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Chapter 38. 입퇴국식 (3)
딩동!
[system : 정신과 과장 이광섭이…….]
‘…….’
[SORA : …….]
시현은 멍한 표정으로 쌓여가는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소년 만화 주인공이 전투 중에 각성을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터.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웹소설에 초반부에 등장했다가 금방 사라지는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가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시현아? 방금 뭐라고?”
옆에 있던 황진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 이거 좋아 보이는데 한번 추진해봅시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자칫 의국을 초토화할 수도 있었다.
한 과를 이끄는 수장이 의욕적이게 된다는 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었다.
“무슨 일 있어? 이거라도 좀 마셔.”
황진호가 건네는 얼음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진정이 조금 되는 것 같았다.
“후우. 고맙다.”
“별말씀을. 내 친구 중에 가장 부자인 시현아! 오늘 보니까 연구도 잘 풀릴 것 같던데 앞으로 꽃길만 걷자! 하하하.”
‘꽃길… 이려나?’
아직 미처 닫지 못한 알림창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 꽃길이 불에 활활 타고 있는 것 같았다.
* * *
“우리 레지던트들 말입니다. 일이 많다고 힘들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연구를 하고 지식을 얻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술이 들어간 탓인지 이광섭의 제자 자랑은 쉬 그치지 않았고,
“그, 그런 것 같습니다. 허허허.”
박동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마지못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은 보였지만,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는데…….
제자들 덕분에 신이 난 그에게 괜히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제자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어요.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친구들인데 너무 감싸고 돈 것은 아니었는지……. 저 시기에는 더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또한 행복인데 말입니다.”
“그럼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하하하.”
이번에는 강서현이 곤란한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과장님… 과장님께서 행복의 정의를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은데 행복은…….
그녀 또한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역시! 강 연구원님은 우리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비슷한 나이이니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 ‘고생’ 함께해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허허허.”
오싹.
그 말에 강서현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뭔가 평소와 다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늘 보이던 인자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고, 두 눈은 의욕으로 가득 차 번들거리고 있었다.
“제자들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동안 그 마음도 몰라주고…… 제가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광섭이 조금 미안한 얼굴로 올해의 계획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작년에 매출도 충분히 늘었고 하니 올해는 병동 확장도 건의해보고……. 당연히 외래 진료도 더 활성화해야겠지요.
- 아, 그리고 직접 발로 뛰어서 최대한 연구비도 많이 끌어올 생각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국책사업도 따고 싶네요.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강서현과 박동진이 질려버릴 정도였는데,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광섭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과, 과장님?’
멀리서 듣고 있던 시현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광섭의 안위가 걱정될 무렵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시청타촉의 포션’ 효과가 곧 종료됩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했지만, 역시나 안 듣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때마침 신규 1년차 고채연과 장미은이 선배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후배 레지던트들을 축하하는 자리라 근처에 개원하고 있는 선배들이 여럿 참석한 상황.
여러 테이블을 돌며 한 잔씩 얻어 마신 덕에 두 사람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 저렇게 술을 잘 마셨었나?’
선배들이 주는 술을 거절 없이 넙죽넙죽 받아마신 터라 누가 봐도 취한 듯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이쪽으로 다가왔다.
“1년차 고채연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1년차 장미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찬 목소리.
90도로 숙인 허리.
그리고 말끔하게 비워진 술잔.
지금껏 본적 없던 낯선 모습에 시현이 움찔했다.
그들을 처음 본다면 원래 성격이 그러려니 할 텐데, 회귀 전 그들과 함께 의국 생활을 해본 바로는 이렇게 박력 넘치는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 선생님들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일단 앉아서 물부터 드세요.”
시현이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잔을 건네자 고채연이 말했다.
“오늘 발표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주시니 물도 맛있습니다!”
“올 한해 과에서 진행하는 연구 최대한 열심히 참여하겠습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 누가 가르친 거야?’
신규 레지던트가 아니라 새로 들어온 조직원 같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형님이라고 부를 것만 같은 느낌.
그 깍듯함에 시현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올해 1년차들 분위기가 좀…… 시현아, 너 안 보이는 데서 애들 잡는 거 아니지?”
옆자리에 앉아있던 김석용이 넌지시 물었다.
“전혀요. 1년차들하고 같이 있는 시간도 없는데요.”
“그렇지……. 네가 그럴 성격도 아니고. 올해는 좀 이상하네.”
김석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예전 입퇴국식이 이렇지 않았다는 건 시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고채연과 장미은이 성실한 후배들인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군기가 잡혀있지는 않았으니까.
“올해 1년차 선생님들은 싹싹한 게 아주 마음에 들어!”
“내 말이! 병원에선 적당히 선배 어려운 줄도 알아야지!”
뜻밖에도 올해 졸국을 앞둔 4년차 두 사람, 권원주와 하도영은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든 듯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앞에 놓인 잔을 끝까지 비웠다.
‘두 사람 다 잘 마시는군.’
하도영이 흐뭇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의대 동기들 가운데서도 주당으로 이름난 그였다. 와인과 위스키는 물론이고 심지어 소주마저도 블라인드로 마셔보고 바로 제품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
김민홍을 제외하면 의국원들 모두 술을 즐겨 하지 않았고, 작년 1년차였던 김원기와 노민혜 또한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권할 수도 없고.’
요즘 같은 분위기에 원치도 않는 술을 강권했다가는 의국 분위기를 망치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래서 술을 즐겨 하는 후배들이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했었는데…….
그동안 기다려왔던 인재들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펠로우라고 뒷방 늙은이 취급하지 말고 회식할 때 불러요. 레지던트 월급에서 오른 만큼은 다 의국에 쏠 테니까.”
오오오.
하도영의 말에 의국원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도 그렇고 여기 하도영 선생님도 의국만 떠날 뿐이지 거의 하루 종일 병원에 있을 테니까 힘든 점 있으면 수시로 연락하도록 해요.”
권원주 또한 두 사람을 향해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빈말 아니니까 어려워하지 말고 언제든 연락해요. 펠로우 방으로 찾아와도 좋고.”
그 말에 고채연과 장미은의 표정이 급하게 밝아졌다.
급하게 입원이 필요한 환자가 있을 때, 종종 전문의 소견이 필요한데 교수님들은 학교 강의나 외부 일정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는 펠로우의 도움이 절실한데, 이렇게 선뜻 도와주겠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넵!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떠나는 이들과 새롭게 들어오는 이들.
아무리 선배라도 펠로우가 되면 의국 일에서 어느 정도 손을 떼기 마련인데…….
‘이건 무슨…… 레지던트 5년차 같잖아.’
원래라면 접점이 거의 없어야 할 그들이 이렇게 가까워진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오늘 귀한 시간 내셔서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짝짝짝.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연회장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행사가 끝났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집에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웅성웅성.
호텔 로비 전체가 삼아대병원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
심지어 1차에서 간단한 덕담을 나누고 헤어졌어야 할 의국 선배들마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졸국한 지 얼마 안 된 선배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광섭 교수!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참 좋아! 오늘은 일찍 가지 말고 한잔 더 하자고! 허허허.”
“이야. 우리 진철영 선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누가 보면 아직도 총각인 줄 알겠어!”
상당수는 이광섭 과장과 진철영 교수보다도 윗년차인 나이 지긋한 원장님들이었다.
“의국장 선생.”
어수선한 분위기가 언제나 정리되나 기다리는데 이광섭이 김석용을 불렀다.
“네! 과장님!”
“근처에 자리를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선배님들께서 한잔 더 하자고 하셔서.”
“네? 아, 넵! 몇 분 정도…….”
“음.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가실 것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일단 대답은 했으나 막막한 기분이었다.
‘아…… 40명쯤 되려나.’
가뜩이나 연회장 사람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어수선한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었는데,
갑자기 이만한 인원을 수용할만한 자리를 잡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은 레지던트들끼리 흩어져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도록 한 뒤 그 또한 주변을 둘러보러 밖으로 나갔다.
* * *
“이야. 다들 오랜만에 얼굴 보니 반갑네!”
“그래. 진료 바쁘다고 다들 시간도 못 내고……. 이렇게 학회하고 함께 하니까 공부도 되고 겸사겸사 아주 좋아!”
가까스로 찾은 맥주집 테이블을 삼아대병원 선배들과 레지던트들이 가득 메웠다.
시현으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
입퇴국식을 마치면 레지던트들과 주니어 스텝인 정세일 교수 그리고 펠로우 몇몇 정도가 모여서 한잔 더 하곤 했었는데,
이건 입퇴국식을 처음부터 다시 하는 분위기였다.
“허허. 올해 1년차 선생님들은 아주 싹싹해!”
“1년차들뿐인가? 아까 보니까 3, 4년차들도 아주 훌륭하던데. 일도 열심히 하고.”
“맞아! 천시현 선생이라고 했나? 그 친구는 꼭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단 말이지!”
군데군데 난 흰머리 덕분에 본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이는 한 선배가 으스대며 말했다.
“어허! 이 사람아, 말은 바로 해야지! 자네는 1년차 초반에 응급실에 환자 몰아닥치는 것 보고 기겁을 해서 다음날에 바로 도망갔잖나?”
하하하.
그의 옆에 앉아있던 바로 윗년차 선배의 말이 폐부를 찔렀고, 당시 같이 의국 생활을 하던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형님은 무슨 30년 다 된 이야기를 다 하고 그러세요! 그리고 도망이 아니고 한강고수부지가서 잠깐 마음 좀 가라앉히고 온 거였다니까요!”
“예끼! 잠깐 마음 추스르러 나갔다는 사람이 의국 캐비닛을 다 비우고 짐을 쌌단 말인가?”
“아니… 그걸 어떻게……?”
“이제야 말하네만, 그때 내가 치프 선생님하고 집까지 찾아가서 자네 모친을 설득하느라고 진땀 뺐던 것만 생각하면……. 말도 말게. 자넨 치프 선생님한테 감사해야 해!”
“그때 치프면…… 이광섭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셨었다고요?”
중년 의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이광섭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