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72화 (172/195)

172화 Chapter 36. 채찍과 당근 (5)

“네, 오히려 지원 병원이 너무 많이 몰릴까 걱정했었는데…… 고민을 덜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현은 당황한 교수들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뭐? 지원 병원이 너무 많이 몰려?’

떡 줄 사람은 전혀 생각이 없는데 김칫국을 마시다 못해 사발째 들이키고 있는 게 아닌지.

“선택한다, 라. 연구에 참여하기로 한 병원들이 제법 있나 봅니다?”

그가 시현을 떠보듯 물었다.

“네, AI가 요즘 떠오르는 분야이기도 하고, 자살 예방이야 정신과 의사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주제니까요.”

‘그럴 리가 있나.’

김상진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그가 아는 교수 중에 연구에 참여하기로 한 사람은 없었다.

자기애가 너무도 강한 나머지 모집과 동시에 연구 참여를 희망하는 병원들이 줄을 설 것쯤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허허허. 잘 돼가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오만한 놈. 나중에 어떻게 망하나 지켜봐 주지.’

[system : 김상진 교수의 주된 감정은 ‘경멸’입니다.]

대규모 연구인 만큼 방대한 환자 데이터를 쥐고 있는 자신들이 우위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박동진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직 병원을 가려서 받을 정도는 아닐 텐데…….’

처음 발표 순서를 고집할 때보다 한층 더 당혹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는 이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말 저녁임에도 생각보다 많은 정신과 교수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시현의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교수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 사실을 시현 또한 모르지 않을 텐데, 돌연 그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 * *

어느덧 다음 발표를 앞둔 시각.

이광섭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좌장석 화면에 뜬 슬라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그가 긴장할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번 연구에 관심을 보이며 먼 곳에서 찾아온 일부 교수들을 제외하면,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인 편이었다.

연구 인력, 윤리적인 문제 그리고 개인정보 이슈까지.

시현은 참여를 원하는 병원이 너무 많을까 걱정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테지…….’

그럼에도 묘하게 신뢰가 가는 기분이었다.

“질문이나 코멘트 있으시면 한 분 정도 더 받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코멘트라도 긍정적인 내용이기를 바라며,

그는 청중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제일 앞줄에서 손을 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네, 유정민 교수님.”

“발표자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유정민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추가적인 데이터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근거가 뭡니까? 자살 위험도에 대한 예측력을 높이기 위해서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텐데요.”

애초에 시현의 연구를 지원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막상 도움이 필요치 않다는 말에는 자존심이 상한 그였다.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넘어가겠다는 심산이었다.

‘분명 정론이야. 뭐라고 답할지…….’

그의 말에 박동진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먼저 말한 건 저 교수들이었지만, 발표자인 시현 또한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한 상황.

굳이 그렇게까지 말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연구 대상자의 ‘구성’ 때문입니다.”

“연구 대상자의 구성이요?”

뜻밖의 대답에 유정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이번 연구는 자살 위험도 예측을 위한 AI 모델을 개발하는 ‘국내 연구’입니다. 따라서…….”

“본론부터 말씀하세요. 이게 국내 연구인지 해외 연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 데이터가 부족해서 아무래도 SCI는 어려울 것 같으니 일단 국내 학술지로 투고하겠다는 말이었나요?”

하하하.

그는 시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빈정거리기 시작했고, 일부 교수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현은 불쾌한 기색 없이 그저 차분하게 답변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아, ‘국내’라는 말에 대해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니,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당연한 걸 굳이…….”

뭘 더 설명하겠다는 건지 의아하던 찰나, 시현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 전에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병원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유정민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니 당연히 명성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옆에 앉은 김상진과 좌장석의 이광섭이 눈에 밟혔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시현이 말을 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수님께서 근무하고 계신 명성대병원을 꼽고 싶습니다. 병상 규모로 보나 교수진으로 보나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병원 슬로건도 ‘대한민국 대표 병원, 명성대병원’일 정도니까요.”

“허허. 뭐 그야…….”

뜻밖의 칭찬에 낯이 뜨겁긴 했지만, 평소 생각했던 그대로의 말이 삼아대 레지던트의 입에서 나오자 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 있어서만큼은 명성대병원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현의 다음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그럼 어느 병원이 대표 병원입니까? 한국대병원? 아니면 삼아대병원?”

“한국대병원도 아닙니다. 물론 제가 근무하는 삼아대병원도 아니고요.”

셋 다 아니면 어디란 말인지…….

유정민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시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린 ‘국내 연구’라는 건 데이터를 수집할 때 특정 환자군이 아닌,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설계한 연구라는 뜻이었습니다.”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연구…….”

“여기, 병상 수를 기준으로 한 종합병원 순위를 확인해주십시오.”

시현은 대답 대신 새로운 슬라이드 한 장을 스크린에 띄웠다.

2,000병상 이상의 메머드급 병원들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1,500병상 규모의 병원들이 그 뒤를 이었다.

1,000병상 정도로는 10위권에 이름을 올리기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다음은 각 병원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한 슬라이드입니다.”

상위권 병원들 대다수가 수도권, 특히 서울 지역에 집중된 모습이었다.

동시에 유정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명성대병원, 세연대병원, 천하대병원 그리고 한국대병원……. 하나같이 최고의 병원들이지만, 그 병원들 모두가 연구에 참여한다면 자칫 수도권에 치우친 데이터를 얻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유정민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생각을 못 했다니.’

굳게 다문 입술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표정을 설명하기라도 하듯, 시현이 청중을 향해 말했다.

“연구 결과가 대표성과 신뢰성을 갖기 위해서는, 연구에 포함될 환자들의 성별과 나이 그리고 거주 지역 등을 실제 인구 분포와 비슷하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 말에 이광섭도 박동진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40대 여성의 데이터 위주로 개발한 AI 모델로는 70대 남성의 자살 위험도를 제대로 예측하기 어렵다.

거주 지역도 마찬가지.

향후 완성될 AI 모델을 수도권에서만 쓸 게 아니라면, 데이터 수집 또한 여러 지역에서 골고루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른바 ‘Big 5’라고 불리는 대형 병원들의 데이터가 많이 포함될수록, 지역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훨씬 더 많은 기관이 참여하도록 독려해야 했다.

차라리 대형 병원의 참여를 줄여 비율을 맞추는 것이 더 현실성 있었다.

“글쎄요.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한국대병원만 보더라도 전체 환자 중 다른 지역에서 오는 환자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정말 지역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지켜보던 김상진이 유정민을 대신해 반론을 펼쳤다.

그의 말대로 한국대병원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환자 비율이 30%에 육박했다.

서울에 있긴 하지만 사실상 전국구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니 지역 불균형 문제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을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집 근처 동네 의원에서 호전될 환자라면 일부러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가까운 병원을 두고 멀리 가는 것은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닌데, 굳이 그렇게 하는 데는 분명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한국대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의 증상이 더 심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증상은 비슷하더라도 질병에 대한 불안이 높아서 큰 병원을 선호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

조목조목 설명하는 시현의 모습에 김상진은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특진비를 포함한 진료비와 그 진료비보다 더 많이 드는 교통비를 감당할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경제적으로 더 나은 환자들만 더 반영하게 될 텐데, 어느 쪽이든 일반 인구를 대표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증상의 심각도와 경제적인 상황…….’

자살 위험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들.

대형 병원 위주의 데이터를 피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오, 밀리는 느낌이 전혀 없어요!”

“밀리다니? 저 정도면 압도하는 거 같은데? 역시 천시현!”

“방금 우리 과장님 표정 봤어요? 입이 귀에 걸리시겠는데요?”

시현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던 레지던트들이 눈을 빛냈다.

시종일관 예의를 갖춰 말하긴 했지만, 결국 당신네 도움은 필요 없다는 말 아닌가.

속에 꽉 막혀있던 것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까 치프 레지던트도 발표 잘하더니 이 친구도 준비 열심히 했구먼.”

“그러게요. 3년차가 이 정도면 삼아대병원은 도대체……. 혹시 펠로우 3년차 아니죠?”

“참, 이번에 전문의 시험 수석도 삼아대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던데…… 공부를 어떻게 시킨 거지?”

다른 병원 레지던트들도 신기하다는 듯 발표를 지켜보았다.

“그렇군요……. 그럼 어떤 병원들이 연구에 참여하는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김상진이 다시 손을 들고 시현에게 물었다.

‘수도권 편중을 걱정할 정도라면…….’

연구 참여를 희망하는 병원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

초반의 날 선 공세는 이미 사라졌고, 다만 도대체 어떤 병원들이 실제로 참여하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병원에서 이번 연구에 지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제야 김상진은 아까 시현의 연구에 긍정적인 피드백을 했던 교수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강경대병원, 충호대병원, 전라대병원 그리고 해운대병원까지.

하나같이 지방 거점에 위치한 병원들의 주임 과장들이었다.

‘이미 연구 참여를 결심하고 왔다는 건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면 애초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먼 곳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시현의 연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도 되었다.

경쟁자인 삼아대병원에서 기획한 연구라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혹평했을 뿐, 결과만 잘 나와준다면 기념비적인 연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연구였다.

관련 데이터로 논문 수십 편은 나올 테고, 어쩌면 그중 몇 편은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

대한민국이 십수 년째 OECD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연구는 그 시도만으로도 관심을 끌 수도 있었다.

연구 총책임자를 이광섭 교수가 맡는 것은 불만이었지만, 대표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좋은 기회였다.

‘지역별로 섭외는 마친 셈이고…… 그럼 이제 남은 자리는 얼마 없는 거 아닌가? 거기 포함되려면…….’

어느새 김상진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다음 순간, 자신과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교수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시현이 쐐기를 박았다.

“지역 분포를 반영하면 이제 서울 시내에서 추가로 받을 수 있는 병원은 ‘한 곳’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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