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Chapter 35. 당신이 옳다 (6)
* * *
“여러분, 반갑습니다.”
연단에 오른 이광섭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삼아대병원 정신과 과장으로서, 그리고 학회 임원으로서 연단에 수도 없이 올라와 봤지만, 오늘은 특히 긴장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컨퍼런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짝짝짝.
그의 말에 곳곳에서 힘찬 박수 소리가 쏟아졌지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삼아대 돈 많~네. 딱 봐도 별것도 아닌 연구일 건데…… 이런 자리까지 잡고.”
“그러게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도를 하는 건지?”
“허허허. 그러지들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네? 긍정적이라니… 그게 무슨?”
“여기 음식이 그렇게 괜찮다는데……. 그냥 식사 한 끼 맛있게 먹고 간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들을 애써 외면하며, 이광섭은 행사를 진행해 나갔다.
“오늘 컨퍼런스는 총 3개 세션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난 2년간 우리 과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보고 자리가 될 것이고, 앞으로 계획에 대해…….”
연단 아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석용이 덩달아 가슴을 졸였다.
“어째 오늘 분위기 좀 쎄하지 않냐?”
“어쩔 수 없죠. 누구 하나 잘 나가는 꼴 절대 못 보는 사람들인데.”
“으으……. 뭐라고 시비를 걸지 벌써 긴장이네.”
“내용 좋던데요? 준비한 내용 그대로만 하셔도 문제없을 것 같아요.”
걱정하는 김석용을 향해 시현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말했다.
“솔직히 교수라고 해봐야, 저 중에 이 약 처방해본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상에서 이 약물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선생님일걸요?”
딩동!
[system : 스킬 ‘당신이 옳다’를 사용했습니다.]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즉각 경감 하는 스킬.
동시에 김석용의 표정이 한껏 차분해졌다.
“그, 그렇겠지?”
“그럼요!”
시현이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네 담당 환자잖아. 세상에서 그 환자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너라고! 절대 쫄지 말고 밀어붙여!
언젠가 환자 증례 발표를 준비하던 때였던 것 같다.
유독 진단이 어려웠던 케이스.
골머리를 싸매던 시현에게, 김석용이 해줬던 말이었다.
아무리 유능한 정신과 의사라고 해도 환자의 모든 면을 알 수는 없다.
환자가 살아온 수십 년의 시간을 그 경험을, 짧은 면담으로 이해하기란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내 환자니까 남들보다는 조금은 더 안다는 것.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나보다 환자의 심정을 더 잘 아는 의사는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마음이 한없이 편해졌었다.
“아무거나 말해도 뭐라 할 사람 없어요.”
“하하.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지금의 김석용은 모르겠지만, 분명 예전 그가 해주었던 말…….
그 격려의 말을 되돌려주는 기분이 묘했다.
“첫 번째 주제는 글루타메이트 조절을 통한 자살 고위험군 치료에 관한 내용으로, 발표는 김석용 선생님이 맡아서 해주시겠습니다.”
이광섭의 소개에 그는 성큼성큼 연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아대병원 정신과 4년차, 김석용입니다. 이번 세션에서는 자살 사고가 심한 급성기 환자를 대상으로 한 약물 연구입니다.”
연회장 곳곳에 걸린 스크린에 삼아대병원 정신과에서 연구하고 있는 약물, SPN-1001이 떠올랐다.
‘레지던트라고?’
이만한 행사면 교수가 직접 발표하기 마련인데, 뜻밖의 발표자에 청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선 SPN-1001에 좋은 반응을 보였던 환자 증례를 소개할까 합니다. 52세 여자환자분으로 2년 전부터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이 있었고 자살사고가 악화되어 방문하신 분으로…….”
그러나 금세 슬라이드로 집중된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지금껏 시도된 적이 없던 약물이기도 했고,
이제 치프가 된 김석용의 증례 발표도 환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기존 항우울제와 다른 치료로는 반응이 충분하지 않아 임상 시험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SPN-1001은 기존 제제와는 달리 경구 투여가 아닌 비강 내 스프레이로 전달…….”
아직은 예비연구 단계라 앞으로 더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신약을 소개하는 그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치료 후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환자 상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환자는 퇴원 후 외래에서 통원치료 유지 중이며 현재까지 안정적인 상태입니다.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에 작용하여 빠른 효과를 냈던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고 앞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
“인상적인 발표 잘 들었습니다. 혹시 참석해주신 선생님들 가운데 질문 있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짧은 박수갈채가 끝나고, 이광섭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김석용이 예상보다 훨씬 잘해준 덕분에 그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질문…… 없으십니까?”
그렇게 20초, 30초가 흘렀지만,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광섭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관심을 끌 내용인데…….’
고위험군 환자를 대상으로 한 완전히 새로운 약물이었고, 치료 효과도 나쁘지 않게 나왔는데, 이런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삼아전자 측 사람들이야 약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딱히 물어볼 게 없다고 하더라도,
이 자리에 초대받은 임상 의사들로부터 질문이 나오지 않는 건 이상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이광섭이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신약이고 아직 사용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질문할 내용이 마땅치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질문이 없으시다면 이번 주제에 대해 코멘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떤 의견이든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살 사고가 심한 환자 치료는 매우 까다롭다.
그 까다로운 환자를 치료할 새로운 무기가 하나 생긴 셈이니, 필시 기대감에 대한 언급은 있으리라.
그렇게 다시 좌중을 둘러보던 이광섭의 시선이 손을 든 누군가를 향했다.
“네, 유정민 교수님.”
행사 진행 요원이 그에게 마이크를 건네자 유정민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일단 시도는 좋은 것 같습니다. 시도는 좋은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구 대상을 자살 고위험군 환자로 하는 부분이 연구를 수행하는 의료진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지 않을까…… 그 점이 심히 걱정됩니다.”
“의료진에게 어떤 부담이 있다는 말씀이신지?”
“가뜩이나 자살 위험도가 높은 환자들인데, 약물치료 중에 사망 사고라도 나면 어떡합니까? 유족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일찌감치 리서치 미팅에서도 언급되었던 내용.
그의 말에 주변에 앉아있던 몇몇 교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우울제 사용이 일부 환자들에게는 오히려 자살 충동을 증가시킨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이 약에서도 그런 부작용이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자살 위험도가 높은 환자들인데 말입니다.”
대상자 선정에 문제를 제기했고,
“맞습니다. 그리고 코로 약을 투여한다는 게…… 아직 검증된 방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익숙한 알약이 낫지 싶은데요.”
투여 방법을 지적했으며,
“글루타메이트…… 이게 또 이론적으로는 세포 독성을 줄 수가 있고, 기억 상실을 유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분명한 부작용을 걸고 넘어졌다.
‘이게 아닌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려 섞인 코멘트가 쏟아지자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말씀하신 부작용은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분간은 폐쇄병동에 입원 중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할 예정이라, 우려하시는 그런 사고는 없을 겁니다.”
김석용이 상황을 설명했지만, 교수들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피험자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앞으로는 모르는 거죠.”
“잠깐만. 어차피 폐쇄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이면 이미 자살 시도로부터 안전한 거 아닌가? 굳이 그렇게 치료할 이유가?”
“괜한 위험 감수하느니 그냥 하던 대로 치료해도 될 것 같은데……. 이 약이 시장성이 있다고 보세요?”
웅성웅성.
SPN-1001을 개발한 제약회사 측 연구원들마저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별다른 부작용은 관찰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정신과 권위자들의 의견이 부정적인 만큼, 향후 연구 진행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여러 교수님 의견 참고하여 연구에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이광섭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김석용을 바라보았다.
연구 자체는 누가 봐도 흠잡을 곳이 없었는데, 괜한 어른들의 정치 싸움에 혹평을 받은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다른 질문이나 코멘트 없으시면 바로 다음 주제로…….”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발표로 넘어가려는데,
“발표자에게 질문 있습니다.”
누군가 뒤늦게 든 손에 김석용의 눈이 커졌다.
“네, 말씀하십시오.”
그 말에 연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김석용 선생님이라고 했던가요? 삼아대 치프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까 발표했던 환자 말입니다. 입원한 지는 얼마나 됐나요? 정말 충분히 치료한 게 맞습니까?
줄곧 테이블에 앉아 빈정대던 김상진 교수였다.
“오늘로 입원 딱 두 달째입니다. 그동안 했던 치료는…….”
“두 달이라. 그 정도면 다양한 시도를 다 해봤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환자는 이미 외래에서…….”
그는 김석용이 대답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아직 레지던트시니 제가 몇 가지 지적하겠습니다. 임상연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기존에 검증된 치료로 도저히 안 될 때 시도하는 게 원칙이에요. 선생님의 ‘호기심’으로 무턱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4년차면 준 전문의였다.
거기에 레지던트라도 김석용은 엄연히 다른 병원 소속 의사였고.
그런데도 저런 식의 고압적인 태도라니.
갑자기 한국대병원에서 수련받는 레지던트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발표자께서는 임상연구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 환자분에 대해서는 제가 좀 더 부연설명 하겠습니다.”
아까부터 줄곧 딴지를 거는 태도에 김석용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평소 성격 같았으면 어떻게든 수용하고 참아 넘겼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레지던트 김석용이 아닌 정신과 치프로서 연단에 섰다.
레이저 포인터를 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입원 기간은 2달이지만, 이미 그 전에 외래에서 여러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가능한 치료는 거의 다 해봤다고 해도 좋을 것 같고…… 양극성 장애 약물도 모두 시도해 봤지만, 증상 호전이 없었습니다.”
“네네, 그러시겠죠. 하지만 약물치료가 다는 아니지 않습니까? TMS나 tDCS 같은 다른 근거가 있는 생물학적 치료도 있고…… 정 안되면 ECT도 해볼 수 있는 거고요.”
“…….”
“그리고 조금 민감한 부분이기는 합니다만, 외래에서 해보셨다는 치료… 그게 과연 최선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그게 무슨…….”
반대를 하다 못해 비난까지 하는 모습에 김석용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존 약물을 유효 용량으로 적정 기간 쓴 게 맞는지 철저하게 확인하는 게 먼저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거들먹거리며 코멘트를 이어갔고,
“그런 노력 없이 검증되지 않은 신약에 의존하는 건 잘못이에요. 삼아대에서 어떤 교수님이 진료하셨는지는 모르겠는데…….”
기어이 삼아대병원 정신과의 교수진까지 얕잡아 보는 듯한 말까지 나왔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입원 전 저희 외래 진료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가요?”
싸늘.
이내 김석용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