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67화 (167/195)

167화 Chapter 35. 당신이 옳다 (8)

“저,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상진은 빈 잔에 물을 채워 연거푸 들이켰지만, 자꾸만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고견도 여쭐 겸 조금 더 상의 드려 보겠습니다. 이전 병원에서 Venlafaxine과 Duloxetine과 같은 약물들을 충분한 기간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끊은 것도 아쉬운 부분인데…….”

“아니, 그건 부작용으로 고혈압이 심해져서 못 썼던……!”

발끈하는 김상진을 보며 김석용은 짐짓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그게 무슨…….”

“……심해져서 못 썼던 게 아닐까? 흠흠.”

“아! 말씀 듣고 다시 보니 확실히 약물 복용 후에 혈압이 상승한 경향이 있네요. 역시…… 제가 미처 확인을 못 했습니다!”

저 감탄한 표정만 놓고 보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릴 기세인데…….

왜 금방이라도 중지를 세울 것 같은 기분인지.

“그리고 미흡했던 부분이 또 있는데, TMS(경두개자기장치료)는 왜 고려조차 하지 않은 건지…….”

“어떻게 TMS를! 뇌동맥류 치료하느라 머릿속에 금속 클립이 들어있는…… 흡!”

이미 평정심을 잃은 탓에 급기야 할 말 안 할 말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네? 방금 뭐라고?”

“……금속 클립이 들어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것도 맞는 말씀이시네요! 뇌 안에 금속 재질이 있는 경우라면 자기장 치료의 금기 사항이니까요.”

김석용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더없이 섬뜩하게만 느껴졌고,

- 지가 봤네… 지가 봤어…….

- 대박. 자기도 제대로 치료 못 해놓고 큰소리친 거였어?

- 그 정도면 외래에서 보지 말고 입원을 시켰어야지.

진짠지 환청인지 모를 웅성거림이 그를 에워쌌다.

“역시 우리 김 교수님의 통찰은 대단하십니다. 만난 적도 없는 환자인데, 발표를 준비한 담당 선생보다 잘 알고 계시는 듯하니……. 이거 오늘 발표의 주인공은 SPN-1001이 아니라 우리 김상진 교수님 같습니다.”

좌장석에 앉아 인자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이광섭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사악하게만 느껴졌다.

“허허허. 그야 뭐, 상식적인 수준인 것을…….”

“상식이라……. 그렇군요. 추가 증례 토의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 다시 여쭙고 싶습니다. 이 환자에서 입원 후 SPN-1001 투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김상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 그에게도 계획은 있었다.

연구 기관과 제약회사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삼아대병원 정신과를 깎아내릴 계획이…….

일단, 환자에게 검증되지 않은 임상시험까지 받도록 한 것은 삼아대에서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면 될 일이었고.

그게 아니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환자에게 무리하게 임상시험 참여를 권유한 것이 아닌지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진료 실력의 문제 또는 연구 윤리의 문제.

어디로든 몰아가기 나름이었다.

이쪽을 지지해줄 교수들은 차고 넘쳤으니까.

‘분명 그랬는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환자 치료도 제대로 못 한 그 형편없는 의사가 바로 자신일 줄이야.

그런 줄도 모르고 온갖 지적을 해댔으니…….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자리에서 개망신은 물론이거니와 학회에서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저, 김상진 교수님?”

“네?”

“이 환자에서 입원 후 SPN-1001을 투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질문드렸습니다.”

‘……일부러 저렇게 물어보는 건가? 떠보려고?’

온화한 미소를 띤 이광섭과 눈이 마주치자, 김상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이광섭 교수…….’

작정하고 날을 세운 코멘트를 듣는 내내 기분이 상했을 텐데, 지금껏 불쾌한 기색 한번 내비치지 않았던 그였다.

마치 덫을 놓고 기다리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이제 자신이 끝까지 임상시험은 부적절하며 표준 치료로 충분한 환자였다고 주장한다면?

- 환자가 2년 동안 치료받았던 병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한국대병원이었습니다. 담당의는 여기 계신 김.상.진. 교수님이시고요.

그때는 기다렸다는 듯 이전 병원과 치료자를 공개할 것이 분명했다.

-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약으로 몇 주 만에 호전될 환자 붙들고 그동안 대체 뭘 하셨던 겁니까? 허허허.

급기야 비현실적이고도 끔찍한 상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여기까지 다 내다보고 있었던 것인가!’

발표를 맡은 레지던트가 자신을 상대로 시종일관 당당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좌장석에 앉은 이광섭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

그야말로 연기대상감 아닌가.

“외래에서 치료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 망설인 뒤, 김상진이 입을 뗐다.

“지금 보니 입원 치료도 그다지 틀린 판단은 아닌…… 아니, 매우 적절한 판단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안전한 병동 환경에서 치료해야죠!”

당장은 이광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원하는 답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SPN-1001처럼 ‘혁신적인’ 신약으로 적극적인 치료를 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고요. 앞으로 출시가 기대됩니다. 허허허.”

‘뭐야? 임상시험까지 안 가도 될 환자라며?’

‘아까는 무리한 치료라더니 이제는 적극적인 치료?’

‘아니,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그게 왜 갑자기 ‘혁신적인’ 신약이 됐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교수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두서너 개씩 떠올랐다. 특히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유정민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레지던트 선생님이신데 이런 훌륭한 발표라니…… 우리 병원 전공의 선생님들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행간의 정보만으로 환자 파악을 다 하시고……. 역시 대가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예리한 질문과 코멘트였습니다.”

“…….”

“발표해주신 김석용 선생님 그리고 열띤 토론 해주신 김상진 교수님께도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

칭찬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함정이야. 함정…….’

모두가 이광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뛰어난 기억력과 민첩한 상황 판단 능력 그리고 변화무쌍한 처신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그의 ‘함정’에 걸려들 뻔하지 않았던가.

‘영국 신사’라는 별명처럼 그저 예의 바르고 점잖은 사람으로만 알고 있을 뿐, 이렇게 음흉한 구석이 있을 줄이야.

김상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첫 번째 세션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휴식시간 갖고 두 번째 세션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짝짝짝.

“김상진 교수님……?”

쉬는 시간임에도 미동조차 없는 모습.

“……사람이야. 무서운…….”

“네? 방금 뭐라고……?”

분위기 좋게 몰아붙이다가 뜬금없는 칭찬을 하질 않나, 멍한 표정으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질 않나.

옆에 있던 다른 교수들이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 선생, 수고 많았어.”

발표를 마친 김석용이 연단에서 내려오자 이광섭이 다가와 말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김상진 교수, 좀처럼 남 인정 안 하는 사람인데 이런 평가라니…….”

이광섭은 별일이 다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그 환자 이전에 치료받던 병원이 어디였더라?”

* * *

“네? 그건…… 왜?”

“아, 나중에 만나게 되면 환자 의뢰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려고. 덕분에 이런 좋은 결과도 냈으니까.”

“아, 네…….”

김석용의 시선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김상진을 향했다.

“아, 저도 기억이 잘……. 병원에 복귀하면 찾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미뤘다.

지금 건네는 감사 인사는 결투 신청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훈훈한 분위기를 굳이 험악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래, 알겠네. 나중에 꼭 알려주게.”

김석용의 어깨를 두드리는 그의 표정이 유난히도 밝아 보였다.

이광섭이 좌장석으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레지던트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선생님, 발표 정말 잘하시던데요!”

“후우.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김석용이 양 볼을 부풀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긴장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요?”

“맞아요. 하나도 안 떠시는 것 같던데.”

그렇게 청산유수로 발표를 해놓고 긴장이라니.

노민혜와 고채연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말도 마라. 땀이 다 나고 다리가 후들거리더라.”

주관과 객관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무대 공포증 환자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당사자야 자기 심장 뛰는 소리에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다 들리겠지만, 실상 청중 대부분은 발표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소수의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발표 내용에 집중하느라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 정말 멋지셨어요! 김상진 교수님이 그렇게 작정하고 몰아붙이는데 받아치는 솜씨가 정말 대단했다고요.”

어느새 다가온 황진호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받아친다…….’

확실히 평소의 김석용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아, 그땐 순간 화가 나서……. 그래도 잘 참았지 뭐.”

그는 자신의 발표를 떠올리며 턱을 쓸었다.

발표 내용 지적하는 정도야 그러려니 했으나, 담당 교수님까지 운운하는 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환자가 이전에 김상진에게 치료받았다는 것을 밝히고 망신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한참 윗사람을 상대하는데도 그다지 떨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

그의 시선이 시현을 향했다.

비록 1년 후배였지만, 왠지 의지가 되는 동료.

“고맙다. 덕분이야.”

김석용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별말씀을요. 케이스 다 선생님이 준비하신 건데요. 선생님이 잘하신 거죠!”

“아냐. 난 애초에 이 약이 이렇게 효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AI 연구와 병행이 어려워 김석용이 대신 맡았을 뿐, 연구를 처음 제안한 건 시현이었다.

제안뿐 아니라 약물을 투여할 대상 환자군을 고르고, 가장 효과적인 투여방법까지 찾았으니 그의 공이 가장 큰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인지치료’도 고마웠다.”

“인지… 치료요?”

“그래. 네 말을 듣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김석용의 시선이 저 멀리 교수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을 향했다.

그야말로 하늘 같은 선배 의사들.

그가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부터 교수였던 이들이었다.

늘 그들이 말하는 것을 ‘정답’이라고 여기며 배워온 터라 그들과 논쟁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의대에 입학한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그야말로 강산이 변할 시간.

자연대 강의실에서 기초과학을 공부하던 풋풋한 의예과 학생은 어느덧 30대가 되었고, 이제 전문의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교수님들한테 괜히 주눅 들고 공격당할 게 무서워서 깜빡 잊고 있었지 뭐냐. 오늘은… 이 자리에서만큼은…… 내가 제일 권위자라는 걸.”

“그럼요! 선생님 말고는 아무도 안 써본 약이니까요.”

“아무렴! 이 약은 내가 제일 잘 알지! 아무튼, 고맙다. 조만간 밥 한번 살게.”

으레 하는 말이긴 했으나, 빈말은 아니었다.

시현이 말해준 덕분에 자신이 누구보다 SPN-1001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까.

김석용의 어깨가 한 뼘은 더 넓어진 것 같았다.

‘당신이 옳다…….’

맹목적인 지지는 부담을 안겨줄 뿐이지만,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 사람의 지지는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치료 도구가 된다.

그 사람의 편에 서서.

그가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바로 보게 하고.

부정적 감정에 잠식당한 생각을 바로 세운다.

그것이 스킬, ‘당신이 옳다’의 본질이었다.

딩동!

[system : 스킬에 대한 사용자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SORA : 스킬 ‘당신이 옳다’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스킬… 이해도? 업데이트?’

[SORA : ‘당신이 옳다’의 새로운 사용 설명서를 출력합니다.]

다음 순간, 새로운 알림창이 시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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