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Chapter 36. 채찍과 당근 (6)
“지역 분포를 반영하면 이제 서울 시내에서 추가로 받을 수 있는 병원은 잘해야 ‘한 곳’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시현이 쐐기를 박았다.
딩동!
[system : 업적 보상을 지급합니다.]
[매진 임박! 마지막 한 박스 남았습니다! - 희소성을 앞세워 참여 욕구를 폭발시킵니다. 연구 성공 가능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매우 어려움 난이도, 10,000P)]
‘한 곳 정도라고?’
김상진은 살짝 고개를 돌려 다른 교수들의 반응을 살폈다.
애초에 이쪽 도움은 필요 없었다는 사실에 다들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이를 어쩐다.’
그의 시선이 다시 연단 위를 향했다.
염치 불고하고 지금이라도 다른 교수들보다 한발 먼저 연구에 지원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망설이는 찰나,
돌연 시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웃고…… 있어? 어째서?’
지금 상황이 퍽 재미있다는 듯,
그의 얼굴에서 즐거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전부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가?’
자신들이 새로운 연구를 혹평할 것도,
그럼에도 이번 연구에 관심을 보일 교수들이 있을 거라는 것도,
그리고 남은 자리가 얼마 없다는 것을 알렸을 때의 반응까지도.
그의 등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나 병원 규모만 믿고 거드름을 피우던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한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될 판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일이었다.
- 김 교수, 자살 관련 연구해 볼 생각 없나? 우리 당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싶은데. 예산도 특별편성해서 넉넉하게 배정하고.
불현듯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배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 VIP께서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더라고. 임기 내에 자살률을 20% 이상 낮추는 걸 목표로 한다나……. 아무튼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얘기해 봐.
그 또한 각종 정책 회의에 참석하고, 학회 교수들을 중심으로 대응 방안을 꾸려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뚜렷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다 보니 노력에 비해 주목받을 일은 없다시피 했다.
‘확실히 이건 좀 다를 수도 있겠어.’
자살 예방을 위해 대기업과 협업한다는 것만으로도 기사화될 일이었다.
거기에 AI를 이용한 연구라니…….
방법론 또한 신선하지 않은가.
‘내가 주도했어야 할 연구인데……. 분명 내가…….’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연단에 선 시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중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인 시현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에게 뭔가 지적하려 했던 교수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표정이었다.
“두 번째 세션의 첫 번째 발표가 끝났습니다. 오늘은 발표 못지않게 질문과 코멘트가 활발한 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바로 다음 연자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광섭의 소개로 박동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내 연단을 향했고, 방금 발표를 마친 시현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걸 노렸던 건가…….’
처음 시현이 한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과장 섞인 도발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처음부터 다 계산된 발언이었다.
발표 순서를 고집했던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어.’
당근을 내걸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 입장에서,
채찍을 들고 지원자를 압박하는 입장으로.
순식간에 그 관계를 뒤집어 놓기 위함이었다.
만일 보상을 먼저 제시했다면,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참여를 저울질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가는 매우 가능성 있는 연구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준다면?
어쩌면 앞다투어 연구에 지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쪽에 앉은 교수들이 아까부터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만 해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박동진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제는 이쪽에서 확실히 보여줘야겠지.’
경쟁에서 살아남은 참가자가 최종적으로 얻게 될 보상이 얼마나 큰지.
삼아가 작정하고 나서면 어떻게 되는지를 제대로 알려줄 시간이었다.
그리고 경쟁을 부추기는 것.
그것은 그가 지금껏 회사생활을 하면서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소개 감사드립니다. 삼아전자 소프트웨어 사업부 전무 박동진입니다.”
연단에 선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개발자로서 30여 년간 일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회의와 행사에 참석했지만, 오늘처럼 여러 의사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의학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연자인 만큼, 청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내 좁은 연단에서 벗어나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솔직히 의학 분야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지 못하기에 드릴 말씀이 많지 않을 것 같고…….”
그는 빙긋 웃으며 슬라이드 한 장을 띄웠다.
핸드폰, 이어폰, 스마트워치부터 TV, 냉장고에 로봇 청소기까지.
집집마다 한두 대 정도는 있을 삼아전자의 제품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실은 저희 회사 제품을 홍보도 할 겸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요즘 가전 분야 매출이 예전 같지 않다고 회장님께서 걱정이 많으셔서요.”
하하하.
뜻밖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어디선가 본 기억들이 있으실 텐데요. 이 제품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삼아전자의 AI 기술이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용자의 음성을 인식하고, 평소 사용 패턴을 학습해 적절한 서비스를 추천하고, 화질이나 음질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굳이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정도로 친숙해진 내용이었다.
“역시… 다들 알고 계신 부분이라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네요. 그렇다면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조금 마음에 드셨으면 하는데…….”
그는 짐짓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청중을 바라보았다.
“추첨을 통해 이 제품들 몇 가지를 경품으로 드릴 예정입니다.”
오오오.
그의 말에 청중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박수 소리가 강연장을 메웠다.
얼마나 많은 수량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중 하나만 받을 수 있어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의의는 충분했다.
“삼아전자에서는 최근 생산 단계부터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불량률과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생산 단가를 낮춘다고?
AI라면 소프트웨어 분야일 텐데, 제품 가격까지 낮출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오늘은 이 주제, 실제 현장에서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발표를 진행할까 합니다. 아, 물론 경품 추첨도 하고요.”
하하하.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 그는 다음 슬라이드를 띄웠다.
그 속에는 여러 칩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전자제품 기판 사진 16장이 정렬해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회로가 밀집되어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저희 삼아 3공장에서 생산 중인 제품의 실제 모습입니다.”
의학 컨퍼런스에서 보는 반도체 사진이 낯설기만 했다.
“여기서 퀴즈를 드리겠습니다. 여기 사진 16장 중 3장이 불량인데, 어떤 것들이 불량인지 3개를 골라주시면 됩니다. 슬라이드 상단에 QR코드를 통해 원본을 확인하시고 정답을 입력하시면 되겠습니다.”
“오! 혹시 이거 맞추면 경품인가?”
“흠. 16개 중 3개면…… 당첨 확률은 낮은데?”
“근데 이게 눈으로 봐서 알 수 있나? 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몇몇 레지던트들이 눈을 빛냈다.
고가의 경품이 걸려있는 문제.
화면을 확대해서 보는가 하면, 미묘한 색깔 차이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불량품인지 감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회로를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너무 촘촘한 탓에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특히나 이 분야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에는 제품이 불량인지 여부를 육안으로 직접 판단하기도 했었습니다만, 공정이 미세화되면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청중이 끙끙대며 정답을 찾는 사이 박동진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불량품을 선별하는 것만큼 어떤 공정에서 불량이 나오는지를 조기에 발견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문제를 찾아서 개선해야 추가 불량을 막을 수 있고, 원가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자,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것 같으니 정답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다음 슬라이드를 띄우자, 불량 기판이 있던 자리에 붉은색 엑스 표시가 생겼다.
위이이잉 – 위이이잉 -
정답을 맞힌 사람들의 핸드폰으로 경품 당첨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고,
“와! 맞았어! 대박이다!”
“이것 봐! 나도! 나도!”
“크으. 이게 되네!”
강의장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6개 중 3개를 맞혀야 하는 고난도 문제.
의아한 점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환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일단 두 개를 정확히 찾은 분들께는 최신형 휴대폰을, 그리고 한 개만 맞힌 분들께는 올해 출시 예정인 무선 이어폰을 드리겠습니다.”
“와! 저 모델 엄청 비쌀 텐데.”
“엥? 한 개만 맞춰도 주는 거였어? 괜히 안 했네.”
“그러게. 밑져 봐야 본전인데 해 볼걸…….”
반대로 몇몇 레지던트들이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애초에 정답 확률이 낮으니 해 보나 마나 안 되리라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드려보고 싶은데요. 세연대병원의…… 나희선 선생님?”
박동진은 들고 있던 테블릿에서 뭔가를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네?”
“정답을 2개나 맞히셨는데, 어떻게 고르신 건지 방법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그게…… 눈으로는 도저히 찾기 힘들어서 사진 구석구석을 살펴봤는데, 영문으로 구성된 코드가 2개가 다른 사진들이 몇 있었습니다. 혹시 그게 불량을 의미하는 표시가 아닐까 해서…….”
“관찰력이 정말 좋으시네요! 사실 그 코드는 제품이 생산된 라인을 의미하는데, 특정 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불량품이 나올 확률이 커지니 그렇게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박동진이 그녀의 관찰력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두 개를 맞힌 분이 또 계신데요…… 삼아대병원의 고채연 선생님, 어떻게 고르셨습니까?”
“저도 비슷한 방법인데요. 사진 하단에 있는 수치가 다른 것들과 꽤 차이가 나는 게 있어서 골랐습니다.”
“역시 좋은 방법입니다. 공정에 문제가 생기면 소모되는 전력량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그 숫자는 그 부분을 반영한 겁니다.”
고채연이 수줍게 자신의 방법을 설명했고, 역시나 박동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 그리고 놀랍게도 3개를 다 맞힌 분이 계신데요! 삼아대병원의…… 황진호 선생님입니다. 오늘 준비된 상품인 테블릿, 핸드폰, 그리고 이어폰 모두를 드리겠습니다.”
오오오.
의국원들이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 선생님의 방법이 매우 궁금한데요?”
당첨 확률은 500분의 1 남짓.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확률인데, 앞선 두 사람이 놓쳤던 뭔가를 황진호는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저, 그게…….”
그러나 그는 머리를 긁적일 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뭔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은 분명 있었는데,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대답. 일단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게 그냥 찍어서…….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네요. 앞선 두 선생님들께서 억울해하실 것 같은데, 상품을 그대로 지급해도 될지…….”
박동진은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잠, 잠깐만요. 그냥 찍은 건 아닙니다! 뭐라고 딱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표면이 뭔가 이상한 느낌은 있었습니다!”
하하하.
황진호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농담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렇군요. 확실히 직감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죠.”
“그럼요!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마음의 눈으로…….”
그러나 다음 순간, 박동진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황진호를 바라보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눈…… 정말 좋네요.”
“네? 그게 무슨…….”
“정곡을 찌르는 훌륭한 표현입니다! AI의 본질을 꿰뚫어 본 분만이 하실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동진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오오오.
내… 내가?
황진호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