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Chapter 37. Young and Rich (4)
어떻게 해야 연구 책임자의 입에서 저런 식의 감사 인사가 나오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앞선 발표들 모두 3, 4년차 레지던트들이 한 걸 보면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돼먹은 병원이길래…….’
치료 반응률도, 연구 진행 속도도, 그리고 레지던트가 연구에 적극적이라는 것도.
한 마디로 모든 게 이상한 병원이었다.
모든 질문에 답하고 난 뒤, 강서현은 다시금 발표를 이어나갔다.
“……지금까지는 현재 진행 중인 제 2상 임상시험 결과 보고였습니다. 지금부터는 향후 연구 진행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 개발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
전임상(Pre-clinical) 단계인 동물실험부터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을 진행하고, 제품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10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부지기수.
강서현이 방금 말한 제2상 임상시험은 신약의 효과와 안정성을 증명하는 단계로, 여기서는 적정용량과 용법을 결정한다.
대개 100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대상자 모집부터 연구 진행까지 상당한 공력이 소모되는 작업이었다.
“잠깐만. 향후 계획이라는 건… 임상 2상이 벌써 마무리 단계라는 건가?”
“그렇다면 곧 3상을 할 수도 있다는 건데…….”
“빠르면 몇 년 안에 시장에 나올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닌가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판허가를 얻기 위한 마지막 단계, 3상 시험을 시작하려는 듯했다.
아까부터 좌중의 시선은 모두 강서현이 띄운 슬라이드에 꽂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일단, 국내에서 항우울제를 자체 개발하여 출시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개발했냐를 떠나 환자를 더 잘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약이 시장에 나온다는 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돈이 되는 정보였기 때문.
‘아직 언론에 공개 안 된 거겠지?’
‘삼아리서치센터가 어디 자회사더라? 삼아생명? 아니지, 이거 개발한 회사에 투자해야 하나?’
‘얼른 마누라 몰래 증권 계좌부터…….’
바이오 관련주가 꿈틀거리던 시절이었다.
제대로 된 임상시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신약 후보 물질의 효과가 기대된다는 ‘주식 전문가’의 말 한마디로 주가가 급등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정신약물학의 권위자 정약준 교수가 호평한 연구라면?
검증되지 않은 찌라시와는 차원이 다를 터였다.
신약 개발만으로도 분명한 호재. 거기에 방금 발표에서 본 대로라면 앞으로 임상 3상에서도 틀림없이 좋은 성적을 낼 것 같았다.
전 재산을 들고… 아니, 빚을 내서라도 뛰어들어야 할 판이었다.
“앞으로 기술 수출 계약에 대해 협의하고 있습니다. 계약을 완료하는 대로 글로벌 3상과 국내 3상을 동시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기술 수출.
신약 개발 업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말이었다.
계약금만으로도 수백억 단위의 돈이 오가고, 약품 개발 과정의 단계 단계마다 추가로 비용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약이 상용화되면, 판매액의 일정 비율을 로열티로 받게 된다.
“후보 물질이 신약으로 출시될 가능성은 0.1% 정도입니다. 하지만 ASP-9022의 경우 여러 과정들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이제 3상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다섯 곳의 다국적 제약회사와 협의 중입니다.”
오오오.
다섯 곳이라면, 사실상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여러 교수님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 최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강의장을 가득 메웠고,
맨 앞줄에 앉은 교수들은 나라 잃은 표정으로 연단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정도였다니…….’
적당히 앞서가면 질투라도 할 텐데, 이건 그럴 수준이 전혀 아니었다.
직접 참여하는 연구는 아니었음에도, 이 자리에 초대되어 최근 진척상황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아까 정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항우울제로서 아주 유력한 약물이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강서현의 발표까지 끝나자 이광섭이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질문이나 코멘트 있으시면 해주십시오.”
그 말에 여기저기서 바쁘게 손이 올라왔고, 그중 한 명이 잽싸게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한국대병원 김상진입니다.”
앞선 발표자들을 지적하다 체면을 구긴 그였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쩌면 국내 정신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연구.
그 연구에 어떻게든 이름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삼아대병원과 리서치센터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 젊은 연구원이야 삼아대 레지던트들을 치켜세우고 있지만 리서치센터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연구 성과를 삼아대병원과 나누기보다 독차지하고 싶을 테고,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대학병원들을 끌어들여 삼아대병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도 쓸 수 있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1, 2상 연구까지는 삼아대병원 본원과 분원들 수준에서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2상의 10배 수준으로 규모가 커지는 3상 연구가 시작되는 순간 다른 병원들에도 기회가 생길 터.
그로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아주 흥미롭고 놀라운 발표였습니다. 치료 반응률이 80%를 넘는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저도 몇몇 신약 개발 연구에 참여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귀신같은 태도 변화와 함께 입에 발린 말을 술술 내뱉는 그를 보며 같은 테이블의 교수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휴 저 양반……. 이럴 땐 또 제일 빨라.’
‘우리한테 총알받이 시켜놓고 혼자 살겠다는 건가?’
‘잠깐만. 설마 아까 뜬금없이 칭찬한 것도 이런 노림수가?’
레지던트들의 발표에 쓴소리하는 듯하다가도 결국은 호평으로 마무리한 것이 혹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는지…….
그의 ‘처세술’에 얄미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는 교수들이었다.
“긍정적인 피드백 감사드립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애써주신 덕분입니다.”
강서현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도, 여전히 삼아대병원 레지던트들이 모여 앉은 쪽을 일별하며 답했다.
“그런데 3상을 시작하려면 대규모 연구가 수행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환자 모집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역시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제일 어려운 부분을 잘 지적해주셨는데요…….”
강서현이 짐짓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으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들.
김상진은 흠칫 놀라 다시 연단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 교수님을 모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향후 연구에서는 훨씬 더 많은 대상자가 필요한 만큼,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다른 교수들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당연히 그렇게 나왔어야지.’
평소 그들에게 발에 치이도록 들어오는 것이 제약회사 측의 연구 제안이었다.
보통 때라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연구 제안을 거절했을 터.
하지만 오늘 발표에 나온 연구들, 특히 마지막으로 발표한 연구는 몹시도 구미가 당겼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떤……?”
김상진이 짐짓 모르는 척을 하며 되물었다.
‘보나 마나 연구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하겠지?’
아마도 여러 센터에서 동시에 연구를 진행하자는 제안일 테고, 환자 모집만 열심히 한다면 3상에서는 삼아대보다 더 많은 환자들을 모집해서 큰소리를 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 환자 ‘의뢰’입니다. 진료 중에 혹시 연구 대상 기준에 부합하는 환자분들이 있으면 저희 센터로 많이 보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답변에 김상진의 눈이 커졌다.
‘의뢰…… 라고? 참여가 아니고?’
그는 눈만 깜빡거릴 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연구 대상자가 될만한 환자를 삼아리서치센터로 보내 달라는 뜻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리서치센터도 좋고 삼아대병원 정신과도 좋습니다. 이번 연구는 저희 두 기관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니까요.”
김상진의 눈매가 점점 더 가늘어졌다.
“그렇… 군요. 하지만 그런 방식이라면 ‘협조’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의뢰해주시는 교수님들께서 절차상 번거롭지 않도록 진료의뢰센터를 통해 원스톱으로…….”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강서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상진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루라도 빨리 연구를 수행해야 신약 출시가 빨라지고, 환자들에게 더 좋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빠를수록 좋죠.”
“그러려면 많은 인원에게 동시에 약물을 투여하고 평가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여러 곳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유리할 테고요.”
“네? 그렇게 되면 환자 평가를 위해 훨씬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할 텐데요…….”
“오, 그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김상진이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네? 아까는 분명 인력 부족 때문에 연구에 참여하기가 어렵다고…….”
강서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곳곳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력 없다더니 레지던트들 가둬놓고 일 시킬 속셈인가?’
‘음. 그렇게 부려먹기는 펠노예가 제격인데……. 교수 자리 준다고 꼬드겨서 붙들어두려나?’
‘참나.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인력을 어떻게 충원하겠다는 것인지 그의 변명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교수들의 시선에 김상진은 민망한 듯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삼아대병원 한 곳이 아닌 여러 병원이 참여하게 하려면 ‘학회’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좋아 보입니다.”
“학회……요?”
“네. 한국정신약물학회도 그렇고 한국정신의학회도…… 여러 대학병원 교수님들은 물론 개원의들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회입니다. 학회 이사로서 최대한 참여를 ‘독려’ 해보겠습니다. 허허허.”
다음 순간, 그를 바라보는 주변 교수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끼워달라는 말을 저렇게 생색내면서 할 수가…….’
‘오, 학회! 자연스러웠어!’
‘음… 나름 괜찮네. 비굴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만 된다면 교수들 모두 연구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어느새 그들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웃고 있었고,
“학회에서 도와주신다니……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확실히 연구 진행 속도가 탄력을 받을 것 같습니다.”
강서현의 반응 또한 또한 긍정적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죽 쒀서 개 주는 것도 아니고.”
“와… 돈 좀 되겠다 싶으니까 숟가락 얹는 것 보게.”
“아까는 그렇게 칭찬을 해대더니 갑자기 저쪽하고 일하겠다고?”
반면 점점 더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삼아대병원 레지던트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현 또한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찰나.
“좋은 제안 감사드립니다. 저희 임상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강서현이 상냥하게 웃으며 교수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딩동!
다음 순간 떠오른 알림창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system : 리서치센터 연구원 강서현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