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Chapter 36. 채찍과 당근 (1)
[SORA : ‘당신이 옳다’의 새로운 사용 설명서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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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액티브 스킬)]
- 환자의 우울, 불안,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즉각 감소시킵니다.
- 환자의 감정 조절 능력을 강화하며 잠재력을 극대화합니다. (NEW!)
- 환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일정 수준 이상 다다를 때 활성화됩니다.
- 직접 사용이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추가적인 효과가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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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조절 능력 강화?’
[SORA : 네, 최근 사용 내역을 반영한 새로운 설명서입니다.]
시현이 알림창에 뜬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증상 감소가 즉각적인 것만으로도 활용도가 높은 스킬이었다.
환자에게 맞는 최적의 항우울제 바로 투여한다고 해도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얼마간의 기간이 필요한데,
그 공백을 메우고 시간을 벌기에 이만한 스킬이 없었다.
물론 환자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바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 경험으로 환자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시현에게는 그마저도 별다른 제한이 되지 않았다.
‘증상을 줄이고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건…….’
시현은 이내 회귀 전에 만났던 환자들을 떠올렸다.
- 발표가 너무 무서워요. 정말 준비 많이 했는데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좋은 기회였는데…….
- 하루 종일 고민했는데 도무지 결정을 못 하겠어요. 이게 맞는 걸까요?
- 저는 왜 큰 시험에 약한 걸까요? 정말 준비 많이 했는데 왜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그들이 그저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실전에 약한 사람인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악순환 때문이지.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불안에 시달리는 이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며, 그렇게 자신감을 잃으면 더 불안해지기 마련.
그런 상황에서는 조언보다는 격려를, 비판보다는 지지를 보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더없이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그저 ‘당신이 옳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인물 정보.’
[SORA : 레지던트 김석용의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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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용 남/30 삼아대병원 정신과 치프]
칭호 : 여분을 준비하는 자
주요 능력치 : 지력 56 -> 63(NEW) 덕력 49 체력 55 감각 44 행운 50
특기 : 프라모델 제작(Lv. 8) 인지행동치료(Lv. 7) 학회발표(Lv. 2 -> 7)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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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특기가… 생겼어?’
‘인물 정보’의 마지막 줄을 확인했을 때 시현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한 번에 5단계나?’
‘학회발표’의 직전 숙련도는 레벨 2.
특기라고 하기에 뭔가 애매한 수준이었지만,
단숨에 숙련도가 5단계 상승해 당당히 특기 란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지력이 소폭 오르긴 했지만, 그 정도 변화만으로 5단계 상승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랜덤 박스로 지력을 대폭 올렸을 때도 특기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시스템창을 살피던 시현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여분을 준비하는 자…….’
그의 칭호를 확인한 시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성실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의기소침한 면이 있던 그였다.
그나마 동기인 권진은과 후배 레지던트들에게는 그럭저럭 편한 모습이었지만, 동문 선배와 교수들을 대할 때는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특히 학회나 PGR과 같은 외부 행사에서 연자를 맡기라도 하는 날엔…….
발표 내용을 점검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 그러니까 두 배로 준비하는 거지. 어차피 절반밖에 못 보여 줄 테니까…….
언젠가 김석용이 무심코 했던 말이었다.
청중 앞에만 서면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하니 그럴 바에야 그럴 바에는 준비에 더 신경을 쓰는 게 낫다는 심산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 나왔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든 질문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준비한다.
그것이 그의 ‘생존 전략’ 이었다.
평소 열심히 준비한 만큼, 역량을 폭발시키는 것은 작은 계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특기 레벨이 5가 오른 것도 이해가 되었다.
발표하는 내내 김석용은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연단에 오르기 전 긴장한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물론 운이 따라준 면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김상진 정도 되는 사람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으니……. 아니, 압도하다시피 했으니 오늘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앞으로 위축될 일은 없겠지. 누구를 상대로도…….’
올 한 해, 치프로서 그가 보여줄 활약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형님, 아까 왜 그러셨어요? 갑자기 임상 연구 칭찬을 다 하시고.”
첫 번째 세션이 끝나자 유정민이 김상진에게 물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일단 초부터 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오랜 시간 그와 알고 지냈음에도 그가 누군가에게, 그것도 다른 병원 소속 의사에게 이런 식의 호평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이 양반이 왜 안 하던 짓을…….’
분명 신약의 활용도는 높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돌연 태도를 바꾼 이유가 궁금했다.
“어? 아… 다시 보니까 괜찮아 보이더라고. 실제로 연구 참여한 환자가 좋아지기도 했고.”
“아니, 그걸 누가 몰라요? 대외적인 자리니까 당연히 좋아진 환자 위주로 발표를 했겠죠! 발표한 케이스에서 딱히 지적할 게 없으면 잠재적으로 이러이러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만 공격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아까부터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김상진을 향해 유정민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 그렇긴 하지.”
“신약이라 아직 경험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막 던져도 반박도 못 한다고요. 어디 보자… 글루타메이트 계열이라고 했으니까 의식 상실이나 혈압 상승이 있을 수도 있고…… 굉장히 위험한 약이라고 하면 되죠!”
“…….”
‘그걸 몰라서 말 못 했겠냐…….’
2년 동안 환자를 붙들고만 있었지 결국 아무것도 못 한 그 의사가 본인이었고.
여기서 더 지적했다가는 망신당할 것 같아서 급하게 수습하느라 그리했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벌컥벌컥.
그는 신경질적으로 생수병을 비틀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그나저나 그 전 담당 의사가 성의가 좀 없긴 했네요.”
“……하자.”
“딱 봐도 귀찮으니까 관성대로 재처방만 한 거 같은데……. 자살사고도 있고 TRD(치료 저항성 우울증) 같은데 입원 치료라도 권하던가…… 병실 없으면 다른 병원으로 전원이라도 시켰어야지. 안 그래요?”
“유 교수, 그만하자고.”
입을 앙다문 김상진과 눈이 마주치자 유정민은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크흠. 아무튼, 오늘 여기 제약회사 사람들도 꽤 온 거 아시죠? 가뜩이나 삼아대가 리서치센터 업고 이것저것 해보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 잘한다 잘한다 하면 다들 그쪽으로만 줄 설 거라고요.”
신약후보물질 발굴은 제약회사의 몫이지만 환자를 대상으로 그 효과를 검증하는 임상연구를 하는 곳은 병원, 그중에서도 대학병원이었다.
특히 어느 정도 병상 규모가 있고 연구 실적을 충족하는 대학병원은 섭외 1순위라고 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국내에서는 한국대병원과 명성대병원 그리고 세연대병원이 그런 병원들이었는데, 몇 년 전 삼아리서치센터가 생기면서 그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삼아 쪽은 그룹 차원에서 바이오 분야를 미래 먹거리로 점찍었다잖아요?”
“그게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쉽게 되나? 신약 개발이 얼마나 어려운데?”
“그거야 모르죠. 그 강태정 회장이 어디 보통사람입니까? 그분 특별 지시로 투자한 돈만 해도 엄청나다고 하던데요?”
확실히 그의 말대로 최근 리서치센터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같은 그룹 내의 삼아대병원과 협업하는 것은 물론, 다국적 제약회사 출신들을 대거 영입하여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진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는 유용한 후보 물질에 대한 특허를 사들인 뒤, 직접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쪽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지만, 개발된 약물에 대해 기술 이전계약만 성사시키면 일거에 수천억대의 매출을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까 한가하게 좋은 말이나 해주고 있을 상황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한 수 위인 거 보여줘야죠? 저쪽에서 하는 걸 깎아내려서라도…….”
“유 교수, 그래 봐야 결국 삼아대 쪽 하고 일하지 않겠어?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인데?”
“어휴, 형님이 뭘 모르시네. 처제가 삼아생명에 근무해서 제가 좀 아는데……. 삼아대병원하고 리서치센터하고 사이 별로 안 좋은 거 모르셨어요?”
‘사이가 안 좋다고?’
뜻밖의 말에 김상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같은 그룹이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인데 그럴 수도 있나?”
병원이 유명해야 더 좋은 연구도 할 수 있고, 연구 실적이 쌓여야 병원 위상도 올라가는 것이 상식.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그게 보통은 그래야 맞는데, 병원은 사위가 맡고 센터는 아들이 맡고 있다 보니 은근히 신경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그 정도면 대놓고 견제하는 건가?”
“상속…… 문제인 건가?”
“바로 그거죠! ‘생명’이 누구한테 갈지!”
리서치센터 규모가 커지고 연구 성과를 내는 게 병원 입장에서 나쁠 리는 없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삼아대병원과 삼아의료재단 그리고 삼아리서치센터.
이 셋을 아우르는 삼아 그룹의 핵심 계열사, 삼아생명의 후계자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던 것.
보나 마나 병원장인 원일웅과 리서치센터장 강병우 두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아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겠어?”
“뭐, 그럴 수도 있는데. 아니라는 말도 있어요. 워낙 속 모를 사람이라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고.”
그 말에 김상진은 곧바로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삼아 그룹… 채종우 선배…….’
의대생 시절부터 교수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을 한국대병원에서 보낸 채종우였으나, 그가 삼아가의 사위라는 걸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언뜻 생각하면 삼아대병원으로 가서 높은 자리 하나쯤 꿰차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영문인지 채종우는 그러지 않았다.
‘회장님 스타일이 그런 건가?’
아들이라고 혹은 사위라고 해서 무조건 챙기기보다 성과를 낸 사람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회장님이 실적이 없으면 핏줄한테도 일 안 맡긴다던데…….”
여기까지 듣고 보니 어쩌면 병원장인 원일웅이 더 유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자 규모가 큰 과는 과감하게 쳐내고, 수익을 주는 진료과와 시설은 대폭 지원해서 오늘날 삼아대병원의 ‘경영 정상화’를 이룬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 것이 그였으니까.
그렇게 보면, 리서치센터의 성장은 원일웅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강병우가 센터장으로 있는 기간 동안 성과를 많이 낸다면, 그의 아버지 눈에 들어 삼아 생명을 손쉽게 승계받을지도 모르니까.
병원장으로서 그를 지원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연구윤리위원회 통과 기준을 엄격하게 하고, 각종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을 통제하고, 피험자 모집을 소극적으로 하도록 하고…….
반대로 그를 견제할 방법은 넘쳐났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한테 기회일 수도 있어요. 센터와 병원 사이가 껄끄러울 때 우리가 좋은 연구 주제 잡아서 제안만 하면…….”
한국대병원도 리서치센터와 일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
‘일단 그리만 된다면…….’
과거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대학병원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진료에서도, 그리고 연구 역량에서도.
그러면 그 자신도 국내 1위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 지금 계획하고 있는 연구들은 리서치센터와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게 제안을 해봐야겠군. 우리가 꼭 따낼 수 있게 말이야.”
‘상대를 깎아내려서라도…….’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