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85화 (185/195)

185화 Chapter 38. 입퇴국식 (4)

“이제야 말하네만, 그때 내가 치프 선생님하고 집까지 찾아가서 자네 모친을 설득하느라고 진땀 뺐던 것만 생각하면……. 말도 말게. 자넨 나한테 감사해야 해!”

“그때 치프면…… 이광섭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셨었다고요?”

중년 의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이광섭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때 치프 선생님이 “저희 의국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하는데…… 캬! 정말 멋있었다는 거 아닌가?”

늘 감정 표현이 없고 무뚝뚝하다고만 여겼던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신경 썼을 줄이야.

과가 적성에 안 맞는다며 집에 들어가자마자 등짝부터 맞았던 이유를 30여 년 만에 알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희진이 병원 그만둘 뻔했을 때도 이광섭 선생님이 막아줬다고. 그때가 아마 치프 끝나갈 때였나?”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몰랐던 사실에 몇몇 선배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과 의사가 천직인 사람인데……. 왜 그만둘 생각을?”

정신과 전문의 유희진.

교양프로그램은 물론 예능에도 종종 출연하는 스타 정신과 의사로, 초진 예약이 1년 넘게 밀려있다고 했다.

간혹 TV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는 달리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데, 확실히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지던트 때도 소아정신과 펠로우 시절에도 환자를 잘 보기로 유명했던 만큼 레지던트 때 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섬세하고 공감 능력이 좋은 만큼 더 힘들었던 거지. 환자 잘못됐을 때…….”

그의 말에 모두가 잠시 숙연해졌다.

정신과 의사로 수십 년간 경력을 쌓고 나서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 환자의 사망 소식인데,

그런 일을 처음 겪는 젊은 정신과 레지던트에게는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 될 터였다.

특히나 평소 환자의 감정에 깊게 공감하고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자책하는 스타일이었다면 더더욱.

“하필이면 그런 일을 연달아 겪어서……. 정신과를 그만두려고 했었대. 자기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면서.”

“그래서요. 이광섭 교수님이 그걸 어떻게 막았다는 거예요?”

“그때는 일과 끝나고 유 선생하고 따로 만났었지. 나도 동기라고 같이 갔었는데, 그 자리가 아주 살벌했다고.”

“……살벌이요?”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야단이라도 쳤다는 것인지.

그의 말에 몇몇 선배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워낙 마음이 여린 친구인데 그런 일을 겪었으니…… 치프 선생님이 좋게 타이를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어.”

“어떻게 하셨길래…….”

“유 선생이 보던 외래 환자 명단하고 병동 환자들 명단 다 뽑아서 가져오셨더라고. 그것도 자살사고가 심했던 환자들만 골라서……. 그 환자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해놓고 담당 의사가 수련을 포기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하셨지.”

“와……. 저 같으면 무서워서 도망갔을 것 같은데요?”

“맞아. 지금 외래에서 보고 있는 환자들 갑자기 치료자 바뀌어서 잘못되면 도대체 누구 책임이냐고 몰아세우는데, 듣는 내가 다 떨리더라니까. 우리 의국에 중도 포기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도 했고……. 전투 몇 번 졌다고 전쟁을 포기하는 무능한 지휘관은 필요 없다고도 하셨어.”

그야말로 군인 정신이 느껴지는 말들.

지금의 이광섭을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모두가 지지적으로 접근했음에도 설득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의도한 바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몰아붙이는 선택이 그녀를 병원에 남게 했으니……. 유희진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된 데는 ‘치프 이광섭’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때 치프라고 해봐야 20대 후반일 텐데……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대단하셨네요. 카리스마도 있으셨고.”

“맞아요. 당시에 신경정신과 이광섭 하면 외과 레지던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죠. 환자 제대로 안 보면 호통이…… 어휴.”

이광섭과 같이 의국 생활을 했던 동문 선배들은 레지던트 시절로 돌아간 듯 옛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허허. 내가 그렇게 무서웠었나?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당사자인 이광섭은 멋쩍은 표정으로 맥주잔을 홀짝일 뿐이었다.

‘과장님한테 그런 면이……?’

한편 그들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레지던트들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몇 년째 그를 봐온 바로는 회진 때 큰 소리 한번 낸 적이 없었기 때문.

“우리 의국이 분위기가 참 좋은 편이야. 선배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 입퇴국식이 어디 있겠어? 이게 따지고 보면 다 자네들 과장님 덕분이라고.”

“맞는 말이야. 보드 동기들 말 들어보면 졸국하면 병원 쪽은 쳐다도 안 본다고 하더라고. 교수님들이 너무 고약했다나…… 동문회 때도 안 간다던데?”

“우리 ‘치프’ 선생님이 많이 유해지셨지. 이렇게 점잖은 과장님 밑에서 수련을 받고. 우리 후배들은 참 복 받았어.”

선배들은 하나같이 ‘과장으로서의’ 이광섭을 칭찬하고 있었다.

물론 치프로서의 그가 나빴다는 말은 아니었고, 과를 이끌어 나가는 데 지금의 모습이 훨씬 안정적이라는 의미로.

하지만 정작 이광섭은 그들의 말에 내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글쎄. 지금이 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어휴. 그럼요. 선생님 예전 모습 같았으면 우리 전공의 선생들 다 죽어 나가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너그러워지는 게 정상…….”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동문 후배의 말에 이광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아. 지금의 나였다면 유희진 선생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그건…….”

“그랬으면 아마…….”

뜻밖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당연히 못 잡았을걸요?”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 유희진 선생! 어서 와!”

그녀를 알아본 누군가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온 거야?”

“오늘 야간 녹화가 있어서요. 끝나고 늦게라도 선생님들 보고 싶어서 왔죠.”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 유희진이 그의 옛 동료들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과장님도 잘 지내셨죠?”

“그래, 유 원장. 반가워.”

이광섭 또한 더없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에이. 나 없는 자리에서 흑역사 이야기하기 있어?”

유희진이 맨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던 동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아니… 그게… 저…….”

“누구나 힘들 수 있다……. 선택을 존중한다……. 조금 더 상의해보자……. 그런 말들로는 절대 못 잡았을 거야. 그건 확실해.”

민망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동기를 향해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죄책감이 너무 심해서 병원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고……. 짐을 정리해서 집에 부치기까지 했다고.

그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건 느낌이 또 달랐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우리 치프 선생님이 해준 ‘극약 처방’ 덕분에…… 가뜩이나 자책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한테 지금 나가면 의국 최초의 중도 탈락이라고…… 다른 레지던트들 뻔히 힘들 거 눈에 안 보이이냐고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대로 나갔다가는 대역죄인이 될 판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죄책감에는 죄책감.

그것도 훨씬 더 큰 죄책감.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과격한 방법이었다.

“허허허. 유 선생, 미안해. 나도 그때는 어렸고…….”

이미 오래된 일이긴 했지만, 이광섭 또한 그 날 화를 내며 다그쳤던 일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어휴, 미안하긴요! 그때 그렇게 말해주신 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섭긴 했어도…… 그 속에 뭔가 진심이 느꼈었으니까요.”

“진심…….”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결국은 그 안에 들어있는 ‘진짜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이광섭을 격려하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수십 년 전 젊은 레지던트 시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솔직히 저는 지금보다 예전에 그 엄격했던 ‘치프 선생님’ 모습이 더 좋다고요. 선생님, 초심을 찾으세요. ‘영국 신사’ 별로 안 어울려요. 하하하!”

그녀의 말에 이광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이렇게 잘 풀렸잖아요! 어찌 됐건 전문의도 되었고 이렇게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죠!”

“중요한 건 결과…….”

그 말에 이광섭은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몇 마디를 되뇌기 시작했고,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이내 그만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딩동!

[system : 정신과 과장 이광섭이 지천명(知天命)의 경지에 한 걸음 다가갑니다.]

‘잠깐만. 깨달음이 좀 이상한데?’

레지던트들을 지도하는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이광섭의 눈에 또다시 형형한 안광이 깃드는 모습에 시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 * *

“잠시 우리 레지던트 선생들하고 얘기 좀 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다녀오게.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우리가 눈치 없이 사람을 너무 오래 붙들었구먼.”

“아닙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이광섭이 동문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옮겼다. 사실 옮긴다고 해봐야 바로 옆 테이블이긴 했지만.

“자자, 앉지. 앉아.”

이광섭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레지던트들을 제지하며 자리에 앉았다.

“선배님들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역시 과장님이십니다!”

“와, 어떻게 명단이랑 차트를 다 뽑으실 생각을…… 리뷰까지 하시고 그거 엄청 오래 걸리는 거 아닌가요?”

“유희진 선생님 지금은 엄청 유명하신데……. 과장님 아니었으면 병원 그만두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그의 치프 시절 무용담에 레지던트들이 몰려와 말했다.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모습이었다.

“허허. 다 옛날 일인 걸…… 그나저나 올해는 여러모로 특별한 것 같구먼. 과장으로서 오늘만큼 기쁜 날은 또 없을 거야. 권 선생, 하 선생 축하하네.”

“과장님 덕분입니다. 지난 4년간 감사했습니다.”

“펠로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지던트 수료 후 회전문처럼 다시 병원으로 돌아올 상황이었으나, 축하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1년차들도 반가워요. 훌륭한 선배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니 뭐든 물어보고 제대로 파악한 다음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넵!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얻어 마신 술에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좋은 소식들이 너무 많은데……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서 알려줘야 할 것 같네.”

오늘 무슨 날인가.

이래도 되나 싶게 이벤트가 많은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