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71화 (171/195)

171화 Chapter 36. 채찍과 당근 (4)

“소견도 검사결과도 아니다……. 명확한 결과를 낼 수 없는 참고 자료일 뿐이라면…… ‘청구’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뭐라고 대답하는지 한 번 들어볼까.’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설령 환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심사평가원에서 인정하지 않은 기술에 대한 비용은 환자에게도 건강보험공단에도 청구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현행 의료법상 ‘청구’는 불가능합니다.”

예상했던 대답에 유정민이 입꼬리를 올렸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느낌이 또 달랐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너무 순순히 인정해서 싱거웠다는 것 정도였다.

향후 의료 신기술로 인정받으면 비급여 청구가 가능하다거나,

기술 개발로 다른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둥 뜬구름 잡는 말이 있었다면 하나하나 지적해서 박살을 내버릴 계획이었는데,

너무도 간결한 대답에 조금은 맥이 빠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봐도 ‘보상’이랄 게 전혀 없어 보입니다. 데이터 정리하는 데 드는 인건비며 기타 비용을 고려했을 때, 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연구로 보입니다.”

“…….”

“제가 하버드에 교환교수로 있을 때 경험을 비춰보면, 당시에 비슷한 연구를 진행해본 적이 있는데…….”

그는 이번 연구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뒤, 갑작스러운 자기 자랑으로 코멘트를 이어갔다.

“흠흠. 유 교수님께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코멘트를 해주셨습니다. 연구를 진행할 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중간에 이광섭이 적절하게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하버드에서 보냈던 1년을 다 이야기할 기세였다.

유정민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교수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민국대병원 정찬수입니다. AI 모델이 환자의 자살 위험도를 과도하게 예측할 경우 환자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는데…… 그런 윤리적인 문제는 어떻게 접근할지 궁금합니다.”

“세연대병원 조대겸입니다. AI 모델이 내린 판단을 신뢰할 수 있을지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판단의 책임은 누가 지는 겁니까?”

“천하대병원 최석주입니다. AI 모델이 학습하게 될 데이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대책은 어떻게 세우고 있습니까? 대규모 데이터이기도 하고 민감 정보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평소 유정민과 친분이 있던 교수들.

대체로 우려 섞인 부정적인 코멘트가 줄을 이었다.

하나하나가 AI 연구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AI 전공자라고 해도,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뭐라고 대답할지…….’

시현을 바라보는 박동진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말씀하신 대로 자율성과 책임 소재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정보 유출 위험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암호화를 통해 최대한…….”

시현은 차분하게 준비한 내용을 말했으나,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일 뿐이었다.

평소와 같은 번뜩이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분위기가 안 좋은데.’

방금 손을 든 교수들 대부분이 서울 내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대형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비서실의 지시도 있었고,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연구로 보였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어찌어찌 설득해서 연구에 참여시킨다고 하더라도 협조적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연구 진행하기가 만만치 않겠어…….’

더는 부정적인 의견이 없기를 바라며 좌중을 둘러보는데,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강경대학교 김상혁입니다. 자살 위험도를 알려주는 AI라……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발표를 듣고 싶어서 멀리 강원도에서 왔습니다.”

그의 말에 박동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발표 이후 처음으로 나온 긍정적인 코멘트.

계속 부정적인 반응만 나와 걱정했는데, 연구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이가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 지역에는 고령 환자들이 많습니다. 당연히 내과적인 기저 질환이 공존하는 케이스도 많고요. 그 부분을 반영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다음 순간, 연단에 선 시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말씀하신 대로 기저 질환이 있는 환자는 우울감과 자살사고에 더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첫째로, 해당 내용에 대해 더 자세히 입력할 수 있도록 서식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타과 진료 기록을 연동하여 누락 데이터(missing data)를 최소화하는 방법도 고려하겠습니다.”

‘분위기가 바뀌었어.’

지금껏 다른 교수들의 지적에 형식적이고 간결한 대답만을 했던 것과 달리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래요. 아주 좋은 시도로 보입니다.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또한 시현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충호대학교 김건우입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정기적으로 자살 사망자에 대한 컨퍼런스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습니다. 대학병원 교수뿐 아니라 지역 개원의 선생님들도 참여하는 월례 회의인데요, 그래서인지 선생님이 제안한 연구에 더 흥미가 가는데…….”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호의적인 코멘트.

앞선 부정적인 반응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제가 느끼는 것은 대학병원 환자들과 지역사회 환자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AI 모델이 그런 부분을 반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그 또한 그저 수박 겉핥기식의 칭찬이 아닌,

자기 경험을 토대로 개선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번 연구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대학병원 환자와 local 환자는 진단부터 증상의 심한 정도도 다르고, 질병 외적인 요인으로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AI 모델이 편향 없이 인구 전체를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겠습니다.”

‘아까와는 확실히 달라.’

몇몇 참가자가 더 손을 들었고, 대체로 비슷한 패턴의 대화가 이어졌다.

연구를 격려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뤘고, 더러 보완할 점을 언급하기도 했으나 괜한 트집 잡기는 없었다.

시현이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듯한 강의를 했듯,

그들 또한 연구에 참여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사람들처럼 의견을 냈다.

‘이거 의외로 잘 될지도?’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반응에 박동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이어지는 긍정적인 평가가 불편한 사람들도 있었다.

연단 바로 아래 앉아 우려 섞인 코멘트를 했던 교수들.

그중 한 명이 일어나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여러 교수님들께서 좋은 의견을 많이 내주셨는데, 의미 있는 일이고 좋은 의도라는 건 다 압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구라는 게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첫 번째 세션에서 김석용과 설전을 벌였던 한국대병원 교수, 김상진이었다.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느냐는 둘째로 하더라도, 인력이 부족합니다. 가뜩이나 전공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교수로서 제자들에게 더 많은 일을 주기가 미안합니다. 안타깝지만 한국대병원은 이번 연구에 참여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전혀 아쉬운 것이 없어 보였다.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 진행 중인 연구들도 많고…… 유휴 인력이 없습니다. 명성대도 어렵겠습니다.”

유정민 또한 비슷한 의견이었고, 주변 교수들 몇몇이 그 말에 동조했다.

“민국대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당장 차출할 인력이 없고 거기에 AI가 내린 판단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도…….”

“저는 개인정보 보호가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정보 누출로 인한 소송을 당할 수도…….”

하나같이 주요 학회에서 보직을 맡은 교수들이었다.

연구 참여에 난색을 표하는 그들의 말 몇 마디로 단번에 흐름이 반전되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연구에 관심이 있다고 한들 긍정적인 언급을 하기 어려워 보였다.

데이터가 많을수록 좋은 연구인데, 서울 소재 유명 병원들이 줄줄이 참여 거부 의사를 밝힌 상황.

박동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내가 먼저 발표했어야 했나.’

시현이 말한 실무적인 내용보다, 연구에 참여할 경우 삼아전자에서 제공할 각종 지원을 ‘당근’으로 먼저 제시했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리 정신과에서 주도하고 삼아전자에서 지원하는 연구라지만,

이 문제 만큼은 자신의 의견대로 밀어붙였어야만 했다.

박동진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연단을 바라보았다.

‘아직 사회 경험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나…….’

의사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는 나이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정치 감각은 별로 없는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현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웃고… 있어?’

당혹스러운 기색 없이 청중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의아한 것도 잠시.

시현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발표를 이끌어갔다.

* * *

“교수님들께서 우려하시는 부분에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시현은 난처한 기색 없이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교수들의 코멘트에 답했다.

“일단 여러 문제…… 특히 연구 인력 부족으로 연구 참여가 어렵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어려운 길이지만 좋은 취지로 시작한 연구인 만큼, 마음으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김상진이 짐짓 안타까운 척을 해보았으나, 순간순간 드러나는 비웃음 섞인 표정까지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혼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자고.’

[system : 김상진 교수의 주된 감정은 ‘즐거움’입니다.]

기술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 의사가 환자를 진료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의무기록을 분석한 연구 아닌가.

아무리 삼아전자라는 굴지의 대기업이 전폭적으로 지원한다고 하지만, 그 본질은 의학연구.

주요 병원들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터였다.

‘저만한 대규모 연구를 메이저 병원들 도움 없이 진행할 수 있을 리가…….’

곤란한 표정으로 굽실거리며 도움을 청할 이광섭의 모습을 상상할 무렵, 시현이 입을 열었다.

“응원 감사합니다. 그런데 교수님, 한 가지 오해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 해요? 뭘 오해했다는 건지?”

김상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아대에서 연구를 소개했고, 자신들은 예의를 갖춰 거절했을 뿐인데.

딱히 오해하고 말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 연구에 많은 여러 병원들의 참여가 매우 중요한 것은 맞지만, 참여가 어렵다고 말씀해주신 교수님들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아닙니다.”

도움을 청한 게 아니다, 라.

분명 그럴 상황이 아닐 텐데…….

시현의 태도는 언뜻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런…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건가요?”

애써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김상진이 반문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도움이 필요하기보다는… 저희 연구에 지원한 여러 병원 중 몇 곳을 ‘선택’해야 할 상황입니다.”

“선택이요?”

김상진도 유종민도 그 옆에 앉은 다른 교수들도 처음 겪는 상황.

“네, 오히려 지원 병원이 너무 많이 몰릴까 걱정했었는데…… 고민을 덜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현은 당황한 교수들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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