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Chapter 35. 당신이 옳다 (1)
딩동!
[system : 신규 아이템이 등재되었습니다.]
[효과를 예측할 수 없는 최고급 포션(SSS)]
‘뭐지?’
시현은 곧장 시스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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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를 예측할 수 없는 최고급 포션]
- 오크통에서 39년(+ 이종관 교수의 집에서 1년 6개월)간 당신을 기다려 온 고오급 위스키입니다.
-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상태 이상을 유발합니다.
- 과도한 사용은 간손상을 유발할 수 있으니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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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of Destiny 39?’
예사롭지 않은 상자에 멋들어진 필기체로 제품명이 쓰여있었다. SSS급이라는 설명이 있기도 했고, 얼른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와! 이거…… 그 킹덤 살루트 아니야?”
“오, 맞는 것 같은데?”
병을 살펴보던 김석용과 황진호의 눈이 커졌다.
“이거 유명한 건가요?”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데, 일단 30년 이상이니 귀한 술인 것 같았다.
“두 분이 드실래요? 저는 술을 잘 몰라서…….”
“정, 정말? 그래도 돼?”
시현의 말에 황진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39년산이라면 혹시… 진호야, 잠깐만.”
입맛을 다시며 상자에서 병을 꺼내던 황진호를 김석용이 만류했다.
“왜요? 선생님! 이거 진짜 비싸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손대기 전에 얼른 마셔야 해요!”
마침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주가들이 많은 곳이 병원인데, 이대로 의국에 뒀다가는 지나던 외과 계열 레지던트들에게 발각되기 딱 좋았다.
당장 내일 아침에 빈 병으로 발견된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비싼 거 알지…… 근데 너무 비싸서 문제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 21년산만 해도 고급인데, 30년산 이상이면 또 다르거든.”
“그렇죠. 저도 실물은 딱 두 번 본 것 같아요.”
한 번은 인턴 때 어떤 교수님 진료실에서. 나머지 한번은 아빠가 애주가인 외할아버지께 선물할 거라고 가져오셨을 때 잠깐.
“아니야. 아마 이건 못 봤을 거야. ‘실수’ 때문에 생긴 한정판이거든.”
“실수요? 그게 무슨…….”
처음 듣는 이야기에 황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이 브랜드는 38년산이 유명해. 출시 초기에도 비쌌는데, 물량이 많지 않아서 지금은 웃돈을 붙여서 거래할 정도니까.”
“그리고 보니 제가 본 것도 그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고작 1년 차이인데…….”
“품질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격을 결정하는 건 희소성이잖아? 38년산을 출하하다가 일부 오크통들이 누락됐다고 해. 의도치 않게 그 이듬해에 제품으로 내게 되었고.”
“오, 실수로 제때 못 나와서 1살 더 먹은 거네요?”
“그런 거지. 작정하고 만든 게 아니다 보니까 국내에도 몇 병 없을 거야. 맛이야 38년 산하고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없어서 못 구하는 물건이지.”
김석용의 설명에 술병에서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와… 이거 못 따겠는데? 아까워서 어떻게 마셔?”
황진호가 아쉬운 듯 술병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런데 이거 팔면 얼마나 받을까요?”
“말 나온 김에 좀 알아보자. 최근 시세가…….”
김석용이 휴대폰을 열어 검색을 시작하자 시현이 웃으며 말했다.
“안 찾아보셔도 돼요. 나중에 좋은 일 있으면 같이 마셔요.”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그럼요. 이종관 교수님께서 특별히 챙겨주신 건데…… 값이 나간다고 내다 팔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시현은 학생 시절부터 봐오던 이종관 교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중독에 늘 환자 진료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었다.
스스로 모르고 있었을 뿐.
가족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그는 오래 잊고 지냈던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산다.
어떤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결코 눈치챌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교수님 마음에 쏙 들었나 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게. 저런 선물을 받을 정도면 뭔가 사연이 있었겠지?”
김석용과 황진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교수님 어머님 협진 본 것 때문에요. 별로 한 일은 없는데…… 어머님이 건강해지셔서 교수님이 기분이 좋으셨던 것 같습니다.”
시현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말하자면 길어지니 자세한 사연은 차차 이야기하기로 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 값나가는 물건인데 우리가 마셔버리면…….”
“비싸 봐야 술이죠. 술은 마시라고 있는 건데 이왕이면 다 같이 마시죠. 대신 병은 제가 보관할게요.”
이번 일을 겪으며 시현 또한 느낀 점이 많았다.
회귀 전과 달리 살아난 환자와 가족을 좀 더 신경쓰기로 한 보호자.
빈 병이라도 남겨두면 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들 터였다.
‘절대 안 팔아야지. 두고두고 떠올릴 수 있게…….’
시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질 무렵, 김석용이 입을 열었다.
“뭐, 우리야 고맙지.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마셔보겠어? 우리 한 달 치 월급하고 맞먹는 술을…….”
‘월급? 그게 무슨…….’
그의 말에 시현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뭐, 지금이야 월급 수준이지만 몇 년 지나면 더 비싸질지도? 소장가치가 더 올라갈 테니까.”
‘정, 정말? 그럼 한 잔 가격이……?’
술 한 병으로 위스키 잔 몇 개를 채울 수 있을지 헤아리자 현기증이 일었다.
한 잔이 레지던트 하루 일당보다 비쌀 것 같았다.
“크. 역시 시현이! 나라면 몰래 감춰두고 혼자서 마셨을 텐데.”
황진호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고.
“그러게 말이다. 시현이는 역시 대인배야.”
김석용이 엄지를 치켜 올렸다.
“이 정도면 의국 회식 한 번 쏜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니냐?”
“그러게요. 회식 두 번도 하겠는데요?”
“…….”
즐거워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시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팔 걸 그랬나?’
* * *
몇 주 뒤.
“회진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해야겠네요.”
이광섭이 평소와 달리 들뜬 얼굴로 레지던트들을 바라보았다.
‘좋은 소식?’
이 무렵이면 특별한 이벤트는 없을 텐데.
그의 표정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4년차 권원주, 하도영 선생님이 전문의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오랜만에 회진에 복귀한 권원주와 하도영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정식 합격자 발표가 나오기까지 며칠이 남아있었고 그들도 합격 소식을 처음 들었다.
가채점 결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듣는 것은 느낌이 또 달랐다.
‘과장님이 학회에 따로 알아보신 건가?’
정신과 학회에서 중임을 맡은 그였다. 합격 여부를 미리 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학회 교육 이사에게 연락이 왔어요. 우리 의국에 경사가 있다고. 축하합니다. 권 선생.”
이광섭이 흐뭇한 미소를 띤 채 권원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합격 축하라면…….”
이변이 없는 한 하도영 또한 합격했을 터.
왜 자신에게만 이런 말을 하는지 권원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광섭이 한마디 보탰다.
“수석합격이랍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2등과 점수차가 상당하다고 하던데. 연초부터 좋은 소식 전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권원주는 믿기지 않는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짝짝짝.
“와아아아! 의국 경사네요!”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모두가 들뜬 얼굴로 박수치며 환호했으나,
‘치프 선생님이…… 수석을?’
오직 한 사람, 시현만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물 정보.’
[SORA : 레지던트 권원주의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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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주 여/29 삼아대병원 정신과 펠로우(진)]
칭호 : 전문의 시험 수석합격자(NEW)
주요 능력치 : 지력 65 -> 75 (NEW) 덕력 55 체력 59 감각 69 행운 52
특기 : 문예 창작(Lv.9) 요리(Lv.7) 킥복싱(Lv.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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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이…… 올랐어?’
원래부터도 모든 능력치가 높았던 권원주였으나, 짧은 기간 동안 지력이 크게 상승했다.
‘랜덤 박스’로 얻은 모든 포인트를 지력에 쏟아부은 시현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 바빠? 잠깐 시간 돼?”
회진을 마치자 권원주가 시현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다른 건 아니고…… 부탁할 게 있어서. 별일 없으면 커피나 한잔하자고.”
시현이 순순히 권원주를 따라나섰다. 따로 보자고 한 이유도 궁금했지만, 능력치를 올린 비결도 묻고 싶었다.
* * *
Cafe Gustav.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음료를 받아든 두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늘 오던 카페였지만, 권원주가 따로 불러 단 둘이 온 적은 없었다.
“수석합격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시현이 뒤늦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는 무슨. 다 같은 전문의지 1등이라고 별거 있나? 실은 나도 놀랐어. 잘 본 것 같기는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그녀 이상으로 놀란 것이 시현이었다.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기 때문.
권원주와 하도영 모두 무난하게 합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의국에서 수석합격자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평생 자랑거리일 것 같은데요?”
“그러려나?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좋은 성적 낸 것 같다.”
“저도 얼른 전문의가 되고 싶네요. 그런데 부탁하실 일이라는 건 뭔가요?”
왜 덕분이라고 하는지 의아했지만, 일단 본론부터 꺼냈다.
“아, 그리고 외래에서 PT(Psychotherapy 정신치료) 의뢰 들어온 환자 한 분 있어서. 천 선생이 해볼래?”
“정신치료 케이스요?”
“이제 3년차도 되고 슬슬 경험도 더 쌓아야 하지 않나?”
정신치료와 약물치료.
정신과 치료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기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터라 레지던트 진료는 약물치료에 치우치기 쉽지만, 정신과 의사를 가장 정신과답게 만드는 부분이 정신치료였다.
전문의 시험에 응시하려면 본인이 직접 치료한 정신치료 증례를 제출해야 할 정도로, 고시위원회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주신다면 감사하지만…….”
권원주가 다른 레지던트에게 정신치료 환자를 의뢰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쉽지 않은 케이스이긴 한데 의외로 천 선생하고 잘 맞을 것 같아서.”
“네, 맡아보겠습니다. 어떤 환자분인가요?”
서류 봉투를 건네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증상이 모호한데다 협조가 잘 안되는 것 같아.”
“치료 동기가 부족한가요?”
“글쎄, 불편한 게 많은 것 같은데 표현을 잘 안 해. 내 능력으로는 치료적인 관계 형성도 어려운 것 같고……. 여러모로 까다로운 환자야.”
예전에는 없었던 일. 새로 만날 환자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명색이 수석합격자 아닌가.
연구는 또 어떻고.
권원주가 전문의 시험 직전까지 쓰던 논문만 해도 몇 달 후면 탑티어 국외 학술지에 실리게 될 예정이다.
“선생님, 솔직히 제가 더 잘 볼 자신이 없습니다. 따로 말씀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