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Chapter 35. 당신이 옳다 (2)
“선생님, 솔직히 제가 더 잘 볼 자신이 없습니다. 따로 말씀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무슨 의도지?’
이미 졸국한 최지훈이야 자기 일 내리려는 의도가 너무 뻔해서 상대하기 쉬웠다면, 권원주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글쎄? 그냥 감이야. 나보다 천 선생이 더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권원주가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넸다.
“타 병원 의무기록하고 심리검사 결과지야. 한번 살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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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진 남/30세 병록번호 :01131102]
주증상 : 침투사고 (“불쾌한 생각이 자꾸 들어요.”)
(Onset : 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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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증…… 인가?’
침투사고는 원치 않는데도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의미했다.
끔찍한 생각, 더러운 생각 그리고 불경스러운 생각.
떨쳐버리려 해도 악착같이 달라붙어 환자를 괴롭히는 증상이었다.
보통 강박증이라고 하면 손을 여러 번 씻거나 반복적으로 확인을 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이렇게 조절할 수 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환자도 종종 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함께 하면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확실히 1, 2년차가 볼 환자는 아니긴 한데.’
차트를 보니 권원주의 의도가 조금 이해되었다.
시현이야 예전 경험이 있으니 1년차 때부터 여러 환자를 닥치는 대로 봐왔지만, 일반적으로 1년차와 2년차 초반까지는 조현병이나 양극성장애 환자를 주로 담당한다.
다른 질환들에 비해 증상은 더 심할 수 있지만, 약물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정신 역동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
“그 봉투에 의무기록하고 면담 버바팀(면담 내용을 타이핑 해서 정리한 것) 넣어뒀어. 한 번 읽어보고 내일 환자분 오는 날이니까 소개해줄게.”
“네, 그럼 기록 리뷰하고 내일 뵙겠습니다.”
“강박증 환자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지? 추천해 줄 책이 몇 권 있는데 그중에서…….”
권원주는 강박증의 인지행동치료에 대한 서적들을 이것저것 일러주었다.
과거에는 무서운 윗년차로만 봤었는데, 지금 보니 꽤 친절한 사람이었다.
‘의학 정보실.’
[SORA : 해당 서적들을 등록 완료하였습니다. 바로 열람 가능합니다.]
시현은 권원주가 추천한 책들을 쭉 살펴봤다.
강박증 환자에 대한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날 정신과 외래 진료실.
“안녕하세요, 정신과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최정진은 처음 만나는 의사가 어색한 듯 눈 마주치기를 힘들어했다.
170cm 남짓 되는 키에 다소 통통한 체격. 둥근 얼굴형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어 전반적으로 유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권원주 선생님 외래에서 진료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따로 정신치료를 해보고 싶은 이유가 있으세요?”
정신치료는 40-50분 정도의 시간을 치료자와 따로 면담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일반적인 외래 진료보다는 훨씬 비싼 치료였다.
약물치료에 더해서 정신치료를 따로 받겠다고 한 데에는 분명 동기가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하라고 해서요.”
“어머니께서요? 최정진 님께서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시현은 최정진의 환자 정보를 다시 살폈다.
환자는 성인이었다. 그것도 나이가 서른이 넘은.
“그럼 어머니께서는 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을까요?”
“뭐, 공무원 시험 오래 붙들고 있으니까 걱정되셔서 그런 거겠죠. 도무지 집중을 하지 못하니까요.”
“그렇군요.”
“공부할 때 있잖아요. 자꾸 딴생각이 나요. 떨쳐버리려고 해도 잘 없어지지도 않고요.”
“원치 않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말씀이시죠?”
강박증 환자들이 호소하는 침투사고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불쾌감을 유발하는 특징이 있다.
잠시 떠오르다 말면 다행인데, 마치 후크송 멜로디가 맴돌 듯 반복적으로 떠올라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오죽하면 수능 금지곡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생각이 파고들 듯 들어오니 취준생에게는 최악의 증상이었다.
“어떤 생각이 자꾸 드세요?”
“…….”
시현의 물음에 최정진은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재촉하기보다는 생각할 시간을 주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환자 파악을 좀 더 하면서.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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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진 남/30]
9급 일반행정 공시생
주요 능력치 : 지력 35 덕력 34 체력 25 감각 70 행운 11
특기 : ???(Lv. 9 MAX), 전략시뮬레이션게임(Lv. 8), 인터넷방송(Lv.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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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감각에 낮은 행운…….’
환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지만, 그동안 면담했던 내용을 숙지하고 들어온 터라 ‘인물 정보’는 볼 수 있었다.
‘레벨이 9인 특기가 물음표라…….’
숙련도가 최대치인데 뭔지 모를 수도 있나?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SORA :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나, 고도로 억압되어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억압(Repression).
충동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나 욕구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눌러놓는 방어기제였다.
‘도대체 뭐길래 의식하지도 못하는 걸까?’
억압은 어디까지나 무의식의 영역. 환자 스스로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환자의 사정이 궁금해질 무렵 또 다른 특기가 눈에 들어왔다.
‘……전략시뮬레이션게임?’
스x크래프트?
레벨 8 또한 흔치 않은 숙련도인데, 꽤나 게임을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말하기가 꺼려지는 모양이네.’
‘인물 정보’를 보며 한참 기다렸으나 환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박증 환자의 침투사고에는 황당한 내용이 많다.
이런 내용을 말했다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두려워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환자들도 종종 있었다.
“괜찮습니다.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은 원래가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아요.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니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시현은 일단 환자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스킬 사용.’
[SORA : 스킬 ‘뭐가 문제야 say something’을 사용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환자는 약간 편안한 표정이었다.
“…….”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면담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환자는 증상 말하기를 여전히 꺼렸다.
‘이 사람 뭐지?’
[system : 스킬 발동에 실패하였습니다.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다음 순간 떠오른 알림창에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환자에게는 스킬도 통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스킬 설명서.’
[SORA : 스킬 설명서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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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문제야 say something (액티브 스킬)]
- 방어적인 환자의 표현을 촉진합니다.
- 치료적 관계를 형성하면 자동 활성화됩니다.
-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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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의 핵심은 표현을 촉진하는 것이지 환자의 자율의지에 반해 뭔가를 강제로 말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숙련도 문제인가?’
아직 스킬 사용 경험이 충분치 않아서 일 수도 있다.
어머니 권유라고는 해도 외래 진료에 추가로 정신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면, 치료 동기도 있을 것이고 치료를 통해 나아졌으면 하는 증상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일단은 그 부분을 알아보기로 했다.
환자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카이트만의 안경.’
[SORA : ‘카이트만의 안경’을 사용합니다.]
“말하기가 어려운 내용인가 봅니다. 정신치료 하기기로 권원주 선생님과 상의하셨다고 들었는데, 특별히 바라시는 목표가 있나요?”
“목표라면…… 생각이 떠오르는 게 줄어드는 거죠.”
[system : 최정진 환자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증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니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생각이 줄어들면 어떤 걸 해보고 싶으세요.”
“공부죠. 당장 4, 6월에 시험이 있어요. 공무원이 되고 싶어요.”
[system : 최정진 환자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응?’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은 공시생이라니.
이상해도 뭔가 한참 이상하다.
‘공무원 말고 다른 쪽을 원하는 건가?’
“공무원 시험 준비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백수였죠. 한심했어요.”
최정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공부라도 해야죠.”
게임과 인터넷 방송이 특기인 사람이 국어, 영어, 한국사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답답함이 느껴졌다.
“마냥 허송세월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따로 준비하던 게 있으셨나요?”
“그렇게 보이나요? 사실 제가 프로게이머 준비를 좀 했었습니다. 우주전쟁 2라고……. 결국 잘 안됐죠.”
우주전쟁 2.
공전의 히트를 친 우주전쟁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인간과 외계인 그리고 괴생물체간의 싸움을 그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꽤 재밌게 했었는데.’
과거 시현도 종종 즐겨했던 게임. 전략시뮬레이션게임 Lv.8 라면 아마추어 사이에서는 유명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아, 그 게임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주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잘 만든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현이 호응해 주자 최정진이 돌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신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죠? 크으으! 역시 선생님이 뭘 좀 아시네요. 사실 그 게임이 ‘전설의 레전드’보다 인기가 좀 없어서 그렇지 정말 갓겜이거든요.”
“네…….”
“실례지만 선생님은 티어가 어떻게 되세요?”
“네? 저요? 저는 그렇게 잘하지는 못해서…… 그래도 다이아까지는 가봤습니다.”
“오, 그 정도면 잘하는 거죠! 의사 선생님들은 바쁠 텐데 그 정도면…… 나중에 연습 조금 더 하시면 마스터는 가시겠네요. 저는 그랜드마스터 7위가 최고기록입니다. 하하하!”
“아, 정말요?”
그랜드마스터면 플레이어 중 상위 200명.
거기서 10위 안에 들었을 정도니 실력은 프로게이머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휴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이구형 선수하고 김중엽 선수만 안 만났어도……. 운도 지지리도 없지.”
들뜬 표정으로 게임 이야기를 하던 최정진은 돌연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이구형에 김중엽이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는 유명 게이머들이었다. 그런 상대를 만났다면 누구라도 본선 진출은 쉽지 않았을 터.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출전했지만,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프로게이머들이 번번이 그의 데뷔를 가로막았다.
그것도 본선 진출까지 딱 한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대진운이 정말 안 좋았구나.’
[행운 11]
새삼 환자의 정보창에서 본 낮은 행운이 떠올랐다.
“둘 다 우승자 출신 아닙니까? 정말 단단하게 잘하는 선수들인데……. 너무 아쉬우셨겠습니다.”
“그렇죠? 제가 한 경기는 잡았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그만…… 아직도 그 장면이 꿈에 나옵니다.”
‘높은 감각…….’
비록 한 경기지만 그 유명한 프로게이머를 잡았다니 최정진의 재능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프로 데뷔는 또 딴 세상이더라고요.”
어느새 최정진은 묻지 않아도 자기 이야기를 술술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안타깝게 졌던 경기 이야기부터 꿈을 접고 부모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된 과정까지.
언제까지고 부모님에게 얹혀살 수는 없으니 일을 해야겠지만 프로게이머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는다고 했다.
“그런데 게임에도 집중력은 많이 필요할 텐데요. 그때는 그 원치 않는 생각이란 게 안 떠오르셨어요?”
“네? 그러고 보니 게임 할 때는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공부만 붙들면 더 들어요.”
일반적으로 침투사고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더 심해진다.
그의 경우엔 공무원 시험이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다.
“저는 관운(官運)이라는 게 정말 없는 건지…….”
커트라인에서 딱 한 문제가 모자라 떨어진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고 했다.
책을 펼칠 때마다 증상이 나빠졌고,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집중을 못 하다 보니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공부 때문에 우울하고, 우울하니 공부가 안되는.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악순환에 갇혀있었다.
‘이분은 어떻게 해야…….’
똑똑.
그의 사정을 듣고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진료실 문을 열고 불쑥 들어왔다.
“면담 중입니다. 외래 진료는 옆 방으로…….”
백발이 무성한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환자였다.
진료실을 헛갈려 잘못 들어온 환자겠거니 해서 다른 진료실을 안내하려는데, 최정진이 입을 열었다.
“엄마? 여긴 왜……?”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정진이 엄마 되는 사람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