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Chapter 38. 입퇴국식 (5)
“오늘은 좋은 소식들이 너무 많은데……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서 알려줘야 할 것 같네.”
이광섭은 레지던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천하대병원 정약준 교수님이 말씀하신 건데, 홉스 에킨스에서 레지던트 대상으로 연수 교육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
“홉스 에킨스라면…….”
그 말에 레지던트들의 눈이 커졌다.
세계 정신과 순위, 특히 연구 분야에서 수위를 다투는 병원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해외 연수면 보통 교수님들이 가시는 것 아닌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김석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말대로 해외 연수는 교수 임용을 받고 1년~2년 정도 다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지금껏 레지던트를 해외로 보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교수 임용 후 연수는 말 그대로 연수에 지나지 않지. 결국은 모국으로 돌아갈 테니까. 반면에 젊은 의사들은 장기적으로 미국에 남을 수도 있지 않겠어? 특히 정신과는 언어 장벽이 높은 과라서 여러 국적의 정신과 의사들이 있으면 유리한 면도 있겠지.”
“아, 그런 의미로…….”
어쩌면 단기 연수로 그치지 않고 해외 유명 대학에서 커리어를 이어 나갈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어떤가? 우리 레지던트 중에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지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분명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이광섭의 시선은 시현을 향하고 있었다.
좋은 기회인 건 분명하지만…….
전에 없던 의욕으로 가득 찬 이광섭은 왠지 모르게 위험해 보였다.
게다가 당장 눈앞에 쌓여있는 일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해외 연수로 자리를 비운 사이 회귀 전에 만났던 환자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레지던트가 진료해도 좋은 치료 성적을 낼 수도 있었지만, 환자의 모든 경과를 알고 있는 자신이 보더라도 쉽지 않은 환자들이 여럿 있었다.
“어떻게 지원하면 될까요?”
시현이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이광섭에게 물었다.
‘김석용 선생님…….’
맡은 연구를 마저 하기 위해 군입대를 미루고 펠로우를 먼저 할 만큼 연구에 진심인 그였다.
“아, 일단 정약준 교수님께 추천서를 받아야 해.”
“네? 해외 대학 연수인데 정약준 교수님께서 관리하시나요?”
“아, 당연히 지원은 홉스 에킨스에 하고 결과도 그쪽에서 통보하겠지만, 최근에 정 교수님이 국제정신약물학회 위원을 맡게 되셔서…… 추천서가 있으면 아주 유리할 거야.”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번 연수는 정약준 교수의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국은 천하대병원 레지던트 중에서 보내게 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팔은 안쪽으로 굽을 텐데.”
“어제까지는 그랬지.”
“어제…… 까지요?”
“원래는 천하대병원 레지던트 중에서 선발해서 추천서를 써주실 생각이었는데, ‘오늘’ 생각이 좀 바뀌셨다고 하더군. 다른 대학 레지던트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하셨어.”
왜 하필이면 오늘인 건지?
모두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이광섭이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 레지던트들이 연구에 진심인 것 같아서 느끼는 바가 컸다고 하시더라고.”
“아, 오늘 발표를 보시고…….”
“그래. 본인 제자들이 다른 병원 레지던트들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이렇게 좋은 기회도 스스로 쟁취해야지 거저 얻으면 보상인 줄도 모른다고…… 이번에는 오로지 실력을 기준으로 추천하겠다고 하셨어.”
천하대 교수로 있으면서 모교 먼저 챙기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겠지만, 자칫 제자들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에서 나온 고육책이었다.
“실력이 기준이라면 어떤……?”
“일단은 올해 전공의 시험 성적하고 그동안 연구 실적이겠지. 그리고 어쩌면…… 김석용 선생하고 천시현 선생은 가산점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뜻밖의 소식에 김석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희에게 가산점을요?”
“그래. 아까 말했다시피 오늘 발표를 아주 인상적으로 봤다고 하셨으니 분명 유리할 거야. 전공의 시험만 잘 본다면 가능성이 있어.”
전공의 시험.
매년 전국 수련병원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들 대상으로 학업 성취 수준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교수들 사이에서는 종종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되기도 했다.
“물론, 어설프게 상위권 성적이어서는 명함 내밀기도 힘들 거야. 최소한 천하대 레지던트들보다 월등하게 잘 나와야 할 테지. ‘수석’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수석이라…….’
최근 정신과 인기가 크게 오른 탓에 정신과 레지던트들의 의대 성적은 대체로 상위권이었다.
사실 시험 성적이 중간 이상만 돼도 잘하는 축에 드는 건데, 거기서 1등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목표였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포기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권 선생님도 수석을 하셨는데 잘하면 나도?’
같은 의국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환자 경험을 한 1년 선배가 해낸 일이니 그리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공의 평가는 점수가 낮다고 해서 유급을 당한다던가 특별히 불이익이 있는 시험도 아니었다.
바쁜 일과 중에 시험 준비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고 시험장에 들어오는 레지던트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해보자! 할 수 있다!’
몇 주 뒤 있을 시험을 생각하며 김석용이 눈을 빛냈다.
일단 SPN-1001 연구로 정약준 교수의 눈에 든 상황이고 최근 외래도 훨씬 더 바빠진 터라 환자 케이스도 급증하고 있었다.
많은 환자를 볼수록 실력이 느는 것은 당연지사. 이 정도라면 천하대병원의 누구와 경쟁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부터 시험 준비만 열심히 하면…….’
김석용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의외의 변수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미처 생각지 못한 강력한 경쟁자가.
‘잠깐만. 이 녀석이 작정하고 나서면 어떻게 되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 옆자리에 앉은 시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전공의 시험 1등은 언제나 4년차 몫이었다.
단 한 번도 예외도 없이.
일단 전문의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연차이기도 했고, 임상 경험도 2, 3년차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현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얘는 수준이 달라…….’
일단 주요 가이드라인과 도표를 죄다 외우고 있다시피 했다.
교과서에 나온 내용은 물론이고, 의국원들 가운데 최신 지견에도 제일 밝았다.
이제 막 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논문이라도 챙겨 읽는 게 아닌 이상…….’
일과 중에는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을 텐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시, 시현아… 너 올해 전공의 시험 보니?”
김석용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레지던트 4년 중 2번만 응시하면 되는 전공의 시험인데, 어쩌면 올해는 안 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시현의 대답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아, 네. 올해하고 내년에 둘 다 봐야 합니다.”
“아… 그래?”
“1, 2년 차에 다른 일정이 겹쳐서 시험을 못 봤거든요.”
‘하필이면…….’
전공의 시험은 2, 4년차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아 살짝 기대했는데…… 안타깝게도 요행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시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험 성적이 엇비슷하다고 해도… 아니, 시험을 조금 더 잘 본다고 해도 연구 실적에서 격차가 너무도 컸다.
AI 연구는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이미 정약준 교수가 극찬한 약물, ASP-9022 연구가 3상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음. 아무래도 어렵겠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석용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좋은 기회지만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연차 상관없이 뽑는다고 하니 다들 이번 시험 열심히 준비해서 지원해보도록 하세요. 홉스 에킨스 사정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2명 정도 보내실 생각인 것 같던데.”
이광섭이 레지던트들에게 해외 연수 지원을 독려했으나, 김석용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2명이어도 쉽지 않아. 설령 우리 병원에서 1, 2등이 다 나온다고 해도…….’
정약준 교수가 아무리 경쟁을 강조했다고 해도 결국은 천하대병원에 있는 제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것이 목적 아니겠는가.
두 자리 중 하나는 무조건 그들 몫으로 남겨둘 터였다.
그리고 설령 그가 천하대 몫을 남겨두지 않고 오로지 성적으로 타 병원 레지던트들에게 추천장을 써준다고 해도 삼아대병원에 2장을 다 주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자칫 형평성의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기 때문.
그로서도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봐도 시현이 버티고 있는 한 기회를 잡기가 어려워 보였다.
‘대견한 녀석…….’
사실 오늘 정약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시현이 기획한 연구들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쟁취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후배에게 밀린 셈이라 서운한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거기에 자신뿐 아니라 전국에 있는 4년차 중 누구를 데려와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지.’
장고 끝에 김석용이 내린 결론이었다.
혹여 시현이 불편해할 수 있으니 서운한 내색도 하지 않기로 했다.
후배들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치프가 된 마당에 의국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 수 없었다.
“시현아.”
“네?”
“아무래도 네가 갈 자리인 것 같다. 가서 많이 배우고 와라.”
김석용이 시현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선생님은 해외 연수 관심 없으세요?”
“치프 일이 워낙 중요하잖냐. 바쁘기도 하고 자리를 비우기 좀 그래서…….”
일단은 치프를 핑계로 둘러대기로 했다.
마침 이광섭의 레지던트였던 시절 활약상을 함께 듣지 않았던가.
치프의 역할은 단순한 레지던트 대표가 아니었다.
선배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의국원들을 이끌어가는 자리였다. 교수들이 일일이 챙겨줄 수 없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연구를 수행하고 논문을 쓸 때 필요한 지식들을 직접 전달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만 너무 좋은 기회 같은데요. 실은 저도 여기서 해야 할 연구가 있고 한창 외래 볼 때라…… 선뜻 지원하기가 꺼려지네요.”
“진료도 연구도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런데 이건 다시 오기 힘든 기회야. 우리 의국에서는 네가 제일 경쟁력이 있기도 하고.”
“네…….”
“의국도 중요하지만 네 커리어도 신경 써야지. 병원 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전공의 시험 1등 해서 꼭 다녀와라.”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서 추천서도 받고 제대로 배우고 오겠습니다!”
시현은 이내 마음의 짐을 던 듯 밝게 웃어 보였고,
모두가 훈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래. 너라면 잘 할 거다.”
그렇게 몇 순배 술이 더 돌자 김석용 또한 아쉬웠던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슬슬 정리할 시간인 것 같구먼. 우리 전공의 선생님들 모두 우수하니까 꼭 한 명은 연수 다녀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김 선생도 천 선생도 열심히 준비하게.”
이광섭이 두 사람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과장님!”
두 사람 모두 씩씩하게 대답했으나, 한 명은 이미 마음을 많이 내려놓은 상태였다.
“특히 천 선생은 4년차들과 경쟁해야 하니까 더 열심히 준비하고. 아, 그리고 보니 아까 강연장에서도 이번 연수에 관심을 보이던 레지던트가 한 명 있었던 것 같은데.”
“네? 그게 누구……?”
그러나 다음 순간 이광섭이 나직이 중얼거린 말에 김석용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구였더라……. 아, 세연대병원 4년차 나…… 무슨 선생이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