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81화 (181/195)

181화 Chapter 37. Young and Rich (7)

“‘선물’은 마음에 드세요?”

강서현이 가장 먼저 다가와 시현에게 말을 걸었다.

작은 선물이라더니.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도 얼떨떨하네요.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미안해요. IM바이오 대표님 요청도 있었고 어제까지는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예요?”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섞인 미소가 떠올랐고,

“그럴 리가요! 오히려 과분한 보상처럼 들리던걸요.”

시현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래요? 도대체 얼만 줄 알고?”

“그건…….”

지금껏 없었던 규모의 기술 수출 계약금.

아무리 일부라고는 해도 시현으로서는 지금껏 만져본 적 없는 액수일 것이 분명했다.

“선생님은 이번 일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아직 모르고 계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며 강서현은 얼마 전 미팅을 떠올렸다.

* * *

“세상에! 이걸 놓칠 뻔했었다고요?”

다국적 제약회사 CSK의 아시아태평양지부장, 헨리 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작정 도파민 점유율을 높이다가 부작용이 생겨서 퇴출될 뻔했다는 말 아닙니까?”

회사 중역들과 리서치센터 그리고 IM바이오 측 사람들까지 모인 자리였지만, 워낙 감정 표현에 거침이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처음엔 그랬지만 중간에 연구 방향을 바꿔서…….”

리서치센터 연구원 임정석이 변명하듯 말했으나 헨리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물론 용량을 낮춰서 우울증 치료에 쓴 건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2상 연구의 중간 결과 보고서를 확인한 후로, 그의 얼굴에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저런 반응이라니…….’

강서현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글로벌 임상을 수도 없이 진행한 경험이 있는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보았다.

애초에 실무자만 보내도 될 미팅에 직접 온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긴 했지만.

“주요우울장애가 다가 아니에요. 이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신경전달물질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어요!”

“신경전달물질 안정화라면…….”

“도파민과 세로토닌 시스템의 불균형을 회복시켜줄 약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

뇌 내 신경전달물질 가운데 가장 많이 연구되고 또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두 물질.

지금껏 출시된 정신과 약물 대부분이 이 두 신경전달물질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기에 이 둘의 균형을 잡아준다는 건 생각보다 의미하는 바가 컸다.

“우울증 외에도 양극성 장애와 각종 불안장애 그리고 어쩌면 뚜렛장애에서도 쓸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파킨슨병 환자에서 동반되는 일부 증상에도 효과가 있을 테고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기 위해 상대가 가진 패를 깎아내리기는커녕, 이미 한 팀이 된 양 앞으로 연구를 어떻게 해나갈지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프로젝트, 우리와 합시다.”

그는 본심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누가 얼마를 제시하든 그 이상을 드리죠.”

* * *

“……가치를 모른다고요?”

“네. 이번 연구로 끝이 아닐 테니까요.”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까운 효능이 있다고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미팅이 끝나고 관련 문헌들을 추가로 확인했을 때 비로소 헨리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끝이 아니다, 라.’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시현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의학 정보실.’

[SORA : ‘의학 정보실’에 접속합니다.]

알림창과 함께 눈앞에 여러 정신 질환에서의 신경 생물학적 이상에 대해 다룬 논문들이 펼쳐졌다.

그중 상당수는 시현이 ‘일일 퀘스트’를 통해 접했던 내용이었다.

“하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활용도가 더 높을 수도 있겠네요. 더 다양한 질환에서요.”

시현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처음 연구 주제로 삼았던 조현병은 제외하고라도 양극성 장애, 불안장애, 그리고 뚜렛장애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고…… 그리고 파킨슨병과 BPSD(치매의 행동심리증상) 에도 어느 정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얼마 전 CSK와의 미팅에서 헨리가 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이었다.

마치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그러나 오늘 발표가 있기 전까지 모든 사항은 극비에 부쳤었고, 시현에게 그 날의 회의 결과를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어떻게…….”

강서현으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굴지의 다국적 제약사인 CSK의 지부장과 이제 막 약물 연구에 입문하다시피 한 시현이 정확히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ASP-9022를 첫 환자에게 썼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Mood stabilizer(기분 조절제)로 활용될 여지가 많아 보였거든요. 아직 허가 사항이 없어서 써보지는 못했지만.”

시현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난치성 우울증 클리닉에서 유독 잘 낫지 않는 환자를 많이 접했고, 그럴 때마다 틈틈이 생각해봤던 내용이라는 말과 함께.

“그런 거였군요.”

강서현은 호기심이 해결되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약물의 분자식과 약리학적 특성을 검토하여 활용도를 짐작했고,

시현은 환자를 어떻게 더 잘 치료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약물의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했다.

과정은 달랐지만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이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허허허, 우리 이 과장님이 아주 훌륭한 제자를 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대화를 나누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시종일관 훈훈한 분위기 속에 이광섭이 천하대병원 정약준 교수에게 사의를 표했다.

“천시현 선생이라고 했나요?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

시현이 그가 내민 손을 가볍게 쥐었다.

“이제 3년차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까 AI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번 약물 연구에도 참여했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저희 SI바이오에서 꼭 영입해야 할 인재 중 한 명이죠.”

강서현이 시현을 대신해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 강 선생은 사람 욕심이 아주 많군요. 그런데 감당이 될지 모르겠어요?”

“네? 감당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은퇴하고 소일거리 하는 셈 치면 되니 월급 조금만 줘도 흔쾌히 나서겠지만, 벌써 이렇게 유능한 친구는 오라는 곳이 많을 것 같은데…….”

정약준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여느 임상 의사 못지않게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 그 부분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업계 최고 수준을…….”

“아니, 그렇게 두루뭉술 말해서야 쓰나.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오늘 이 자리에서 정확히 짚고 넘어갑시다. 내 어디 가서 소문 안 낼 테니. 허허허.”

내심 시현이 받게 될 액수가 궁금한 정약준이었다.

궁금하기는 모두가 매한가지.

돈 이야기가 나오자 주변 레지던트들이 귀를 쫑긋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강서현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만……. 임상 성공으로 모든 단계별 기술료를 다 받는다고 가정했을 때, 총 기술 수출 규모는 10억 달러 이상, 계약금은 10% 이상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CSK를 제외한 다른 회사들에서 써낸 최대 금액이 그 정도였으니, 사실은 더 올라갈 수도 있었다.

“헉! 10억 달러?”

“1조…… 이상이라고?”

“확정적으로 받는 액수만 최소 1000억이 넘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실제도 듣게 되니 절로 감탄이 나오는 액수였다.

“저, 그런데 SI바이오에는 어떻게 투자할 수 있어요?”

황진호가 더없이 초롱초롱한 눈을 하며 물었다.

“아, 당장 투자는 어려울 겁니다. 아직 기업공개가 되지 않은 비상장사라서요. 저희 리서치센터도 마찬가지고 모회사라고 할 수 있는 IM바이오도 얼마 전부터 거래 정지 상태라…….”

그녀의 설명에 황진호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하기야 이미 주식이 상장된 상태였다면, 자칫 주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들을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투자 수익은 우스울 정도로 기회는 많을 테니까요.”

“오, 무슨 기회인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기술 수출이 성사되면 연구 기여도에 따라 인센티브로 제공할 겁니다. 이번 연구처럼 특정 연구원이 크게 기여한 경우라면…….”

모든 레지던트들이 촉각을 세우고 그녀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계약금의 5%를 상여금으로 지급할 예정입니다. 지금 정도라면 60억 정도가 되겠네요.”

와아아.

축하와 부러움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울증뿐 아니라 향후 연구할 다른 질환에 따른 기술료까지 통합한 데다, 계약금 비율도 높게 책정되어있어 인센티브로 받는 돈이 상상을 초월했다.

정말 그 돈을 받아도 되는 거냐고 묻고 싶은 심정.

하지만 강서현의 생각은 달랐다.

“사실 5%가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이대로 중단될 수도 있었던 프로젝트를 덕분에 살린 셈이니까요. 덕분에 IM바이오도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요.”

폐기된 후보 물질의 가치는 특별한 계기로 재조명받지 않는 이상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강서현이 좋은 소식 하나를 더 전해왔다.

“그리고 나중에 SI바이오가 정식 출범하면 기존 연구자분들게 우선적으로 취업 제안을 하겠습니다. 직급에 따라 액수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마찬가지로 업계 최고 수준으로 할 예정입니다.”

“오, 그럼 나중에 그쪽으로 취업하면 되는 거예요?”

“저희 비정규직 연구원인데도 주는 거 맞아요?”

“와 연구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모두가 연구에 대한 전의를 불태웠고,

이광섭도 정약준도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교수, 오늘 많이 배우고 갑니다.”

“별말씀을요, 교수님. 살펴 가십시오.”

“천 선생 나중에 또 봅시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정약준은 약물 연구에 대해 강서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이내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보다 더 멀리 김상진과 유정민의 무리가 강의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학회에서 만날 때마다 무리 지어 다니던 모습이 꼴불견인 그들이었는데, 오늘만큼은 이광섭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서둘러 떠났다.

어쩌면 다가오는 춘계학회에도 그 이후로도 이쪽을 상대로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결코 없을 터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행사 마치고 입퇴국식을 이어서 할 예정인데, 잠깐 들렀다 가시죠.”

“아, 네. 과장님.”

강서현 또한 이광섭에게 인사한 뒤 떠나려는데 돌연 이광섭이 그녀를 붙잡았다.

“박 전무님도 괜찮으시다면 잠시…….”

“좋습니다. 마침 우리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박동진에 이어,

“저, 교수님… 저도 따라가고 싶은데.”

“물론입니다. 우리 김 과장님도 당연히 함께 가셔야죠.”

김영광까지 합류하게 되었다.

의국원들과 병동 식구들.

거기에 소속은 다르지만 연구를 함께하는 사람들까지.

‘올해는 좀 다르네…….’

시현이 기억하는 여느 입퇴국식과도 다른 분위기 속에 그들은 길고 긴 밤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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