네. TCA와 벤조디아제핀계열 약물들을 모두 입력해 봤는데, DUR 상에서 겹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 처방받지도 않은 약물이 어떻게 소변에서 검출된다는 건지…….”

이종관 교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부터 ‘범인’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 * *

당일 밤 11병동.

“아이고 종관아 예진아. 여기가 어디냐?”

장영숙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잠꼬대를 하며 수액 라인과 비위관을 뽑으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간호사들이 즉각 병실로 들어와 환자 상태를 살폈다.

“맥박도 빠르고 혈압도 약간 높아. 담당의 노티 할게.”

“저기 잠깐만요.”

누군가 병실 문을 나서려는 간호사를 불러세웠다.

“저기 간호사님,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장영숙 환자의 간병인이었다.

“네? 왜 그러세요. 담당 선생님한테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어휴, 그리 유난 떨 필요 없어요.”

간병인은 잠이 덜 깼는지 보호자 침상에 걸터앉은 채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머니, 저 알아보시겠어요?”

“미숙이냐? 여기가 어디냐?”

“병원이에요 병원. 걱정하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그녀의 말에 환자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우리 어머님은 집에 계실 때도 이렇게 잠꼬대가 심하셨어요. 자, 이렇게 손을 잡아주고 편안하게 해드리면…….”

간병인이 다독거리자 환자는 이내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어? 환자분 다시 주무시는 것 같은데요?”

“익숙한 사람이 옆에서 돌봐주셔서 그런가? 안정감이 드셨나 봐요.”

“맥박도 다시 정상범위에요.”

간호사들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럼 다른 일들 보세요. 저희 어머님은 좀 더 주무셔야 할 거 같아요.”

“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호출하시고요.”

간병인은 서둘러 간호사들을 내보낸 뒤 문을 닫았다.

어두운 병실에는 환자의 맥박과 산호 포화도를 표시하는 모니터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1인실이라 자신과 환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뻔히 알았지만, 간병인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 오늘은 약이 좀 부족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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