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75화 (175/195)

175화 Chapter 37. Young and Rich (1)

‘어? 이건 뭐야……?’

[4. ??? (대기중)]

정보가 가려진 4번째 기관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SORA : 현재 사용자와 계약을 맺기를 희망하는 새로운 회사가 존재합니다.]

‘새로운…… 회사?’

“두 번째 세션, 반응이 상당히 좋네요.”

뜻 모를 메시지에 대해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아, 전무님.”

“천 선생님 발표가 먼저라서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흐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박동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얼굴로 시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런데 표본이 전체 모집단을 대표해야 한다는 건, 전통적인 역학조사에서 더 중요한 개념 아닌가요? AI 연구에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게까지는…….”

“그 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지역 불균형이나 경제적인 요인도 가중치를 적용하면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것도요.”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알면서도 일부러 말했다는 건데.

갑자기 시현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데이터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양질의 데이터라…….’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

빅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상식과도 같은 말이었다.

오류가 많거나 결측치가 많은 데이터를 입력해서 만든 프로그램이 출력한 결과는 신뢰할 수 없다.

다른 분야도 아니고 환자의 생명과 건강 상태를 예측하는 연구라면 더더욱.

질 나쁜 데이터를 투입하는 건 맑은 물에 미꾸라지 한 마리를 풀어놓는 것과 같았다.

“이쪽에 적대적인 데다 참여 동기가 부족하고 가뜩이나 다른 일로 바쁜 병원에서, 자기들이 주도적으로 하는 연구도 아닌데 얼마나 신경 써서 제대로 된 데이터를 보내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참여 기회를 제한해서 경쟁을 유도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뭐든 처음이 중요한데, AI 모델에게 줄 ‘이유식’ 만큼은 엄선된 재료로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처음부터 우리 연구에 관심을 보였던 교수님들이라면 훨씬 더 좋은 데이터를 보내올 겁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데이터는 쌓여가고, ‘양의 문제’는 점차 해결될 터였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보다, 장기적인 완성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

‘이렇게까지 생각했을 줄이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박동진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크으. 역시! 천시현 선생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물론 저희 전무님 발표가 조금 더 좋았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어느샌가 다가온 김영광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개인 성향인지 아니면 회사 분위기인지.

상급자를 상대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런데 이렇게나 많이 지원해주셔도 괜찮나요? 아까 말씀하신 PC만 해도…….”

“하하하. 선생님들 시간을 0.1초라도 아낄 수 있다면야……. 아, 제가 써보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 절대 아닙니다.”

[system : 김영광 과장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

“아, 네…….”

“마침 예산도 넉넉해서……. 사실 별거 아닙니다. 하하하.”

프레임 어쩌고 할 때부터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의 웃는 표정이 유독 해맑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지만, 사실 이 AI 모델을 개발한다고 해서 삼아전자에 직접적인 이득이 되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같은 삼아 계열사라고는 해도, 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아무리 인재가 많고 돈이 넘쳐난다고 해도 간부급과 실무자를 파견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 정도의 지원을 해주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물론 그렇죠. 당장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니까……. 하지만 숫자가 전부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시현의 말에 박동진이 대신 대답했다.

숫자가 전부가 아니다, 라.

국내에서 가장 치열한 직장 중 하나라는 삼아전자의 중역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도 낭만적인 말이었다.

“실적 못지않게 기업 이미지도 중요한 세상입니다. 공익적인 성격이 있는 일에 투자하고 성과도 어느 정도 낸다면 더 좋을 테고요.”

“맞습니다! 아까 발표 때는 말씀 안 드렸지만, 어느 정도 성과만 낼 수 있으면 ‘사내벤처’에 지원할 수도 있습니다!”

박동진에 이어 김영광이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말했다.

“사내…… 벤처요?”

처음 듣는 생소한 말에 시현이 반문했다.

“저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는 직원들을 지원하는 제돕니다! 사내벤처에 지원해서 일단 채택만 되면, 회사에서 꿀을 빨…… 아니, 지원을 받으면서 자기만의 업무팀을 꾸릴 수 있게 되고요. 그게 사업성이 있으면 독립해서 창업할 수도 있습니다. 잘만하면 CEO가 되는 겁니다!”

‘CEO라…….’

그의 마음속에서 행복회로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껏 지원을 해줬는데 독립해버리면…… 회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을 텐데요. 직원이 좋은 아이디어를 들고 나가버리면 손해 아닌가요?”

시현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삼아전자는 신생기업의 지분을 갖게 되니 자회사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면도 있습니다.”

박동진의 설명에 시현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계약직 의사이긴 하지만, 자신 또한 삼아 그룹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요즘은 회사 내부에서도 격식과 예의보다 창의성과 사고의 유연성을 높게 치고 있습니다. 여기 같이 온 김 과장만 해도……. 아무튼…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박동진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크으. 역시 저를 인정해주시는 건 전무님밖에 없습니다. 천 선생님, 이번 연구 열심히 해서 사고 한번 제대로 치시죠! 저 새로운 회사에서 ‘이사’하고 싶습니다.”

“아, 네…….”

인정인지 체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성과 꼭 내야겠는걸요? 과장님 이사로 고속 승진하시려면.”

“그럼요! 당연하죠! 나중에 선생님도 함께하실 거죠?”

“제가요? 저는 병원에서 환자를…….”

“에이, 연구 처음 제안하신 분이 선생님이신데 선생님이 빠지면 안 되죠. ‘이사’ 자리 하나는 선생님 몫으로 남겨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이사요?”

벤처 기업 이사면 거의 창업 멤버 아닌가?

신생 IT 벤처기업들은 소수의 창업 멤버들로 구성되기에, 그들 모두가 중책을 맡는 것이 사실.

대외적인 인지도를 갖춘 이광섭이나 진철영이라면 모를까, 시현에게 그런 자리를 맡으라고 하는 건 예상 밖이었다.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리는 게 낫겠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박동진이 입을 열었다.

“당장은 의무기록을 분석해서 자살 위험도를 예측하는 것이 주된 목표이지만, 결국 ‘다양한 영역’에서 의사 선생님들의 진료를 보조할 수 있도록 연구를 계속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시현은 채이진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진찰 소견과 각종 검사 결과들을 활용해서 환자의 사망을 예측할 수 있는 AI 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의학 연구의 패러다임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테고요.”

“저는 이 분야에서 우리 삼아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융합의 시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융합이라…….’

CT나 MRI 소견을 대량으로 학습시켜 판독을 보조하는 AI를 개발 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최종 판독은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해야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결과를 보면 판독능력이 수준급이라고 했다.

실상 이미지 파일에서 패턴을 추출하는 기능을 의학적 진단에 적용한 것뿐이지만, 향후 정식으로 시장에 출시된다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터였다.

“동감입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IT 회사와 대학병원 둘 다를 가진 기업은 흔치 않으니까요.”

“삼아전자의 사내 벤처 선발 기준은 다양하지만, 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과 협력해서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경우 점수를 많이 줍니다. 그만큼 경쟁률도 높은 편이지만요.”

그 말에 김영광의 어깨에 한 뼘 더 넒어졌다.

후후후. 그걸 뚫은 게 접니다.

……라는 표정과 함께.

“모든 사업이 그렇지만, 이 분야도 ‘스토리’가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런 걸 좋아하니까요!”

김영광이 한껏 들뜬 표정으로 시현에게 말했다.

“스토……리요?”

“네! 환자 진료에 진심인 젊은 의사와 국내 최고의 기업에서 엄청난 경쟁을 뚫어낸 개발자가 합심해서 진료 보조용 AI를 만든다……. 크으으! 누구라도 그 기업에 투자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까부터 점점 더 가슴이 웅장해지는 김영광이었다.

“하지만 그런 배경보다는 결국 AI 모델의 성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성적이 뒷받침해주지 하지 않으면 결국 제대로 된 회사를 만들기 힘들 테니까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어차피 성적은 한참 뒤에나 나오잖아요? 제대로 된 실적이 나오기 전까지는 기대감으로 투자를 끌어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께서 ‘우리 회사’의 한 축을 담당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회사라니.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스타트업의 사옥이 이미 그려져 있는 듯했다.

[4. ??? (대기중)]

‘계약을 맺기를 희망하는 새로운 회사라는 게…….’

아마도 삼아전자의 사내 벤처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회사명을 알 수 없는 건 아직 설립 전이라서 그런 것 같고.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만…….”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현이 완곡히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이런 일일수록 확실히 해두는 게 중요했다.

“김 과장 말이 조금 앞서간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에요. 천 선생님 역할이 중요할 겁니다.”

박동진 또한 그를 거들고 나섰다.

“처음에야 삼아전자의 지원을 받아서 연구를 시작하겠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 낸다면 결국 독립해야 합니다. 팀에 의료인이 꼭 필요한 사업인데, 처음부터 함께한 선생님 말고 적임자가 또 있겠습니까?”

“물론 AI가 학습할 데이터가 의무기록이고 그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저는 임상 의사일 뿐입니다. 그런 중임을 맡기에는 부족합니다.”

당분간은 진료와 연구에 집중하기로 생각했던 터라 사업 부분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혹시 급여 문제 때문인가요?”

시현이 재차 거절 의사를 밝히자 박동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문의 취득 후 임상 의사로서 벌 수 있는 돈이 더 크지 않냐는 의미였다.

“꼭 그런 부분 때문이 아닙니다. 돈이 중요했다면 애초에 다른 연구를 시작했을 겁니다.”

일단 돈은 아니다, 라…….

박동진이 다시 물어왔다.

“그렇다면 논문이나 연구 업적이 중요한 건가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AI 특성상 어떻게 자살 위험도를 평가할 수 있는지 그 메카니즘을 설명할 수 없으니 학술적으로 어떻게 의의를 둘지…….”

“논문 역시 나중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장 치료 성적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간혹 상아탑에 틀어박혀 현실과는 동떨어진 연구를 하는 교수들을 종종 봐왔다.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연구들…….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들과는 결이 맞지 않는 느낌을 종종 받아왔었다.

그 말에 박동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시현은 실리적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군요. 당분간은 연구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보도록 하죠. 사업 이야기는 급한 건 아니니까.”

“네, 그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연구가 성공할 경우 분명 금전적인 보상도 뒤따를 겁니다.”

“이 연구가…… 돈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IRB에 연구 계획서를 넣을 때부터 이 연구가 돈이 되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박동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큰돈이 될 수도 있죠. 어쩌면 의사 수입은 우스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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