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83화 (183/195)

183화 Chapter 38. 입퇴국식 (2)

“이렇게까지 탐내는 걸 보면…… 혹시 우리 서현이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

그리고 이어진 그의 다음 말에 강서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그,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그래? 그런 게 아니라면 천 선생이 꼭 필요한 이유라도 좀 들어보자. 솔직히 말해 인재를 양보할 생각은 없다만, 무슨 생각으로 데려가려는 건지 알아야 고민이라도 해볼 것 아니냐.”

평소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한 모습에 박동진이 놀리듯 물었다.

- 뭐?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람과 비강 분무 항우울제를 생각해낸 사람이 같아? 그것도 고작 레지던트라고? 맙소사…… 닥터 천시현이라고 했던가?

- 한국에 도착하면 만나볼 수 있게 자리 주선해줘요. 이번 연구에 무조건 참여하도록 해서 경험 쌓을 수 있도록 하고.

강서현은 얼마 전 미팅에서 헨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관리자로 일하면서 연구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을 그였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이만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CSK 아시아태평양 지부장이 천시현 선생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둘도 없는 좋은 기회라고요!”

“CSK…… 에서요?”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광섭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CSK라고 하면 보유한 오리지날 의약품만 수십 종에 달하는 세계 1위 제약회사였다.

연구 분야에서도 독보적이라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 수백 명이 상시 근무하고 있고 급여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특히 의사 출신 연구자에 대한 대우는 대학병원 교수 그 이상이라고 했다.

“네. 저희와 함께 하는 게 천시현 선생님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음…… 그러니까 저 레지던트 선생님한테 더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 그렇다는 거구나?”

박동진이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확실히 지금은 정해진 프로토콜대로 3상 임상을 성실하게 수행만 하면 되는 단계였다.

번뜩이는 창의성을 지닌 한 명보다 성실하게 연구를 수행할 숙련된 연구원 여럿이 더 나을 상황.

그럼에도 시현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건 단순히 필요해서가 아니라 더 키워보고 싶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죠. 커리어 면에서도 그렇고, 경제적인 보상도 AI 연구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일 테니까요.”

다시 평정심을 찾은 강서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왈가왈부해봐야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선택이었다.

‘50억에 가까운 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사람은 돈 주는 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AI 연구야 삼아전자에서 지원해주는 인건비 말고는 기대할만한 게 별로 없는데, 상식적으로 그쪽을 선택하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글쎄…… 커리어 부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적인 부분까지 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AI 모델로 수익을 내는게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당장 돈은 안되더라도 미래 기업가치를 보고 투자해줄 사람들은 꽤 있을 거다. 원래 투자자들이란 꿈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그 말은…… 천시현 선생님에게 회사 지분을 줄 생각이라는 건가요?”

“그래. 회사를 상장시키고 적당한 시기에 비싼 값에 잘 팔도록 한다면…… 기술 수출에 대한 인센티브 그 이상을 손에 쥘 수도 있지.”

그 말에 강서현은 속으로 새로 만들어질 회사의 시총을 헤아렸다.

‘삼아전자와 삼아대병원이 손잡고 만든 AI라면…….’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AI 연구가 성과를 내고 창업 초기 멤버로 받은 지분에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만 있다면 신약 개발에 대한 인센티브를 뛰어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정말로 그쪽을 선택할까?’

처음으로 시현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강서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해보면, AI 연구와 병행이 어렵다는 이유로 SPN-1001 연구도 김석용에게 넘긴 전력이 있다.

어쩌면 돈보다는 다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뜻.

여차하면 ASP-9022에 대한 인센티브를 줄 때 다른 연구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특약 사항을 집어넣어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하는데, 뜻밖에도 이광섭이 입을 열었다.

“허허허. 제자가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천 선생 본인의 뜻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싫다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당연하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도 약물 연구를 가장 선호할 것 같은데요. 여러 조건을 따져보면 SI 바이오만 한 곳이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임상 쪽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이던데…… 우리도 스톡옵션을 내걸어야 하나?’

강서현은 자신감을 내비치면서도 한편으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따지고 있었고,

“물론입니다. 모두 의미 있는 일인데, 그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본인 몫이겠지요. 다만, 우리나라에서 자살 예방만큼 중요한 분야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당장 돈 나올 곳은 없고 상장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우선 월급이라도 더 늘려 줘야 하나?’

박동진 또한 어떻게 해야 시현을 붙잡아둘 수 있을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허허허. 두 분 말씀이 다 일리가 있지만…….”

두 사람이 서로 견제하는 모습에 이광섭이 여유롭게 웃으며 운을 뗐다.

“천 선생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을 겁니다.”

“네?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라면……?”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다니…… 그게 뭔가요?”

강서현과 박동진이 거의 동시에 물어왔고, 이광섭은 멀리 시현이 앉아있는 곳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 선생은 교수가 되고 싶은 게 틀림없습니다. 대학에 남아서 환자도 보고 학생들도 가르치는. 어떻습니까? 정말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 * *

‘…….’

[system : ‘시청타촉의 포션’ 효과가 종료됩니다.]

시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 사람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저, 과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아까부터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이쪽을 보고 있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션을 사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상천외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교수는커녕 펠로우를 할 생각도 없던 시현이었다.

불의의 사고만 없었더라면 무난하게 전문의 시험에 응시했을 것이고,

건강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으니 그가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군대.

군에는 항상 정신과 의사가 부족하다고 했다.

가뭄에 콩 나듯 매우 드물게 역종 분류에서 공중보건의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으나, 열에 아홉은 군의관이 될 운명이었다.

아무튼, 레지던트 마치고도 3년 2개월 동안 느긋하게 진로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있으니 지금껏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문제였다.

‘예전이라면 어땠을까?’

대학으로 돌아왔을지 아니면 봉직의나 개원의가 되었을지…….

포션 효과가 끝난 탓에 대화 내용이 더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광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두 사람의 생각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학에 남는 게 좋은 선택일까?’

원래대로라면 군의관 3년차가 되어 있을 시기였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들어보자.’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 * *

“대학에 남아서 교수가 된다, 라……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었네요.”

“맞아요. 삼아대병원 교수……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시현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그렇죠? 후배 레지던트 티칭도 참 잘하는 것 같아요. 천 선생이 들어오고 나서 레지던트들 환자 보는 실력이 전체적으로 좋아진 것 같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오, 그렇군요. 후배들 교육까지!”

“그렇게 보면 모든 게 다 설명이 되네요. 임상에 관심이 많은 것도 연구 열심히 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 말에 강서현과 박동진 모두 감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특정 분야를 선택하는 것도 좋지만, 대학에 남아서 학생들과 정신과 레지던트들을 가르친다면 좋은 인재들이 계속해서 나오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켜보기로는 교수 재목으로 그만한 사람이 또 없습니다. 허허허.”

보통 자식 자랑과 제자 자랑은 꼴불견이 되기 마련인데, 이광섭이라면 충분히 그래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과장님, 과장님께서는 레지던트들을 어떻게 지도하고 계신 겁니까? 천 선생도 천 선생이지만 전문의 시험 수석도 배출했고…… 아까 보니 다들 의욕적이고 활기가 넘치는 것 같더군요.”

돌연 박동진이 이광섭에게 물었다.

‘사람을 잘 뽑는 건지 아니면 수련을 통해 그런 인재로 만들어가는 건지…….’

아까부터 내심 궁금한 부분이었다.

올해 졸업하는 두 사람 모두 병원에 남겠다고 했고, 새로 들어오는 신규 레지던트들도 학구적인 것 같았으니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제가 가르친 건 없습니다. 오히려 요즘 들어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도리어 제가 배우는 게 많다고 해야겠죠.”

그러나 이광섭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가르친 게 없다니, 그게 무슨…….”

알아서 저렇게 크기라도 했다는 건가.

박동진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정신과 의사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스스로 안정된 기분을 유지하고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환자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우울하고 무기력한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 과가 다른 과에 비해서 육체적인 노동 강도는 약할지 몰라도, 그리 만만치는 않습니다. 인턴 중에는 ‘다른 과는 다 해도 정신과는 못 하겠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죠.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루 종일 듣고 있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사람 간에 전염되는 건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감염원만이 아니다.

우울과 같은 감정 그리고 자살사고와 같은 생각 또한 전염된다.

“네. 그래서 과장직을 맡은 이후로 연구에 대한 욕심도 많이 내려놓았습니다. 진료 외 업무를 하나라도 줄이려고 했죠.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는 일인데…… 차라리 환자 진료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 그래서…….”

강서현은 리서치 미팅에서 처음 이광섭을 봤을 때 모습을 떠올렸다.

센터장인 자신의 아버지가 새로운 연구를 권유했을 때, 레지던트들의 근무 여건을 이유로 고사했던 그였다.

그동안 진료 역량에 비해 연구 실적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일을 줄여주고 편하게 해주는 거…… 어쩌면 ‘좋은 교수’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저 친구들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광섭은 모든 의국원 한명 한명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우리 레지던트 선생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열정을 불태울 기회였을 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당장 1년차들만 해도 365일 병원에 살면서 뼈를 묻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거창한 포부를 밝힌 1년차 두 사람과 그들을 격려하는 2년차들을 보자 이광섭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 이쪽을 보고 있던 시현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의국은 달라질 겁니다. 진료와 연구,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도록 과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딩동! 딩동! 딩동!

정신없이 울리는 알림음과 함께 이광섭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고.

[system : 정신과 과장 이광섭의 의욕이 최대치로 상승합니다.]

[system : 정신과 과장 이광섭의 뇌리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입니다.]

[system : 정신과 과장 이광섭이 신규 프로젝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system : 정신과 과장 이광섭이…….]

‘내가 무슨 짓을…….’

메시지를 확인한 시현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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