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Chapter 37. Young and Rich (5)
“좋은 제안 감사드립니다. 임상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딩동!
[system : 리서치센터 연구원 강서현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
강서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떠오른 알림창.
그 내용을 확인한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지?’
학회 소속 교수들의 도움이라면 리서치센터에도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닐 텐데…….
겉으로는 김상진의 말을 반기는 듯했지만, 사실은 그리 도움이 될 일도 감사할 일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강서현의 의도가 궁금했으나 일단은 지켜볼 따름이었다.
반면 김상진은 자신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경우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실, 대규모 연구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 치명적인 부작용도 나타날 수 있고요.”
“맞습니다. 중추신경계를 타겟으로 하는 약물인데도 범혈구감소증이나 심한 피부 발진이 발생해서 곤란한 케이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차라리 부작용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치는데, 신약의 경우는 부작용인지 아니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식으로 나타난 현상인지 구분도 어렵죠.”
“음…… 아주 난감한 경우겠네요.”
“그렇습니다. 약물과는 전혀 상관없이 발생한 일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할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 권위 있는 교수님들이 모여있는 학회에서 의견을 낸다면 훨씬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강서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고 경한 부작용이야 별문제 없이 지나갈 가능성이 크고, 심한 부작용이라고 하더라도 관련성만 명확하다면 대응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일로 대상자와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은 매우 까다로웠다.
가령 임상 시험 도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환자가 발생했다면?
약물과는 전혀 무관한 이유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유족 입장에서는 미심쩍은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환자가 대조군에 포함되었고, 실제로는 위약(가짜약)을 복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어도 끝내 소송까지 불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치명적인 부작용을 은폐하기 위해 기록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된다고 하더라도 임상시험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연구 진행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3상에 들어가게 되면 훨씬 더 많은 일이 생길 텐데, 그럴 때일수록 내 편이 많은 게 좋은 것 아닙니까?”
확실히 그럴 때는 한 사람이라도 이쪽 편에 서서 의견을 내줄 사람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의 집단인 학회라면 더더욱 도움이 될 터였다.
‘쉽게 거절할 수는 없을 테지…….’
김상진은 완전히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강서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필요한 논란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병원 한 곳에만 몰아서 모집하는 것보다 여러 곳에 분산하는 쪽이 적절합니다.”
“불필요한 논란이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김상진이 슬쩍 이쪽 눈치를 보며 운을 뗐다.
“아무래도 삼아대병원과 삼아리서치센터는 같은 계열사이기도 하고…… 팔이 안으로 굽는 건 당연하지만, 자칫 ‘일감 몰아주기’로 보일 수 있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그건 지나친 억측 아닙니까?”
그의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이광섭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공교롭게도 마침 리서치센터의 수장이 삼아 그룹 회장의 아들인 강병우일 뿐,
애초에 부당 이득이나 탈세를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일반적인 일감 몰아주기와는 그 결이 다른 일이었다.
“아, 당연히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의심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연구의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다른 기관이 포함되는 게 유리할 테고요.”
같은 계열사에서 진행하는 연구인 만큼, 삼아대병원 의사들이 약물 효과에 대해 다소 좋게 평가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공정성을 위해서?
그 말에 이광섭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임상 연구에서는 일부 대상자에게 위약을 쓰고 그 정보를 가려 통제한다.
약물 효과를 기대한 나머지 은연중에 약물 투여군에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막기 위함인데, 이렇게 하면 일부러 좋은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
연구자가 환자가 치료제를 먹는지 위약을 먹는지 알 수조차 없는데 공정성 타령이라니…….
김상진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굳이 지적하는 의도가 너무도 뻔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다른 교수님들도 비슷한 생각이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환자 의뢰만으로는…… 아무런 이득이 없지.’
단순 의뢰만으로도 난치성 우울증 환자에게 신약을 무상으로 공급할 수 있으니 분명 좋은 기회였으나, 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아무런 보상 없이 환자만 보내주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삼아 쪽 좋은 일만 시키는 게 아닌가…….’
연구 실적으로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던 만큼, 국내 최초의 항우울제 신약 연구에서 들러리 역할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애초에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절대 못 참는 인물.
이 좋은 기회를 이광섭이 독식하게 놔둘 수 없었다.
“……해서 의뢰도 좋지만, 이왕 하는 거 직접 참여는 어떻겠습니까? 학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교수님들이 함께한다면 훨씬 ‘공신력 있는’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상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새로운 항우울제 ASP-9022가 하루빨리 제품으로 출시될 수 있도록 저희가 힘껏 돕고 싶습니다.”
[system : 김상진의 주된 감정은 ‘기대감’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시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학회 내에서도 욕심이 많기로 소문난 교수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좋은 기회에 숟가락을 올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공신력…… 확실히 설득력 있는 말씀이네요.”
긍정적인 반응에 김상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애초에 삼아대병원에서 시작한 연구이니 나중에 합류한 그가 주축이 될 수는 없었지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일단 데이터 나오는 것 봐서 적당히 논문을 쓰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데이터를 고문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얻어걸리는 게 있을 테고,
그도 아니면 숫자 몇 개 바꿔서 어떻게든 끼워 맞추면 될 일이었다.
‘IRB 서류 미리 준비해놓고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하고 썼다고 하면 되지. 알게 뭐야?’
연구 윤리와는 거리가 먼 그였으나, 논문 빨리 쓰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약물에 대한 반응이야 지극히 생물학적인 부분이라 지역 분포 같은 요인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서울 시내 주요 병원만큼 연구 대상자 모집하기 좋은 곳도 없을 겁니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우울증 신약의 대표 연구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학회에서 큰소리칠 생각에 그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가기 시작했다.
“좋은 제안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강서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와, 화병 생길 거 같아. 자낙스(Xanax, 신경안정제의 일종)라도 하나 챙겨 먹어야지 진짜…….”
“시현아,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맞아! 연구 디자인도 그렇고 2상 연구도 우리가 다 하다시피 했는데, 저걸 저대로 두고 봐?”
지켜보던 레지던트들은 또다시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나 시현은 차분한 얼굴로 연단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강서현은 싱긋 웃어 보였다.
[system : 리서치센터 연구원 강서현이 거짓을 말합니다. (99.9%)]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여전히 그녀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리서치센터에 학회의 도움 따위는 필요치 않다.
“일단은 좀 더 들어보죠.”
상황을 지켜본 시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확실히 대상자 모집에 유리한 면이 있겠군요. 그런데 이미 진행 중인 연구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말씀하신 대로라면 ‘앞으로’ 저희와 함께 연구를 수행할 여력이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까요?”
여전히 묘한 분위기 속에 강서현이 입을 열었다.
“당연합니다. 이런 기념비적인 연구에는 없는 인력을 만들어서라 참여해야죠!”
조물주인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상진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강서현의 다음 말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전 세션에서 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다음’ 연구부터는 꼭 여러 교수님께 의견을 구하고 도움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왜 이번이 아니라 다음인 것인지?
김상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서현을 바라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저희 센터 단독으로 참여 기관을 정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임상 3상 연구가 진행될 예정인데, 그때부터는 글로벌 임상 단계로 넘어가게 되어서요.”
“아, 그렇……군요.”
체면은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온갖 사탕발림을 한 터라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이번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신 만큼 몇 가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다수 해외 제약사에서 이번 연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강서현은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그중 한 곳에서 매우 파격적인 조건으로 ASP-9022에 대한 기술 이전을 요청해 왔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이라면 어떤?”
남의 집 잔치가 될 가능성이 컸지만, 파격적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했다.
“아직 대외비라서 정확한 금액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국내 제약회사에서 기술 수출로 올린 매출의 최고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동시에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 다나아생명과학 당뇨병 치료제 후보 물질로 9,000억 대 기술 수출 계약 체결. 국내 제약사 최초로…….
‘최소 9천억 이상…….’
어쩌면 조 단위가 될지도 모를 계약 소식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다른 교수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몇 교수는 물을 마시다 사례라도 들린 것마냥 연신 헛기침을 했고,
특히 평소 신약 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정약준과 유정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광섭 교수… 잘도 이런 걸 감추고…….’
김상진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좌장석에 앉은 이광섭을 올려다보았다.
이광섭의 반응 또한 다른 교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덜덜덜.
타는 목을 축이려 잡은 물잔이 가늘게 떨렸고,
얼마나 놀랐는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광섭을 제법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아니, 저 양반도 모르고 있었어?’
제법 먼 거리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무지 사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삼아대병원 레지던트들의 분위기 또한 비슷했다.
그들 또한 단체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연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하나 더 전할까 하는데요.”
여기서 뭘 더 놀라게 하겠다는 건지.
청중의 이목이 온통 그녀에게 쏠렸고,
[SamA & IM Bio-Chemical]
새로운 슬라이드 한 장이 화면을 채웠다.
딩동!
그리고 동시에 시현의 눈앞에도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SORA : 사용자와 계약을 원하는 기관 정보가 갱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