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69화 (169/195)

169화 Chapter 36. 채찍과 당근 (2)

“시현아, 이제 네 차례인 것 같은데?”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김석용이 흘끔 시계를 보며 말했다.

“네. 슬슬 올라가야겠네요.”

시현이 두 번째 세션의 발표 자료가 담긴 노트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시현을 불렀다.

“천시현 선생님!”

“아, 박 전무님 오셨습니까?”

“좀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일정이 겹쳐서…… 그래도 발표 전에 와서 다행입니다.”

삼아전자 박동진 전무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제 내용은 전에 들어서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전무님 차례 전에만 오시면 되죠.”

“그래도 우리 천 선생님 발표는 다시 한번 듣고 싶군요. 지난번 발표가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기대하겠습니다.”

이미 한 번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을 들으러 시간을 낸다고?

그의 옆에 선 수행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상사를 쳐다보았다.

매사 분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쓰는 박동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보니 이 젊은 의사를 대하는 태도도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아무리 소속이 다르다곤 하지만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그가 한참 위였는데, 시현을 대하는 태도는 늘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개발자 출신으로 실무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원래 그의 스타일인데, 한껏 예의를 차린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혹시 회장님 친척이라도 되나?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

기업가로서는 드물게 회장님 일가에는 의사들이 많다고 했으니까.

무슨 사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직감이 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알고 지내면 득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잽싸게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천시현 선생님. 저는 삼아전자 소프트웨어 개발팀 김영광 과장입니다. 병원 분들하고 이번 프로젝트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아, 실무자셨군요. 반갑습니다. 정신과 레지던트 천시현이라고 합니다.”

시현 또한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이걸 쓸 일이 생기네…….’

입사 때 지급 받았지만, 누군가에게 준 기억은 거의 없는 명함.

의국 서랍에는 아직 뜯지도 않은 명함 두 상자가 더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내에서는 모두가 연락처를 알고 있는 사이였고,

환자나 보호자에게는 개인 연락처를 건네지 않도록 하고 있으니 막상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보니 병원 외부 사람과의 협업은 시현으로서도 거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 진작 소개드렸어야 하는데…… 저희 팀 실무자입니다. 기술적인 부분은 앞으로 김 과장이 많이 도움이 될 겁니다.”

AI 연구는 기본적으로 삼아대병원 정신과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고 있었지만, 삼아전자의 지원 없이는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연구였다.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인 만큼 들어가는 자본이 필요했고, 소프트웨어 전문가의 도움도 받아야 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 말로요!”

“어려워 마시고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시현이 김영광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회사원으로서 이미 바쁜 생활을 하고 있을 터.

새로운 프로젝트 하나를 더 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데, 배낭에 돌덩이 두어 개쯤 더 넣는 기분이려나.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을 새로 만든 셈이니 실무자인 그에게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연구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더 바빠질 텐데, 일과 끝나고 늦은 시간에도 괜찮습니다. 불편한 점이나 개선 사항이 있으면 그때그때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저도 밤에 집중이 더 잘 되더라고요. 개발자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는 것도 그 시간 무렵이고요. 그럴 땐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더 디벨롭해야 하는데…….”

“그러셨군요. 저희는 병동에 담당 환자가 입원해있어서 급할 때는 콜도 받아야 하고…… 어려운 환자 있으면 1, 2년차들 백당직 역할도 해줘야 해서요. 밤에 깨어있는 게 익숙합니다.”

생각해 보면, 당직 때 콜 하나 없이 아침까지 푹 자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혈액검사와 CT, X-ray를 적절하게 처방한 뒤, 결과를 보고 판단을 내리는 다른 과와는 다르게,

정신과는 직접 내려가 환자와 보호자를 각각 면담하고, 그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거기에 입원이 필요하고 병실까지 없는 상황이 겹치면 서울 시내 모든 병원에 연락을 돌려야 했다.

짧아야 한 시간, 길면 두세 시간.

당직을 선 다음 날도 똑같이 근무를 해야 하니 새벽에 걸려온 전화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회복 포션’과 ‘숙면 포션’의 도움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그런 상황이라, 한밤중에 전화 받는 것도 익숙합니다. 그러니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딩동!

최대한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는데 돌연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system : 스킬 ‘뭐가 문제야 say something’을 사용했습니다.]

본래 방어적인 환자의 표현을 촉진하는 스킬로, 환자와 치료적 관계를 형성하면 자동 활성화되는 스킬이었다.

“한밤중이라면…… 아! 선생님도 올빼미형이신가요?”

뜻밖의 메시지에 시선을 뺏긴 사이, 김영광이 시현의 말을 반기듯 말했다.

“네? 아… 그런 편입니다.”

“크으… 역시 그러셨군요! 저도 새벽에 갑자기 개발자로서의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선생님도 아무 때나 연락 주십시오. 제가 아직 미혼에 혼자 지내고 있어서 솔직히 밤에 별거 없습니다. 집에서도 낮에 하던 작업 생각 많이 하거든요.”

그는 내적 친밀감이 폭발하는 듯 시현에게 이런저런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 네…….”

“애초에 회사에서 밀린 일 좀 하고 나면 집에 오면 거의 자정이라…… 여기로 이직하고 나서 워라벨 따위는 진작 내다 버리…….”

그렇게 말하다 박동진과 눈이 마주친 김영광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아직 레지던트긴 해도 정신과 의사라서 그런가?

시현과 대화하니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술술 나오는 기분이었다.

민망한 듯 잠시 헛기침을 한 그가 이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크음. 아무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발표도 기대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두 번째 세션, 자살 예방을 위한 AI 모델 연구는 시현과 삼아전자가 나눠서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현은 주로 의학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삼아전자 쪽에서는 AI 전반과 이번 연구를 뒷받침할 삼아전자의 기술력에 대해서.

“오늘 참석하신 타 대학 교수님들이 관심을 가지고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는데…….”

AI 모델을 만들기 위해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켜야 했고, 삼아대 한 곳의 데이터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저쪽에 앉아있는 분들이 다른 대학 교수님들인가요?”

“네. 한국대병원, 명성대병원 그리고 세연대병원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그렇군요…….”

박동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 발표장에서는 김석용의 SPN-1001 연구에 대한 발표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발표가 끝났을 때, 예상 밖의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약의 효과를 강조하는 김석용과 무용론을 주장하는 김상진.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비록 의학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논쟁에서 승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 교수…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

SPN-1001 연구에 대해 괜한 트집을 잡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돌연 태도를 바꿨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쪽에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라고 봐야 했다.

“천 선생님, 아시다시피 이 연구는 우리만 열심히 해서는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다른 병원에게 지원을 요청해서 많은 양의 데이터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요.”

“맞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이쪽을 돕도록 할 동기가 필요해요. 아무런 보상 없이 움직여주기를 바란다면…… 그건 요행을 바라는 거나 다름없죠.”

“…….”

그의 말이 시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전에 얘기했던 대로 발표 순서를 바꾸는 건…….”

그가 보기에 직전에 김석용의 연구를 폄하하려다 실패했으니, 다음 세션에 대해서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럴 바에는 자신이 먼저 나서 분위기를 끌고 오는 게 나아 보였다. 연구에 참여한 기관에 제공하게 될 대대적인 보상을 내세워서.

개발자로서의 커리어와는 별도로 삼아전자 내에서도 ‘프리젠테이션의 귀재’라 불리는 그였다.

거기에 그가 발표할 AI 기술에 대한 부분은 의대 교수들로서도 생소한 분야 아닌가.

의학적인 내용이라면 그들이 전문가일지 몰라도 이쪽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자연히 공격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초반 분위기를 나쁘지 않게 가져갈 수 있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시현이 입을 뗐다.

“네, 아무래도 그게 낫겠죠. 그럼 우리 쪽에서 먼저…….”

“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가보겠습니다. 삼아대병원이 먼저 발표하는 것으로요.”

박동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네?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연구에 협력해줄 기관들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요.”

“천 선생님. 이건 일입니다. 누가 먼저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연구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까?”

박동진이 처음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가 먼저냐를 놓고 기싸움을 할 상황이 전혀 아닌데, 굳이 먼저 나서겠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실리를 우선시하는 그의 업무 스타일상 명분에 사로잡혀 연구 대상자를 모집할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저 또한 연구를 성공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AI 연구는 데이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예측력이 올라간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박동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다만, 자칫 연구를 망쳐놓을 ‘위험 요인’이 있다면 미리 제거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위험 요인이라니…… 그게 대체 뭡니까?”

“결국은 사람이죠. 연구의 대상도 연구를 수행하는 이도……. 누가 도움이 되고 누가 해가 될지 선별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현은 곧 그가 발표할 연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검토하고 연습했던 내용이었지만, 발표를 앞두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딩동!

[SORA : ‘피아식별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새로 떠오른 알림창을 확인한 시현이 박동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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