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Chapter 35. 당신이 옳다 (5)
* * *
“곧 시작할 시간인데, 천 선생도 슬슬 준비하지.”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던 이광섭의 시선이 마침내 시현을 향했다.
“네, 과장님.”
- 이번 입퇴국식은 최근에 우리 과에서 다루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해서 컨퍼런스 형식으로 진행해볼까 해. 천 선생도 발표 하나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시현은 몇 주 전 그가 자신을 따로 불러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살 위험도 예측 모델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하셨지.’
원래대로라면 IRB 심사도 통과하지 못하고 사장되었을 연구. 삼아전자 측의 도움으로 연구 계획서를 통과시킨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니만큼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시현에게는 꼭 성공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3년차 레지던트가 되면서 불안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
지금까지는 예전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로 환자들을 잘 치료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점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차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도무지 원리를 알 수 없는 능력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회귀 후 생긴 능력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사의 역량은 중요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지난 2년간 시현이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회귀 전이었다면 살리지 못했을 환자들이 목숨을 건지고, 결정적으로 그의 친구 최만기가 살아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정보와 시스템의 도움 없이, 오로지 한 사람의 정신과 의사로서의 역량만으로…….
자신이 없었다.
막연한 불안에 시달릴 바에야 지금부터 준비해야 했다.
모든 이점이 사라진 뒤에도 누군가에게 좋은 의사로 남을 수 있도록.
AI 연구는 그 시작점이 될 터였다.
* * *
“이광섭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시현이 발표 슬라이드를 최종 점검하러 간 사이, 누군가 이광섭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이 과장님이 초대하셨는데 와봐야지요.”
한국대병원의 정신과 교수, 김상진이 연회장을 쑥 둘러보며 말했다.
“삼아대 정신과 자체 행사인데, 대신정(대한신경정신의학회) 학회보다 더 성대한 것 같습니다. 요즘 하시는 연구가 좀 잘 되고 있나 봅니다?”
감탄한 듯하면서도 비꼬는 말투에 이광섭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시작단계일 뿐입니다. 삼아대 병원 단독으로 하기보다는 멀티 센터 연구를 계획하고 있던 터라 여러 교수님들 고견도 들을 겸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웃는 낯으로 맞기는 했으나, 내심 달갑지 않은 방문이었다.
대규모 연구인지라 대상자가 많이 필요했고, 평소 이 분야에 관심 있는 교수들의 참여를 요청하려 초대장을 보냈을 뿐인데, 뜻밖에도 김상진이 직접 찾아왔다.
‘오늘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고…….’
학회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인물이 아니던가.
되지도 않은 편 가르기로 학회 분위기를 망치는 주범이었는데, 동문 수가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대 출신이라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멀티 센터 연구 협력이라…… 가뜩이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인데, 지금 저희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만으로도 벅차서 말입니다.”
김상진이 거들먹거리며 선을 그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별다른 이득이 되지 않을 연구였다.
공동 연구라고는 해도 결국 1 저자와 교신저자는 삼아대 쪽에서 가져가게 될 터.
그럼에도 굳이 시간을 내서 참석한 것은 견제를 하기 위함이었다.
‘보나 마나 별 볼일 없는 연구겠지만…….’
혹여 연구가 잘 되면 학회 내에서 이광섭의 입지가 높아질 수도 있었다.
교수들 사이에서 잘 쓴 논문 한 편은 권력이 되기도 하니까.
“메일로 주신 자료는 확인했습니다. 신약 약물 연구 피험자 모집 건하고, 자살 사고가 있는 환자들 차트가 대량으로 필요하시다고……. 우리 이 과장님께서 일을 너무 크게 벌이시는 거 아닙니까? 허허허.”
명성대병원 정신과 과장, 유정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김상진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그의 옆에서 알랑거리는 꼴이 상당히 밉상인 인물이었다.
“보아하니 삼아전자하고 연구하시는 것 같던데…… 제가 해외 연수 때 비슷한 거 해봐서 아주 잘 압니다. 돈은 엄청나게 썼는데, 다 실패했어요.”
짐짓 걱정해주는 듯하면서도 비웃는 태도였다.
두 사람 모두 국내 수위를 다투는 대학병원의 정신과 교수들.
‘딱 봐도 별거 없을 것 같은데 뭘 또 해보겠다고…….’
‘혼자서는 감당 못 할 것 같으니까 도움 청하려고 부른 거 같은데?’
삼아대병원 정신과에서 진행하는 연구에 대한 생각이 놀랍도록 비슷했다.
“뭐, 요즘 AI 연구가 유행하니까 삼아전자에서 어떻게든 정신과랑 엮어서 해보려는 것 같은데, 막상 고생만 하고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경우가 많으니 과장님께서 신중하게…….”
김상진이 한마디 더 보태려는데, 이광섭이 입을 열었다.
“아,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 반대입니다.”
“네? 그게 무슨…….”
“약물 연구와 AI 연구 모두 저희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삼아 전자에서는 기술적인 부분을 지원할 예정이고요.”
“삼아대에서… 주도한다고요?”
김상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네, 우리 레지던트 선생들이 앞장서서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레지던트들이요?”
이번에는 유정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럴 리가.’
무릇 레지던트라고 하면 어떻게든 일을 줄이려 하는 친구들 아닌가.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앞장서서 일을 늘린다니.
그 또한 교수로서 수십 년간 많은 레지던트들을 만났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 우리 애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 잘하던데요? 대학도 알아서 잘 가고요.
마치 자식 자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옆집 여사님을 보는 기분이었다.
“작년에 열심히 해도 잘 낫지 않는 까다로운 환자들이 몇 있었는데, 임상 단계에 있는 신약으로 잘 치료하더니 그 후로는 연구에 대한 관심을 많이 보이더군요.”
이광섭은 연회장 곳곳에 있는 레지던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마지막으로 시현을 향했다.
“오늘 발표도 저 친구들이 주도적으로 하게 될 겁니다.”
“발표를…… 레지던트들이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삼아전자, 리서치센터, 제약회사 그리고 타 병원 교수들까지 초대한 자리에서 교수가 아닌 레지던트가 행사를 진행한다고?
“우리도 저만한 때가 있었겠지요? 바쁘고 피곤에 찌들어 있었지만, 몸은 젊었고 정말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이…….”
이광섭이 옛 열정을 되찾은 듯 눈을 빛냈고 두 사람은 의아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평소 이광섭을 생각해보면, 환자 치료는 열심히 하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은 크지 않았다.
불안장애 분야에서 혁신적인 인지행동 치료 프로그램들을 여럿 개발해냈음에도 상대적으로 논문 수가 적었다.
진료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논문으로 주니어 교수와 레지던트들을 닥달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도 한몫했다.
‘그 욕심 없던 사람이…… 왜?’
원래가 의욕적이던 사람도 중년에 접어들면 느긋해지기 마련인데, 이광섭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저 친구들 보면서 요즘 느끼는 게 많습니다. 스승으로서 그리고 과장으로서 최대한 지원해주고 싶은 생각입니다. 자리해주신 여러 교수님께도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의 이광섭과는 달리 김상진과 유정민은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일단 초대를 받은 터라 오긴 왔는데, 고작 레지던트 발표라니.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도 진행 중인 것들이 많다 보니…….”
“그래도 전에 비슷한 연구를 해본 적이 있으니 레지던트 선생들 발표하는 것 보고 코멘트는 하겠습니다.”
이들과 이야기할수록 이광섭은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바로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 * *
“과장님, 행사 시작할 시간입니다.”
발표 전 점검을 마친 시현이 이광섭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system : ‘시청타촉의 포션’ 효과가 곧 종료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발표 관련해서 사전에 몇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아직 몇 분 여유가 있었지만, 그는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양 말했다.
그의 시선이 김상진과 유정민 쪽을 향했다.
‘어차피 도움이 안 될 사람들인데…….’
이광섭 또한 당연히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부탁하는 건 조금이나마 연구를 지원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일 터였다.
“천 선생, 잠깐만. 인사드리게. 한국대 김상진 교수님 그리고 명성대 유정민 교수님.”
불편한 상황인 만큼 이내 자리를 뜨리라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이광섭은 시현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3년차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아! 예전에 한국대에서 PGR 했을 때 봤던 선생님이로구먼! 그때 코멘트 참 인상적이었어!”
뜻밖에도 유정민이 시현을 알아보았다.
‘인상적’이라는 말에 옆에 있던 김상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인상적?’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유정민이 순간 움찔했다.
새로 도입한 연구 장비도 자랑할 겸 도박중독 케이스를 골랐는데, 시현이 파킨슨병 약물을 지적한 덕분에 단단히 망신을 당했다.
어디 그뿐인가? 조현병이 의심되어 한국대에서 정신감정을 했던 조동규도 시현의 증언 때문에 감형을 받는 데 실패했다.
흉악범이 제 죗값을 다 받게 된 점은 다행이었지만, 한국대에서 놓친 것을 타 병원 의사가, 그것도 일개 레지던트가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레지던트 주제에… 건방진 녀석 같으니.’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천시현 선생.”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죠. 듣자 하니 삼아대병원 전공의 선생님들이 그렇게 연구를 열심히 한다던데.”
그렇게 말하며 김상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다 과장님께서 지원해주신 덕분입니다. 오늘 자리도 마련해주시고…….”
시현이 이광섭에게 공을 돌리며 적당히 빠지려는데, 그가 의외의 말을 건넸다.
“워낙 ‘똑똑’해서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하지만, 연구 진행하다 보면 천 선생이 깨닫는 것도 많이 있을 겁니다.”
“깨닫는 거라면 무슨?”
“이를테면, 연구는 절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과…… 언제 어떻게 도움을 주고받을 사이가 될지 모르니 평소에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정도 아닐까요? 튀어봐야 좋을 것 없는데. 안 그렇습니까? 허허허.”
그 말에 이광섭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간의 사정은 모두 알고 있었다.
평소 결코 화내는 법이 없던 그였지만, 제자를 비아냥거리는 사람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김상진 교수님, 말씀이 좀 지나…….”
이광섭이 그에게 한마디 하려는 찰나, 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교수님.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되려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제자의 모습에, 이광섭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눌렀다.
그러나 시현의 다음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그 말씀은…… 한국대는 이번 다기관 연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
김상진과 유정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크흡. 선생이 아직 레지던트라 잘 모르나 본데, 이런 연구 진행하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에요. 아까 과장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임상 연구도 그렇고 AI 연구도 인력이 워낙 많이 필요합니다. 이런 건 학회 차원에서 접근해야…….”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시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처 그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다른’ 연구 주제로 상의드리겠습니다.”
‘괜히 불렀나.’
연구 실무를 담당할 레지던트가 시현인지라 미리 인사시킬 생각이었는데, 되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그럼에도 왠지 후련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사 마치고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바쁜 시간을 내서 참석해준 사람들.
이광섭은 그들에게 사의를 표한 뒤, 연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희도 가죠.”
“그래, 얼마나 잘 준비해 왔는지 한번 보자고.”
이광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은 다른 대학 교수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