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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58화 (158/195)

158화 Chapter 34. 터닝포인트 (7)

“휴, 오늘은 약이 좀 부족했나?”

간병인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물에 섞더니 이내 주사기에 옮겨 담았다.

수술 후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환자에게는 비위관을 통해 물이나 미음과 같은 유동식을 공급하는데, 거기에 쓰는 50cc 주사기였다.

“아휴, 어머니. 저 좀 깨우지 말고 푹 주무세요. 나 잠 못 자면 예민해지는 거 뻔히 아시면서.”

간병인은 환자의 비위관에 주사기를 연결한 뒤 서서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콧줄이 왜 이렇게 뻑뻑해?’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감각.

꽤나 세게 눌렀는데도 주사기의 피스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이상함을 느낀 간병인이 침상 등을 켜고 비위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부스럭.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아니 이 방에 누가?’

간병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 방금까지도 자신과 환자 두 사람만 있는 병실이었다.

“뭐가 잘 안되시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

간병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system : ‘은신 포션’의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아… 정신과 선생님이셨구나.”

천시현이라고 했던가. 분명 자신에게 이것저것을 캐묻던 정신과 레지던트였다.

‘그런데 어느 틈에?’

간호사들이 나간 것이 불과 방금 전이었다.

이 의사가 왜 여기에 있으며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간병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간병인이 슬그머니 경관 영양용 주사기를 뒤로 감추며 말했다.

“그 약은 투여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시현이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이라뇨?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님이 목말라 하시는 것 같아서 물 드리려고 하는데…….”

[system : 간병인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

‘역시.’

환자가 처방받은 적이 없는 약물의 출처는 이 간병인이 확실했다.

“앞으로는 환자분이 못 주무시면 담당 선생님에게 알려주십시오. 처방받지 않은 약물을 투여는 위험해요. 당부드립니다.”

시현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이예진에게 듣기로는 환자를 오래 돌봐온 사람이라고 했다.

임의로 약물을 투여한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차마 나쁜 의도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고령 인구에서 불면증은 워낙 흔하니까.’

심지어 처방전 없이는 구할 수 없는 수면제를 옆집 사람에게 받아서 먹어봤다는 환자들도 종종 있었다.

“약, 약물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어머님한테 나쁜 짓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간병인은 격분하며 시현에게 소리를 질렀다.

“…….”

예상 밖의 태도에 시현은 멈칫했다.

‘강한 부정…….’

일반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이 약물이 그동안 효과가 좋았다거나 환자가 챙겨달라고 부탁해서 부득이 투여했다면 모를까.

“환자분이 머리를 부딪치셔서 뇌출혈까지 생겼습니다. 끝까지 모른 척하실 건가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왜 애먼 사람을 범죄자 취급인데?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간병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있죠.”

“그게 무슨…….”

시현의 대답에 간병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위관이 왜 막혀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간병인이 반사적으로 환자를 돌아보았다.

‘관이 꺾여있어?’

아까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누군가 비위관을 꺾은 뒤 반창고로 감아 놓았다.

“정맥으로 투여할 수 있는 항우울제는 없습니다. 소변에서 항우울제가 검출됐다면 루트는 이것뿐이에요.”

시현의 설명에 간병인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이걸 막아버렸으니 병실 어딘가에는 분명 남아 있지 않겠어요? 약물이 들어있는 ‘주사기’ 말이에요.”

주사기를 유독 강조해서 말하는 시현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 그게…….”

반면 간병인은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일단 이걸 없애야 해.’

간병인은 뒤로 감춘 주사기를 꼭 쥐었다.

“…….”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간병인은 갑자기 병실 출입문을 향해 뛰었다.

‘이것만 버리면…….’

병원 규모로 전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삼아대 병원이었다.

일단 병실만 나가면 주사기를 버릴 곳 찾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어?”

하지만 병실 문을 연 간병인을 기다리는 건 입구를 막아선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보안요원들?’

앞으로는 보안요원들이 뒤로는 시현이 버티고 서 있는 상황.

간병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툭.

그리고 그녀가 쥐고 있던 주사기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파란색 약은 에나폰(삼환계 항우울제의 일종) 이건 리보트릴(벤조디아제핀계 항불안제의 일종) 인가요?”

시현이 주사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주사기 안에는 미처 다 녹지 않은 알약들이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모? 괜찮으세요?”

이예진이 보안요원들을 제치고 들어와 주저앉은 간병인을 부축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이예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현과 보안요원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 그게…….”

시현이 상황을 설명하려다 이예진의 뒤에 서 있던 이종관과 눈이 마주쳤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놀라기는 이종관도 마찬가지였다.

시현이 말없이 간병인이 지니고 있던 주사기를 이종관에게 건넸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이종관은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여사님, 잠깐 저 좀 보시죠.”

이종관은 간병인을 데리고 면담실로 들어갔다.

* * *

며칠 뒤.

“장영숙 환자분 어제부터 의식 명료하시고 섬망증상 전혀 관찰되지 않습니다.”

“그래. 이번 주 중으로 퇴원시키면 될 것 같은데.”

엄호태가 모니터에 뜬 당일 검사결과들을 살피며 말했다.

“채 선생, 동기 정신과 선생 있잖아. 협진 보러왔던…….”

“아, 천시현 선생이요?”

“맞아. 그 친구. 어떻게 생각해?”

엄호태가 시현에게 급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천시현 선생…… 꽤 괜찮죠. 키도 크고 똑똑하고 뭐 아주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환자한테도 잘 하는 것 같고요. 일 열심히 하느라고 가정적이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채이진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두서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기 채이진 선생? 그런 뜻이 아니고…….”

"네? 아, 네."

엄호태의 지적에 채이진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금방 정신을 차렸다.

“사실 검사 결과상에는 특이 소견이 없었잖아. 뇌출혈을 의심할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천 선생은 뭘 보고 그렇게 판단을 했던 걸까?”

“글쎄요. 섬망이야 정신과에서 워낙 많이 보니까 뭔가 감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채이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직 레지던트인데?’

감이라는 것도 결국 경험에서 나오는 법.

입원 중인 환자가 이상 행동을 보일 때 정신과에 협진 의뢰를 여러 번 했었지만, 대개는 3, 4년차 이상이 진료를 보러 왔었다.

‘처방전에도 없는 약은 또 어떻게 알고?’

엄호태 자신도 중환자실에서 섬망 환자를 족히 수백 명은 넘게 봤다.

하지만 이렇게 간병인이 몰래 약을 투여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래. VIP 환자가 무사히 퇴원하신다니 다행이긴 한데…….”

엄호태가 무척이나 찝찝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의 경과와는 무관하게 자신에게는 ‘무사’하지 않은 퇴원이었다.

타과 레지던트가 파악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며 이종관 앞에서 스타일을 구긴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 * *

위이이잉.

“네. 정신과 천시현입니다.”

“선생님, 내과 외래인데요. 이종관 교수님이 잠깐 보자고 하셔서요. 시간 괜찮으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이종관 교수로부터의 두 번째 호출이었다.

‘환자분은 퇴원 예정이시고.’

요 며칠 사이 장영순 환자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져 오늘 퇴원 예정이었다.

내과적 상태도 호전되었고 악화 요인도 적절히 제거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무슨 일로 호출하는지는 모르지만, 특별히 나쁜 일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선생님! 교수님 방금 진료 마치셨어요. 바로 들어가세요.”

시현이 도착하자 외래 간호사가 바로 진료실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전보다 더 친절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SORA : 확실히 지난번 방문 때보다 표정이 좋군요.]

시현이 간호사에게 목례한 뒤 진료실로 들어갔다.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이쪽으로 앉게.”

이종관이 밝은 표정으로 자리를 권했다.

“자, 이것도 마시고.”

이종관이 건넨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받으며 시현은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께서 오늘 퇴원하시네. 천 선생도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이종관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간병인이 따로 약을 썼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혹시 심전도에 빈맥이 있었기 때문인가? 그리고 머리를 다치신 건 어떤 뉴롤로직 사인(신경학적 징후)을 체크한 건가?”

“네?”

이종관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 질문들을 쏟아냈다.

‘교수님도 참…….’

그는 뼛속까지 내과 의사였다.

어려웠던 케이스는 진단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리뷰한다. 가족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어머님의 경우에는…….”

힌트는 환자를 처음 본 날 꾼 꿈에서 얻었다.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있던 여배우.

그리고 서두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씻겨나간다고 말하던 여인.

돌이켜보면 그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원인을 발견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리고 헬스장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서혁상의 통화 내용.

‘워시 아웃’을 위해 모든 약을 끊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현듯 환자의 몸에서 점차 배출되어 사라져가는 약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 그게…….”

“그래, 어서 말해보게.”

이종관이 기대에 찬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환자분이 사망할 가능성이 커 보여서 고민하던 차에 기묘한 꿈을 꾸고 알아냈다고 할 수도 없고.

딩동!

[system : 의학정보실에 접속합니다.]

[SORA : 섬망의 원인에 대한 문헌들을 출력합니다.]

‘고마워.’

곤란해하던 차에 원하던 자료가 눈앞에 펼쳐졌다.

“제가 아직 레지던트이고 부족한 점이 많다 보니 우선 교과서와 리뷰 논문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래. 역시 문헌을 찾아봤군! 뭐라 나와 있던가?”

“우선 섬망 치료의 핵심은 원인이 되는 상태를 교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담당의는 내과 검사상 특이 소견이 없다고 했습니다. 감염도 호전 추세였고요.”

이종관이 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교과서에 나온 순서대로 하나하나 배제하고 남은 것들을 살펴보니 알코올이나 약물, 두부 외상 정도가 가능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네, 그래서 약물 검사와 뇌 CT 정도를 찍어보면 좋겠다고 채이진 선생과 상의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시현의 말에 이종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책에 적인 그대로 해봤다, 라…….”

원론적인 수준의 대답이었으나, 의외로 이종관은 인상적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랬군. 예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천 선생 진료하는 걸 보니 나도 느끼는 게 많아. 정말 수고 많았네.”

딩동!

이종관이 시현의 어깨를 두드리자 곧바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N)]

‘왜 이 타이밍에?’

시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알림창의 Y를 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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