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Chapter 38. 입퇴국식 (1)
* * *
“새로운 전문의 탄생을 축하하고 또 새로운 배움의 길을 시작하는 전공의 선생님들을 환영합니다.”
동료 교수들과 레지던트 그리고 병동 간호사들을 둘러보며 이광섭이 입을 열었다.
입퇴국식 장소는 호텔 내부에 별도로 마련된 연회장.
컨퍼런스가 있었던 강연장만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은은한 실내조명 하며 테이블마다 놓인 식기와 음식들이 더없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통은 병원 근처 식당의 단체석을 빌려 조촐하게 하던 행사였는데,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이 어디선가 나타나 버튼을 누르자 한쪽 벽면을 덮고 있던 커튼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 너머로 서울 시내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와…… 이런 데가 다 있었네요.”
“올해는 뭐가 너무 달라서 적응이 안 되네.”
“진짜… 여기서 살고 싶다.”
레지던트들과 병동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술렁임이 가라앉을 때쯤 이광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매년 하는 행사이지만, 올해는 특별히 더 좋은 소식을 전할까 합니다. 전문의 시험 수석합격자가 우리 의국에서 나왔습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여느 해와 다르게 우렁찼다.
의국원들이야 정식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마치 소식을 처음 접한 양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올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신 선생님들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시현은 단상에 오르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축하… 드립니다.’
단상에 선 두 사람을 보며 시현의 머릿속에 4년 전의 오늘이 겹쳐 보였다.
의대 입학 후 11년. 의대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부터 따지면 장장 15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장소도 분위기도 달랐지만, 의국을 떠나는 두 사람의 마음만큼은 그때와 같을 터였다.
고생 끝에 얻은 성취인 만큼 떠나는 아쉬움과 후회보다 새로 시작하는 설렘이 훨씬 클 거라 생각하는데.
“지난 4년간 교수님들께 그리고 환자분들께 많은 것을 배우고 이제 한 사람의 전문의가 되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뜻밖에도 소감을 말하는 권원주의 표정이 그리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올해는 펠로우로서 환자도 열심히 보고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함께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수석 합격을 했는데…… 그런 이의 소감치고는 너무도 겸손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전문의가 되어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부족했던 점들이 자꾸만 눈에 띕니다. 올해는 그런 부분들에 더 초점을 맞춰서 더욱 열심히…….”
하도영의 소감도 권원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냥 홀가분한 기분이 아닌, 뭔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전에도 이런 분위기였나……?’
그저 장소가 달라 미묘한 차이가 생겼다고 여기던 찰나.
“저 또한 ‘펠로우’로서 몸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시현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펠로우…… 라고?’
권원주가 펠로우로 병원에 남는 건 기정사실이었지만, 원래대로라면 하도영은 정신과 병원의 봉직의로 근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 오늘 저녁에 다들 시간 어때? 첫 월급 탄 기념으로 밥 한번 살게.
전문의 첫 월급을 탄 그가 의국을 찾아와 했던 말이었다.
- 난 로컬에서 페이닥터(봉직의) 하는 게 체질인 것 같아. 대학병원 생활은 너무…… 여유가 없었달까? 내가 그걸 어떻게 했지?
만면에 미소를 띤 그는 새로 찾은 직장이 퍽 마음에 든다고 했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몸 사라지 않고 최선? 그것도 펠로우로서?
시현이 알고 있던 하도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이었다.
“두 분 소감 잘 들었습니다. 동기 두 사람이 동시에 펠로우로 남는 건 올해가 거의 처음인 것 같습니다. 과장으로서 굉장히 든든하고 뿌듯합니다.”
두 제자를 바라보는 이광섭의 얼굴에 더없이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에 새로 의국에 들어오게 된 두 선생님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고채연 선생님 그리고 장미은 선생님입니다.”
짝짝짝.
모든 의국원들과 병동 식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두 사람이 단상에 나란히 섰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삼아대병원 정신과에 입국하게 되어 더없는 영광입니다. 병원에 거주한다는 ‘레지던트’라는 말에 걸맞게 병원에 뼈를 묻는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 또한 삼아대 정신과의 일원이 되어 너무도 기쁩니다. 여러 훌륭하신 선배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1년차 초반뿐 아니라 365일 병원에서 숙식한다는 생각으로 안 되면 될 때까지 하겠습니다!”
고채연과 장미은이 군기가 바짝 든 표정으로 짧고 굵은 소감을 마쳤고…….
‘…….’
시현은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인턴 때도 그렇고 레지던트 초반에도 그렇고 여리여리한 인상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 보니 늠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병원에 뼈를 묻는다고? 365일 숙식을 안되면 될 때까지?’
레지던트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주당 근무시간을 88시간 이하로 정한 ‘전공의 특별법’이 무색한 발언이었다.
‘얘들아… 우리 과 분위기가 그렇지 않아…….’
애초에 수술이 위주인 흉부외과나 정형외과에 비하면 근무 스케쥴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과장인 이광섭부터 교수진 모두가 레지던트를 닦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치프 선생님 기분 좋을 때는 회진 끝나고 여유롭게 티타임을 가질 때도 간혹 있을 정도인데.
1년차 시작 전이라 아직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할 무렵.
짝짝. 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거지!”
“크으…… 패기가 있다. 마음에 들었어!”
“그래! 그래야 내 후배답지!”
그들의 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는 듯 김원기와 노민혜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너희들은 또 왜 그래?’
이제 2년차가 됐으면 과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의욕이 앞선 나머지 괜히 무리하지 말고 건강도 챙겨가면서 하라고 말해줘야 할 텐데.
치기 어린 1년차의 포부에 대견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 저 멀리서 아까와 똑같이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광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뭔가 이상해…….’
파이팅이 충만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과 분위기.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 건 오히려 자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드는 시현이었다.
* * *
“요즘 정신과 인기가 많이 올라갔다고 하던데, 그중에서도 수석합격자 배출이라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입퇴국식 행사가 한창일 때, 박동진이 이광섭에게 잔을 권하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새로 들어온 신입 레지던트들도 아주 성실해 보이던데요. 과장님 인복이 정말 부럽습니다. 허허허.”
“우리 레지던트 선생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입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자리도 마련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이광섭이 잔을 받으며 사의를 표했다.
컨퍼런스와 입퇴국식 장소에 특별히 신경을 써준 것만 해도 고마워할 일이지만, AI 연구에 병원에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한 것에 비하면 약과였다.
“별말씀을요. 사실, 기업에서 하는 투자에 공짜란 없는 법입니다. 의료용 AI 개발의 첫걸음을 여기, 삼아대병원 정신과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잠재력 있는 선생님들이 여럿 보여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박동진은 그렇게 말하며 반대편에 레지던트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이광섭 또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 3년차가 된 시현을 보자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 선생이…… 정말 열심히 해줬지.’
아직 레지던트일 뿐인데 하는 것만 보면 웬만한 병원 펠로우 아니, 교수 이상이었다.
환자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굵직굵직한 연구들까지.
따지고 보면 오늘 자리도 시현이 마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신과에 인재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 졸업하는 선생님도 그렇고, 저기 천시현 선생님도요.”
이광섭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박동진이 말했다.
“아직 연구 경험이 많이 부족합니다. 전무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제가 돕다니요? 의학 연구인데 오히려 저희가 도움을 받아야지요. 허허허.”
그렇게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전무님, 오랜만이에요.”
“아, 정말 오랜만이네. 우리 ‘강병우 센터장님’은 건강하시고?”
“네. 요즘 좀 바쁘시긴 하지만 잘 지내고 계세요.”
“그래……. 유학 마치고 돌아왔을 때 본 게 정말이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시간 참 빠르네. 그런데 ‘전무님’이 뭐야. 회사도 아니고 평소처럼 아저씨라고…….”
강서현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친조카 대하는 듯했다.
“두 분은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신가요?”
뜻밖의 상황에 이광섭이 물었다.
“네. 병우…… 아니, 센터장님과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우리 강 연구원님과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봤던 사이죠.”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박동진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공적인 업무 때문에 온 거니까 ‘전무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런 그를 향해 강서현 또한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공적인 업무?”
“네. SI 바이오의 이사로서, 회사 창립 멤버가 될 사람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요.”
“창립 멤버라면…….”
박동진은 또다시 레지던트들이 모여앉은 테이블을 바라보았고,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전자 쪽이 워낙 일이 많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이쪽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요.”
강서현의 시선 또한 시현을 향했다.
임상시험이 성공한다면,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사람으로 그를 뽑는데 이견은 없을 터였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둘 수는 없지.’
레지던트 수준에서 벌써 이 정도인데, 제대로 된 연구를 통해 경험을 더 쌓는다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 물론 그렇겠지.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아무리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두 분야 모두에 최선을 다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박동진이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 모델 개발은 최대한 AI 전문가들에게 맡겨주시면 어떨까요? 천시현 선생님은 약물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는데. 우리 벤처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인재라서 말이지.”
그 말에 강서현이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AI 연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야. 나중에 어느 정도 모델이 완성되고 난 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도움 없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지.”
환자의 데이터야 이미 서버에 저장되어 있지만, 그 데이터 쓸만한 정보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의료 분야에 지식이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삼아전자에 AI 전문 인력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어떤 환자 케이스를 학습시킬지 선별하고 어떤 변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정하는 데는 시현의 의견이 꼭 필요했다.
“서현…… 아니, 강 연구원님이 아까 발표한 내용 관심 있게 들었는데, 글로벌 제약사로 기술 수출 논의 중이라며? 그럼 그쪽에서 알아서 진행하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하지만…….”
강서현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박동진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
시현이 둘 중 어느 곳에 더 필요한가를 묻는다면 단연 AI 쪽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다음 말에 강서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까지 탐내는 걸 보면…… 혹시 우리 서현이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