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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의사 시점-163화 (163/195)

163화 Chapter 35. 당신이 옳다 (4)

“물론 그렇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 ‘좋은 선생님’이 있었다던가?”

‘좋은 선생님…….’

그녀로서는 회귀 전과 지금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겠지만, 여느 해와 무엇이 달랐는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확실히 1, 2년차들의 역량이 높아진 건 시현이 신경 쓴 덕분이었다.

“병원 생활하면서 서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잖아?”

“그렇죠. 아랫년차에게도 그렇고 심지어 인턴에게도요. 모두가 한 사람의 의사니까요.”

“그렇지. 존중의 의미도 있고, 결국 같이 일하고 서로 배워야 하는 관계라서 그렇기도 하지. 그런 면에서 의학이라는 건……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해.”

그 말에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치기 위한…… 공부를 하셨던 거군요.”

“맞아. 바로 그거야.”

무언가를 잘 이해하기 위해 남을 가르쳐보라는 말을 종종 한다.

객관식 문제를 풀 정도의 지식을 익히는 것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은 엄연히 다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준비.

이것이 전문의 시험 수석 합격자의 비결이었다.

“역시 전국 1등은 다르네요. 오늘도 많이 배웠습니다.”

“아니야.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어. 최정진 환자 잘 부탁해.”

“네, 그런데 혹시 환자 보호자하고는 무슨 일 있으셨나요?”

모처럼 훈훈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시현이 물었다.

평소 권원주가 환자 보는 걸 생각하면, 신뢰가 안 간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환자 어머니와 의견도 비슷했다.

시현은 환자가 보호자로부터 독립하고 자기 꿈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반면, 권원주는 환자가 ‘애매한 재능’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적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있었다.

“글쎄. 별일은 없었는데 라포(치료적 관계) 형성이 잘 안되더라고.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그게 뭔가요?”

“보호자가 아무래도 젊은 여자 의사를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아. 좀 나이 있어 보이는 남자 레지던트만 좋아하는 어르신들 계시잖아?”

“그렇긴 하죠. 그럼 혹시 환자 소개해 주신 게 제가 나이 들어 보여……서?”

“에이, 그게 무슨 말이야? 평소에 천 선생이 환자 열심히 봐서 믿고 맡기는 거지. 그런 거 아니야.”

[system : 레지던트 권원주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종종 있는 일이긴 했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와서 나이가 좀 있다는 이유로 3년차보다 1년차를 더 신뢰하는 보호자들도 있었으니까.

“뭐, 아쉽지만 어쩌겠어? 다 자기한테 맞는 의사가 있는 거지. 사실 내가 좀 동안이긴 하잖아? 절대 30대로는 안 보였을 거야? 그치?”

“물, 물론입니다. 선생님.”

“그렇지? 역시, 우리 천 선생이 보는 눈이 있어. 하하하.”

실없는 농담도 건네고 확실히 회귀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 방금은 농담 아니었나?

아무튼.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이 마지막 진료구나. 레지던트로서는.”

그렇게 말하며 권원주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오늘은 4년차들의 정식 근무 마지막 날이었다.

인턴 그리고 레지던트.

지난 5년을 뒤로하고, 병원을 떠날 시간…….

이라고 하기에는 펠로우로 명찰만 바꿔 다시 돌아올 예정이지만,

이제 한 사람의 전문의가 된다는 감회만큼은 남다를 터였다.

“‘입퇴국식’ 때 보자.”

“네, 선생님.”

“올해는 평소랑 좀 다르게 할 것 같던데. 들은 거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르다니? 뭐가?

처음 듣는 말에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기억하는 올해 입퇴국식은 여느 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마 과장님이 따로 말씀하실 거야.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입퇴국식 관련해서 달라진 게 뭔지 궁금할 사이 권원주가 말을 이었다.

“벌써 걱정이네……. 졸국해 봐야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 같기도 하고……. 어쩌면 1, 2년차 때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지.”

더 힘들다고?

펠로우 업무도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지만,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주니어 레지던트에 비하면 편한 게 사실인데.

“석용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흥미로운 주제 찾아서 열심히 하는 게 그렇게 부럽더라. 나도 열심히 해보려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최지훈 선생님한테 배운 것보다 후배들 보면서 느낀 게 더 많았지. 그래서 앞으로 정말 제대로 해볼 생각이야. 연구도 그렇고, 특히 레지던트 교육도.”

권원주는 의욕에 찬 표정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레지던트…… 교육요?”

“응. 환자만 보고 공부를 안 하면 반쪽짜리 수련 아닌가? 틈틈이 환자도 봐줄 거고 논문도 많이 읽힐 거야. 북리딩도 따로 하고……. 그럼 실력이 쑥쑥 늘겠지?”

“…….”

“왜 무슨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무섭게.’

원래도 열심히 했던 사람이 전문의 자격까지 갖추고 ‘제대로’ 하면 어떻게 될지.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파고들 무렵,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천사와 악마 – 본 전임의는 레지던트 여러분이 하기에 따라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아무튼 열심히 해봅시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P)]

‘새로 들어올 1년차들한테 좀 미안한데…….’

시현이야 회귀 전 경험도 있고 ‘의학정보실’에서 최신 지견을 수시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이제 막 레지던트를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었다.

“물론 공부야 많이 할수록 좋은 거지만, 지금도 충분히 바쁘고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너무 몰아붙이는 건…….”

후배들의 안위를 걱정한 시현이 뭔가 말해보려는데, 추가 알림창이 슬며시 올라왔다.

[SORA : 업적 달성 리마인더를 출력합니다.]

‘업적… 리마인더?’

[SORA : 기존 달성 업적 중 누적 효과가 있는 업적 목록입니다.]

딩동!

뒤이은 알림음과 함께 시현의 눈이 커졌다.

“몰아붙이는 건……? 애들이 싫어하려나?”

시현이라면 자기 뜻을 충분히 알아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미지근한 반응에 권원주가 조금 실망한 듯 되물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적당한 압박이 있어야 학습 효율이 상승한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지? 괜찮겠지?”

“그럼요! 연구 참여하게 해달라고 손드는 애들인데요. 지금이야 조금… 아주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나중엔 다들 펠로우 선생님이 신경 써주셔서 고맙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제야 권원주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래. 좋은 의사 만들어준다는데,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물론입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시현 또한 그런 그녀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미안하다. 얘들아.’

의국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흘러가는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시현은 알림창을 닫았다.

[너로 정했다! - 역량있는 레지던트 선발로 입원환자에게 양질의 진료를 제공합니다. 후배 레지던트가 환자 치료에 성공할 경우 사용자에게도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1,000 ~ 3,000P/ 명)]

* * *

어느덧 2월 말.

“올해는 무슨 일이래요? 입퇴국식 장소가…… 여기 맞아요?”

“그러게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또 처음이네.”

호텔 1층 로비에 들어선 수간호사와 이선지 간호사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게 다 뭐야…….’

지하를 향하는 웅장한 계단이 내려다보이며, 로비 중앙에는 금속 장식품으로 치장된 분수대에서 맑은 물이 샘솟듯 뿜어져 나왔다.

거기에 아름다운 실내 정원까지.

평소 여행을 좋아했던 터라 국내외 여러 호텔을 가봤지만 이렇게 웅장하면서도 럭셔리한 느낌을 주는 곳은 처음이었다.

평소 입퇴국식은 적당히 넓은 식당에서 정신과 식구들끼리 모여서 졸국하는 사람들 축하하고 입국하는 사람들 환영하는 그런 자리였는데…….

오늘은 왠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기분마저 들었다.

[삼아대병원 정신과 컨퍼런스 그랜드볼룸]

“우리 과 행사는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컨퍼런스였어요? 회식이 아니고?”

“글쎄. 일단 가보자.”

우려와는 달리 안내판을 따라 들어간 곳에는 늘 보던 얼굴들이 그녀들을 맞아주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시현쌤, 오늘 너무 멋있는데요?”

이선지가 감탄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3년차 시작하는 날이라 특별히 입고 왔죠.”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정장을 입은 그는 평소보다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선생님들도 오늘은 뭔가 달라 보이시는데요?”

“그렇죠? 내가 맨날 수간호사 가운만 입어서 그렇지 밖에서 보면 한 10년 젊어 보인다니까?”

시현의 말에 수간호사가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어휴, 10년뿐이겠습니까? 병원 밖에서 뵈니까 더 좋네요! 어서들 앉으세요.”

병동 간호사들은 이내 자리를 잡고 들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저거 얼음 조각상이야?”

“오, 3단 케이크까지?”

“이게 연회야 학회야?”

널찍한 방에 원형 테이블이 즐비했고,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기가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다.

“삼아호텔이 좋긴 좋네요. 그런데 여기 엄청 비쌀 텐데…… 이런데 한 번 빌리면 1년 내내 회식 못 하는 거 아녜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신과 과장 이광섭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가와 수간호사에게 말했다.

그 또한 시현과 마찬가지로 잔뜩 격식을 차린 옷차림이었다.

“삼아그룹 계열사 혜택도 있고 지원도 많이 받았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드세요. 오늘 좋은 날이니까요.”

“계열사 혜택이면…… 그거 복권 당첨만큼 힘든 거 아니에요?”

수간호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삼아호텔에서 계열사 행사에 연회장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혜택이었다.

공간은 한정되어있고 원하는 곳은 워낙 많았기 때문.

특히나 주말 저녁 행사는 몇 년 치 예약이 꽉 차 있을 정도였다.

병원 생활을 20년 넘게 해왔지만, 삼아호텔을 빌려 입퇴국식을 했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전자’에서 예약 도와줬어요.”

“전자라면…… 삼아전자요?”

“네, 워낙 회사가 크니까 전자 몫으로 상시 배정된 자리가 좀 있었나 봐요. 그쪽 전무님이 신경 써주셨습니다.”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그쪽에서 우리 과에 왜?”

“같이하는 프로젝트가 있거든요. 혹시 모르죠. 그것만 잘 되면 매년 여기서 입퇴국식을 할 수 있을지도요.”

이광섭이 연회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삼아전자 쪽 사람들과 타 병원 교수들, 그리고 제약회사 직원들까지.

곳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평소 입퇴국식과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던 이광섭의 시선이 마침내 시현을 향했다.

“곧 시작할 시간인데, 천 선생도 슬슬 준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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