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Chapter 37. Young and Rich (3)
“맙소사. 86%라고? 어떻게 이런…….”
그러나 시현과 달리 타 병원 교수들은 강서현이 보여준 도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치료 반응률(Response rate).
어떤 치료를 했을 때, 증상이 절반 이상 호전된 환자들의 비율을 의미한다.
연구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항우울제의 초기 반응률은 50% 남짓으로 알려져 있다.
즉 효과가 있는 군과 없는 군이 반반이라는 건데,
이 반응률이 80% 이상이라는 건 대다수 환자가 약물치료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본다는 뜻이었다.
추가 연구를 더 해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이 정도라면…… 기존 치료제들의 성능을 아득히 상회하는 효과가 있다고 봐도 좋았다.
‘치료 반응률이…… 기존 약물들하고는 비교가 안 돼.’
‘거기에 이렇다 할 부작용도 별로 없고…….’
‘어떻게 저 정도 수치가? 출시되기만 하면 장난 아니겠는데?’
컨퍼런스 시작 전만 해도 별 기대 안 하고 밥 먹으러 왔다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눈에 띄게 술렁이고 있었다.
“아, 방금 이 부분은 아직 외부로 공개될 내용은 아니라서요. 오늘 참석하신 선생님들 ‘마음속에만’ 담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몇몇이 휴대폰을 들어 스크린에 뜬 도표를 촬영하려 하자, 강서현이 싱긋 웃으며 빈 화면을 띄웠다.
“오늘은 아무것도 못 보신 겁니다. 어? 방금 제가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죠?”
하하하하.
그녀의 농담에 분위기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잠시만요! 질문 있습니다.”
잠시 분위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네? 아, 말씀하십시오.”
보통은 발표를 모두 마친 후 한꺼번에 질문을 받는 터라 강서현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
“천하대병원 정약준입니다.”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교수가 자신을 소개하며 몸을 일으켰다.
‘정약준 교수…….’
이번 회차에서는 처음 만났지만, 회귀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국내 약물 연구의 1인자를 꼽으라면 늘 거론되는 정신약물학의 대가였다. 특히 항우울제 분야에서 그가 투고한 논문들은 외국 교과서에 인용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몇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단…….”
“아, 정약준 교수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를 알아본 강서현은 이내 활짝 웃어 보였고, 정약준의 날 선 태도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아, 네……. 발표 중간에 질문해서 실례인 줄은 알지만, 약물에 반응이 있는 환자가 80% 이상이라고 하셨는데…… 이게 일반적인 수치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그는 빈 화면 대신 강서현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정확한 Response Rate는 86.5%로, 200명 가운데 173명에서 반응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지금껏 발표된 어떤 항우울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실로 놀라운 성적인데, 이렇게 좋은 결과를 보니 한편으로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부분이 우려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강서현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불쾌한 기색은커녕 대가로 알려진 정약준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세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첫 번째로, 상상 이상으로 결과가 잘 나오다 보니 혹시 진단과 치료 과정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환자 평가는 어떻게 하신 겁니까?”
예의를 갖춰 말하긴 했지만, ‘너희가 보여준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나 마나 치료 후 우울증 평가 점수를 너무 후하게 줬겠지. 아니면 진단이 잘못되었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비록 강서현이 화려한 연구 경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의료인은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환자를 평가한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항우울제 신약은 전 세계적으로도 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
기존 치료제와 비슷한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일인데, 이렇게나 압도적인 효과를 내는 약물을 개발했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그 어려운 일을 실제로 해냈다고 믿기 보다는 결과 판정에 오류가 있었다고 하는 쪽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다.
“환자 평가는 삼아대병원 정신과의 교수님 그리고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애써주셨습니다. 평가 도구는 HAM-D, MADRS를 2주, 4주 그리고 8주에 시행하였습니다. 감별진단을 위해서는 MINI 인터뷰를…….”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강서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연구 과정 전반을 달달 외우고 있는 듯, 그녀의 답변에는 거침이 없었다.
‘삼아대병원에서 평가했고 도구도 적절해. 진단에도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치료 반응률이 지나치게 높은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으나 딱히 지적할 것이 없었다.
“음… 그렇다면 이 연구에서 환자와 대조군 모집은 얼마 동안 이뤄진 겁니까?”
그는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2년이 조금 못 걸린 것 같습니다.”
“네? 어떻게 그렇게나 빨리…….”
환자군만 200명 정도라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연구인데,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냈다.
대학병원 여러 개가 참여했다고 해도 그게 될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진행 속도였다.
“얼마 전부터 환자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을 타서 연구 참여를 원하는 분들이 대폭 늘었습니다. 기존 치료로 효과가 충분하지 않았던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강서현은 그렇게 답변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 시현을 바라보았다.
- 여기 천시현이라는 의사 선생님이 새로 나온 아주 좋은 약을 써준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저도 그거 써볼 수 있을까요?
- 그 TMS 치료라는 것도 신형기기로 받을 수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지원할 수 있나요?
연구 참가 동의서를 쓸 때마다 환자들이 곧잘 하던 말이었다.
폐쇄 병동이 없어지는 상황을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했던 것이 뜻밖에 리서치센터에도 이득이 되었다.
‘커뮤니티의… 입소문? 그걸 연구 대상자 모집에 활용할 줄이야.’
강서현의 말에 정약준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구에 적합한 대상자를 빨리 모집할 수만 있다면 연구의 진행 속도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간혹 지역 광고를 통해 지원자를 모집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런 식의 바이럴 마케팅(?)을 활용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실상은 치료에 반응이 좋았던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남긴 게시글 때문이었지만, 그로서는 리서치센터에서 홍보를 열심히 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아까 ASP-9022의 부작용을 조사한 표를 보면, 부작용이 거의 없다시피 하던데…….”
정약준은 강서현이 보여주었던 이전 슬라이드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네. 일부 환자에서 소화불량과 졸음 정도를 호소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거의 플라시보(위약, 치료제와 모양이 같은 가짜 약)와 비슷한 수준 아닙니까? 치료제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거기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준비된 마지막 질문이었다.
어떤 약물이 효과를 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일부 부작용이 적은 약들도 물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로 없다는 건 부작용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 그 부분을 미처 설명드리지 못했었네요.”
이번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강서현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사실 ASP-9022는 임상 전 단계에서 항정신병약물로 개발된 제품입니다. 임상 초기에는 10mg~20mg으로 시작해 60mg까지 증량할 계획도 세웠었고요.”
“오, 그렇다면 연구 방향이 바뀐 거군요. 항정신병 약물에서 항우울제로요.”
미처 모르고 있었던 사실에 정약준은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네, 그 과정에서 도파민에 대한 Partial agonist(부분효현제)로 작동할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고 용량도 대폭 줄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용도가 바뀌면서 원래 계획보다 낮은 용량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부작용 발생이 최소화됐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감량을 했길래…….”
“원래 용량의 10분의 1인 1mg로 시작했고, 노인의 경우 그 절반인 0.5mg로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대답에 정약준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ASP-9022를 최소 용량으로 투여했을 때 뇌 신경계에서 벌어질 일들이 순차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오류가 아니다.’
그야말로 기존 항우울제들이 갖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기전.
낮은 용량에서 시작하기에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다른 항우울제들과 완벽하게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약물이었다.
“그렇군요…….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거 삼아대병원에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있었군요.”
그제야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가 될 항우울제의 개발 과정을 직접 보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 이룬 것보다 더 대단한 성과일 수도 있었으나, 그는 남이 이룬 성취를 부정하지도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서현의 얼굴에 더없이 상냥한 미소가 번졌다.
‘저 정도의 반응이라면…….’
정신 약물학의 대가로 알려진 그가 극찬에 가까운 호평을 한 상황에서, 그에 못 미치는 다른 교수들이 쉽사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진정한 전문가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정약준의 질문 몇 가지에 답하다 보니 그녀가 많은 시간을 들여 설명해야 할 내용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후속 연구가 더욱 기대되네요. 강 연구원님이 정말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제가 한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연구 책임자가 한 일이 없다니, 그게 무슨…….”
지나친 겸손도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강서현이 입을 열었다.
“연구 디자인부터 피험자 모집까지 삼아대병원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시현을 향했다.
레지던트들이라고 두루뭉술 말하긴 했으나,
ASP-9022 연구를 디자인할 때도, 환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도, 단연 시현의 공이 가장 컸다.
강서현뿐 아니라 몇몇 레지던트들 또한 시현을 돌아보았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딩동!
[SORA : ‘존재감 포션’을 사용합니다.]
새로 떠오른 메시지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등 뒤에서 후광이 켜지는 느낌과 함께,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더 늘어났다.
객석에 앉아있음에도 무대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레지던트가 이 연구를 디자인했어?”
“피험자 모집에… 아까 환자 평가까지 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말한 레지던트가 아까 그 AI 연구 발표했던 그 친구인가?”
강연장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왜 말하기도 전에…….’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SORA : 시스템 관리자가 사용자의 업적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애초에 공부와 교수님 말씀 잘 듣기를 강조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텍스트 너머 뿌듯하게 웃고 있을 시스템 관리자, 강성진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레지던트들이 연구에 기여… 했다고?’
어수선한 강의장 분위기에 정약준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근무하는 천하대병원 레지던트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좋은 주제를 손에 쥐여주고 밥상까지 다 차려주면서 같이 하자고 해도 도망가기 일쑤인 녀석들인데…….’
그의 제자들은 전문의 시험 응시 자격을 위한 최소한의 논문만 쓰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연구와는 담을 쌓곤 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견고하기 그지없는 담을.
어떻게 해야 연구 책임자의 입에서 저런 식의 감사 인사가 나오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앞선 발표들 모두 3, 4년차 레지던트들이 한 걸 보면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돼먹은 병원이길래…….’
치료 반응률도, 연구 진행 속도도, 그리고 레지던트가 연구에 적극적이라는 것도.
한 마디로 모든 게 이상한 병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