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Chapter 36. 채찍과 당근 (3)
딩동!
[SORA : ‘피아식별 모드’가 활성화됩니다.]
새로 떠오른 알림창을 확인한 시현이 박동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 * *
“이번 세션은 ‘자살 예방을 위한 AI 모델에 관한 연구’입니다. 발표자는 삼아대병원 정신과 3년차, 천시현 선생님입니다.”
이광섭의 소개로 두 번째 발표가 시작되었다.
짝짝짝.
삼아대 레지던트들과 병동 간호사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서 힘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현은 연단에 올라 그들이 모여 앉은 쪽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뒤, 강의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등 뒤로 선명한 등이 하나둘 켜졌다.
붉고, 푸르고, 더러는 어디로 분류해야 할지 애매한…….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 속에 저런 감정들을 감추고 있는 걸 보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딱 맞았다.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몇몇 교수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또 레지던트를 내보내?’
‘AI라고? 요즘 유행한다니 일단 하고 보자는 건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기분.
하필이면 연단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있던 터라 그들이 내뿜는 검붉은 오라가 유독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AI 모델을 통한 자살 위험도 예측 연구]
“2, 3월에는 아프다고 무작정 대학병원 응급실에 방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현은 슬라이드를 화면에 띄운 뒤,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말로 운을 뗐다.
“이 시기에는 갓 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인턴으로 첫 의사 생활을 시작하고, 레지던트 1년차가 응급실 당직을 처음 맡습니다. 의사국가고시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학적 지식은 충만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때이기도 합니다.”
의사의 일생에서 가장 긴장되는 때를 고르라면,
별다른 고민 없이 이 무렵을 고르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선배 레지던트들이 진료하는 것을 직접 봐주기 때문에 실제 의료 사고가 발생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한 번도 안 해본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빼는 시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무렵, 선배 레지던트들이 해줬던 말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말들이 몇 있는데요. 다른 과 환자들은 숨을 못 쉬고 심장이 멎어서 응급실에 실려 오는데, 그래도 정신과 환자 대부분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로 걸어서 들어온다고…… 진료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 절대 도망가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하하하.
그 말에 선배 레지던트들과 동문 선배들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어색하기만 하던 때, 부담을 줄여줬던 말.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들 또한 1년차 초반에 그들의 윗년차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응급실에서는 환자가 죽을지 살지 그것 하나만 제대로 알면 최고의 명의가 된다고…… 환자가 살 것 같으면 외래를 예약해주고, 죽을 것 같으면 입원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실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장 내과만 보더라도 스텐트를 삽입할지 흉부외과로 응급 수술을 의뢰할지 고민하고, 항생제와 스테로이드 중 무엇을 투여할지를 두고 치열하게 토론을 하는데,
정신과는 집으로 갈지 입원을 할지 ‘결정’만 하면 되니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시현의 말에 이제 막 의국에 들어온 고채연과 장미은이 ‘오,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라는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레지던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신과 쓰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환자를 보다 보면, 나중에는 어느 정도 감이 생겨서 이 사람이 실제로 자살 시도를 할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잠깐의 침묵.
이내 청중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정신과 의사치고 환자의 자살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만일 자신의 환자 중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라고 보면 되었다.
운 좋게도 ‘아직’ 그런 환자를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당사자가 사망한 탓에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거나.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from Hamlet(Act III, Scene 1)
William Shakespeare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연극 햄릿의 유명한 대사.
새로운 슬라이드를 띄우며 시현이 발표를 이어갔다.
“환자의 생존과 사망 여부만 제대로 판단해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역으로 그 한 번 한 번의 판단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중년이 된 교수들과 나이 지긋한 선배 정신과 의사들이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수십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해 왔으나,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었다.
자살을 굳게 결심한 사람일수록 더 깊숙이 본심을 숨기기 마련.
증상이 심할수록 눈에 잘 띄는 다른 과 질병과는 그 결이 달랐다.
멋모르던 시절에는 그저 편하고 단순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평생을 공부해도 미처 풀 수 없는 과제로 남아있었다.
“오늘 준비한 발표는 어떻게 하면 그 판단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 내용입니다. 처음 시도하는 연구인 만큼, 여러 선생님들의 고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신과 의사라면, 한 번이라도 환자를 잃어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시현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터였다.
설령 연구 자체에는 회의적일지라도, 자살 위험도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만 있다면, 진료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기서 굳이 중요성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시현은 발표 내내 어떻게 AI 모델을 만들고 실제 진료에 활용할지를 이야기했다.
“딥러닝으로 AI 모델을 구축하려면 각 병원에 보급된 EMR(전자의무기록) 양식의 통일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문헌에 보고된 위험 요인을 반영한…….”
연구에 참여하는 각 병원에서 해야 할 일들.
“기존 데이터를 AI 학습에 적합하도록 변환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로 다른 기관에서 많은 양의 데이터를 입력해야 하는 만큼, 일일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도 필요한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도록 자동화하는 과정이…….”
예상되는 어려움과 기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부분들.
“정교한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많은 케이스를 학습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AI 모델을 통해 얼마만큼의 자살 고위험군 환자를 조기 발견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까지.
의아한 점이라면 시현의 발표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무적인 내용뿐이라는 것이었다.
AI 모델 개발을 통해 얻게 될 장밋빛 미래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거기에 이르는 가시밭길만이 보이는 듯했다.
박동진은 강의장 분위기를 살피려 고개를 돌렸다.
사각사각.
몇몇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열심히 메모를 했지만,
하아암.
늘어지게 하품하며 벽시계만 올려다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인센티브는? 연구 참여를 독려하는 말은? 설득은 없는 건가?’
분명 예전에 삼아대병원에서 들었던 시현의 발표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의학에 문외한인 삼아전자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증례를 가지고 발표했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모든 조건이 비슷했지만 생과 사가 갈렸던 환자를 보며 궁금증이 일었고,
응급실에서의 순간적인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구미가 당기는 연구였다.
‘그런데 이건…….’
이미 연구에 참여하기로 한 사람들에게 실무를 소개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마치 신규 참가자를 대상으로 하는 오리엔테이션 같은 느낌이었다.
대중적인 관심을 끌기에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보였다.
“이상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짝- 짝짝 -
예상대로 김빠진 박수 소리뿐이었다.
혹시나 후반부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끝까지 지켜봤지만, 발표는 그대로 끝이 났다.
“시현이가 발표를 이렇게 끝낸다고?”
“너무 밋밋한데…… 요새 바쁘다고 신경 못 쓴 거 아닌가?”
“내용을 놓고 보면 준비를 안 한 건 또 아닌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삼아대병원 레지던트들도 고개를 갸웃하며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세션에 질문이나 코멘트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반면 이광섭은 김석용의 첫 번째 발표가 끝났을 때와 정확히 같은 표정으로 좌중을 보며 말했다.
‘이런 연구에 관심을 가질 리가…….’
박동진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처음 발표했던 김석용의 연구는 새로운 시도이기도 했고, 잘만 개발하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고,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바빴다.
하물며 이런 연구에야…….
약물 연구처럼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동력은 엄청나게 들어가는 데다 성공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그때였다.
연단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 가운데 한 곳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고, 이내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명성대병원 유정민입니다. 무척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기는 한데…….”
그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돌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AI 모델을 통한 환자의 자살 위험도 예측……. 이거 ‘청구’할 수 있는 겁니까?”
“청구라는 게 무슨……?”
“문자 그대로 환자에게 비용을 청구할 수 있냐는 뜻입니다. 바꿔말하면 건강보험공단의 수가 체계에 포함되어 ‘수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냐는 거죠.”
유정민의 말에 강의장 분위기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긴. 병원이 자선사업 하는 곳은 아니니까.”
“AI가 예측한 결과로 돈을 받기는 좀…… 애매할 것 같은데?”
“그러게. 투자비는 엄청나게 들어갈 텐데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좀 그렇지 않나?”
수십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도 아니고, 수만 명의 의무기록을 다뤄야 하는 대규모 연구.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이라도 아무런 보상 없이 참여자들의 열정만으로 진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구를 처음 제안한 시현조차도 굴지의 대기업인 삼아전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초기 비용이야 삼아전자에서 일부 댄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유지 보수까지를 책임져줄지는 미지수였다.
AI 모델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닌 바에야, 삼아전자가 지원을 끊는 즉시 연구는 흐지부지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죠. 환자의 의무기록을 분석해서 AI가 낸 결론을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요? 의사의 소견? 아니면 검사결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유정민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
반대로 그가 질문을 받는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질문이었다.
시현이 곤란해하는 모습이 재밌다는 듯, 아까부터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의사 소견도 별도의 검사도 아닙니다. 다만 의사의 판단을 도와줄 보조 지표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망설인 끝에 시현이 입을 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유정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소견도 검사결과도 아니다……. 명확한 결론을 낼 수 없는 참고 자료일 뿐이라면, ‘청구’가 불가능하다고 봐야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