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Chapter 39. 치프 (1)
“누구였더라……. 아, 세연대병원 4년차 나…… 무슨 선생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다음 순간 이광섭이 나직이 중얼거린 말에 김석용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
두근두근.
이광섭이 떠난 지 한참 되었으나 김석용의 심장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다.
‘세연대병원 4년차… 거기에 성이 나 씨인 사람은…….’
나희선.
단 한 명뿐이었다.
‘희선 쌤이 연수에 관심이 있었다니…….’
생각해보면 평소에 전문의 마치고 해외로 유학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니 그녀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을 터.
- 숙식 제공에 체류비도 일부 지원할 예정이니까 항공권하고 가서 휴일에 개인적으로 쓸 돈 정도만 챙겨가면 될 것 같은데?
돈도 얼마 들지 않는 데다가…….
- 수련 공백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학회 교육이사하고 이야기해서 해외 병원에서 근무하는 기간도 레지던트 수련으로 인정해주기로 했으니까.
전문의 시험 응시 자격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
‘같이 연수를 갈 수만 있다면…….’
그는 앉은 자세로 등을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해 전 PGR 이후로 그녀와는 미묘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학회 끝나고 따로 만나서 밥도 몇 번 먹었고, 요즘에는 특별한 일 없이도 종종 연락도 주고받았고.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이것이 ‘썸’이라는 확신은 늘 가지고 있던 김석용이었다.
문제라면 그 ‘썸’이라는 것을 3년째 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희선 쌤이라면 연구도 열심히 했을 테니…… 일단 전공의 시험에서 나란히 1, 2등을 한 뒤에 추천서를 받고 연수까지 같이 가면…… 이제 사귀는 건가?’
이번 컨퍼런스에서 SPN-1001 발표로 극찬을 받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김상진 교수를 완전히 제압하다시피 했으며, 정약준 교수의 눈에 들기까지 한 상황.
실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시나리오였으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미국은 월 렌트비도 비싸니까 홉스 에킨스 근처에 숙소도 같이 잡고……. 잠깐만. 그건 조금 이른가? 아니지. 아니야…… 의외로 개방적인 사람일 수도…….’
게다가 오늘은 1년 중에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날이기도 했다.
평소의 소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의 상상은 어느덧 망상의 영역에 한쪽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던 찰나.
‘왜 괜한 말을 해서…….’
방금 의국원들 앞에서 했던 말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슬며시 눈을 뜨고 주변 반응을 살폈다.
“역시 치프 선생님!”
“의국 생각하는 마음에 책임감이……. 정말 대인배이신 듯.”
“와, 우리 의국 분위기 진짜 좋다.”
의국원들 모두가 자신을 칭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중간중간 해외 연수 어떻게 양보 좀 안 되겠냐고 시현에게 매달리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으나,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입이 방정이다. 입이…….’
이제 뭐라고 한단 말인가.
보는 눈만 없었더라면 분명 손바닥으로 입을 때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뒀다면 시현에게 잘 배우고 오라는 말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터.
‘으윽…… 갑자기 머리가.’
가슴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두근거리는 느낌.
거기에 숙취와 울렁거림이 더해지자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오랫동안 속을 썩이던 편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는 또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 * *
“선생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아무래도…….”
“저, 선생님……?”
“아, 괜찮아. 머리가 좀 아프네.”
황진호와 김원기가 걱정스레 물었고 김석용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간신히 대답했다.
“김석용 선생님…… 왜 그러시지?”
“아까 보니까 술을 좀 드시던데……. 과장님 일어나시고 갑자기 이러시네요.”
“속상한 일 있으신가?”
두 사람이 김석용의 눈치를 보며 작게 소곤거렸다.
오직 시현만이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회귀 전 4년 차, 그러니까 김석용이 펠로우 1년차이던 그해 봄에 나희선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소식에 김석용은 퀭한 얼굴로 몇 주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거의 우울증의 진단기준을 충족할 정도라 시현이 조심스레 물었고, 김석용은 낙담한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소심한 성격 탓에 좋은 기회… 좋은 인연을 너무 많이 놓치고 살아온 것 같다고…….
그때 그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고민되실 것 같은데…….’
치프 업무인가 나희선과 함께하는 두근두근 해외 연수인가.
분명 나희선을 따라 해외 연수에 지원하고 싶을 텐데…… 이미 치프 일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지금 상황이라면 전공의 시험에서 1등을 해도 선뜻 가겠다고 말하기가 민망한 상황이었다.
생각이 복잡할 때는 일단은 혼자 두는 것이 최선.
“오늘 좀 피곤하신가 보네. 우리는 저쪽 선배님들한테 인사드리러 가자.”
시현이 황진호와 김원기를 챙겨 저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와 그의 옆 빈자리에 앉았다.
* * *
“석용 쌤, 혹시 머리 아파요?”
병동 간호사 이선지의 말에 김석용은 눈을 떴다.
“네? 아, 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생긴 편두통을 어찌 알고…….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이선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표정, 평소에 편두통 있을 때 딱 그 표정인 거 알아요? 벌써 몇 년째 보는데… 척 보면 알죠!”
이선지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김석용으로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니 두통약이라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아파 죽겠는데 어려운 퀴즈라도 맞힌 듯 싱글벙글하는 모습이 오히려 두통을 악화시키는 것 같았다.
“규희야, 너 아까 ‘그거’ 챙겨둔 거 있지?”
이선지가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또 다른 간호사, 신규희에게 물었다.
“네? 저,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규희가 또 있어? 아까 가방에 따로 챙겼었잖아. 그거 몇 개 줘봐 봐.”
“안 돼요! 그건 시효가…….”
그녀는 맡겨둔 물건이라도 찾듯 신규희에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먹어도 안 죽어.”
‘뭐지…….’
‘먹어도 안 죽는’ 그것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질 무렵, 이선지는 신규희의 가방을 끌어당겨 거의 뺐다시피 했다.
“자! 이거 드세요!”
김석용은 이선지가 건넨 알약 두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이레놀…… 인가요?”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크기의 흰색 코팅정제.
평소 그가 종종 먹던 타이레놀이 확실했다.
제약회사마다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의 성분명) 성분의 약은 대체로 이런 모양이었다.
“네! 선생님 두통 있을 때 병동에서 이거 챙겨 드셨었잖아요! 아 그리고 이것도 있어요!”
그녀는 김석용에게 가늘고 작은 흰색 약을 몇 개 더 건넸다.
“요건 위장약! 메스꺼울 때 챙겨 드시던 거 맞죠? 두 개 드세요!”
두통약에 이어 위장약까지.
가방에서 약이? 도라x몽인가…….
평소 편두통이 한 번 생기면 두통보다 메스꺼움이 더 불편했었는데, 김석용이 먹던 약 조합을 어떻게 알고 챙겨왔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신규희 선생님, 평소에 항상 약을 챙겨서 다니시나요? 준비성이 정말 좋으시네요.”
“저, 그게…….”
신규희는 곤란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고, 이선지가 주위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병동 상비약 중에 오래돼서 버리려고 모아놓은 거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다고 규희가 챙기더라고요. 회식하면 다음 날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아서 혹시나 해서 덜어온 거예요.”
버리기는 아깝고 혹시나 쓸데가 있을까 챙겨왔다는데, 마침 두통약 필요한 사람을 딱 만난 것이었다.
“아, 두통이 좀 심해서 챙기긴 했는데……. 그런데 그거 유효기간 좀 지나서 안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신규희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이선지는 괜한 유난 떨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게 며칠 지났다고 해서 상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환자분한테 드리기는 좀 그렇고……. 폐기하는 것보다는 먹어서 없애는 게 ‘친환경적’이라고요.”
‘그, 그런가?’
유통기한 지났어도 그냥 먹으라는 말인데 친환경을 섞어 놓으니 뭔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얼른 드세요! 두통 시작되기 전에 바로 먹어야지 늦으면 효과 없잖아요?”
가뜩이나 마음도 심란한데 두통까지 심하니 괴로운 상황.
“네. 고마워요.”
그는 곧바로 얼음물에 두통약과 위장약을 삼켰다.
술과 약을 동시에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에서도 상식이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두통과 메스꺼움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고, 이선지는 뿌듯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30분 뒤.
“선생님?”
“…….”
“김석용 선생님?”
선배들과 얘기를 나누던 황진호가 돌아와 김석용을 불렀으나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오늘 어디가 안 좋으신가?”
“아, 아까 두통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깜빡 잠드셨나 봐요.”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향해 이선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래요? 다음 차로 옮길 때 돼서 과장님이 자리 정리하자고 하셨는데…….”
황진호가 몇 차례 김석용을 더 흔들어 깨웠으나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치프 선생님이 평소에 술 잘 안 드셔서 그렇지, 술 엄청나게 센 분인데 왜……? 이거 혹시?”
“혹시…… 뭔데요?”
황진호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이선지 또한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의식을 잃으신 거 아닌가요? 어디 부딪치시거나 한 거 없죠?”
“없어요! 제가 계속 옆에 있었는걸요?”
물론 옆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술을 마시느라 김석용을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쿵 소리가 났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뭔가 이상한데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는 곧장 김석용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술이 완전히 깬 듯한 표정의 황진호가 외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술이 확 깬 표정의 황진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런! Tachycardia(빈맥)가 있어요!”
“네? 몇 회인데요?”
“10초에 25회 정도니까 150회 이상이요!”
“그럼 엄청 빠른 거잖아요!”
“시현아! 잠깐 이쪽으로!”
그는 반사적으로 시현부터 찾았다.
권진은을 제외하면 가장 고년차이기도 했고,
웬만해서 환자의 바이탈이 흔들릴 일 없는 정신과에서 유일하게 내과 환자를 잘 보는 이가 그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저쪽에서 선배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시현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김석용 선생님이 좀 이상해. 불러도 대답이 없고…… 빈맥도 있어!”
‘준비해줘’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시현은 김석용의 심장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