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Chapter 39. 치프 (2)
[SORA : ‘시청타촉의 포션’을 사용합니다.]
시현은 김석용의 심장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럽덥- 럽덥-
‘분당 140회 정도……. 맥이 빠르고 약하다.’
안정 시 정상 심박수가 100회 미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상당히 빨리 뛰고 있었다.
“계속 140회 정도인데…….”
시현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는 알림창은 없지만…….’
갑작스러운 바이탈 변화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왜 갑자기 빈맥이?”
황진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맥도 짚어보지 않은 시현이 어떻게 맥박수를 아는 건지 궁금할 법도 한데,
이미 취한데다 급박한 상황이라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헉. 그럼 엄청 심한 거 아닌가요? 도대체 왜?”
“왜긴요! 이거 혹시 쇽(Shock) 아닐까요?”
황진호와 이선지의 표정이 급하게 어두워졌다.
“쇽이라면…… 혈압이 떨어져서 그걸 보상하기 위해 맥박이 올랐다는 뜻인가요?”
“그, 그런 거 아닐까?”
“지금 보니까 열도 있는 거 같아요!”
이선지가 김석용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발열이 있다고요? 혈압 저하에 빈맥…… 그리고 의식 저하까지!”
“그러니까요. 아까 우리가 여러 번 불렀는데 대답도 못 하셨잖아요!”
두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이광섭과 진철영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가?”
“김석용 선생님이 빈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혈압도 낮은 것 같고요.”
“그래? 갑자기 왜…….”
“이선지 쌤은 일단 119 불러주세요. 진호야, 여기 같이 부축해줘.”
시현은 교수들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는 한편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더 가져와 김석용을 옆으로 눕혔다.
‘이게 무슨…….’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
웅성웅성.
의식이 저하된 상태로 누워있는 김석용의 주변으로 의사들, 바이탈과는 거리가 먼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들었다.
“호흡은 안정된 것 같으니까 일단 다리 좀 높게 하고 보자.”
하지 거상(Leg Elevation)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혈압이 떨어져 보상적으로 맥이 빨라진 거라면 일단은 체액을 상체로 보내는 것이 먼저였다.
사실 별다른 치료 도구가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도 했고.
“응. 알겠어!”
황진호가 곧바로 김석용의 다리를 들어 올렸고, 이내 빠른 맥박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분당 맥박은 110회 정도로 줄어들었고…… 일단 효과는 있는데.’
아직 정상 범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모르는 곳에서 출혈이 진행되고 있다거나, 심한 부정맥인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평소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술을 즐겨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의국에서 술이 가장 센 사람 중 한 명이 김석용인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몇 분 후.
삐오- 삐오-
근처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구급대원들이 맥줏집으로 들이닥쳤다.
“환자분은 어디 계십니까?”
“여기 누워계신 분입니다. 다친 곳은 없고 알려진 기저질환도 없습니다. 빈맥과 의식 저하가 있습니다. 이송 부탁드립니다.”
“아, 의사신가요?”
“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삼아대병원 응급실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구급대원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김석용을 들것에 올려 계단을 내려갔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게.”
“네, 과장님. 연락드리겠습니다.”
시현과 황진호도 바로 구급대원들을 따라나섰다.
이광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선지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사람 별로 없네.’
응급실에 도착한 황진호는 일단 주변 분위기부터 살폈다.
주말 저녁답지 않게 그리 바쁘지 않아 보이는 응급실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휴우……. 다행이다.’
환자가 많거나 혹은 환자가 많지 않아도 위중한 환자들이 섞여 있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바쁜 응급실에 민폐가 되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상황은 아닌듯했다.
“으으…….”
김석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신음을 내뱉을 뿐 정신이 온전치 않았고, 황진호는 구급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일단 입구에서 가까운 빈 베드에 그를 눕혔다.
그리고는 곧바로 응급실 접수처를 향했다.
아무리 병원 직원이라도 처방을 내려면 OCS에 이름을 올려야 했으니까.
바로 그때, 누군가 다가와 앞을 막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정신과 선생님들 아니세요?”
“하하. 아, 안녕하세요. 수선생님.”
“어휴 술 냄새! 이게 어디서 나는 냄새야?”
응급의료센터 수간호사, 김동미가 베드에 누운 김석용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어디서 나는 걸까요?”
황진호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옆으로 지나가려고 하는데,
“접수는 절대 안 돼요! 절대!”
수간호사가 매의 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저희 치프 선생님 상태가 영…… 일단 접수부터…….”
“아니, 우리 주취자 안 받는 거 뻔히 알면서! 정말 이러기 있어요?”
“그게……. 오늘 입퇴국식이라 부득이하게. 하하하.”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황진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진짜! 인턴 때 취객들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다 잊어버린 거예요? 선생님들!”
그들 또한 한때는 응급실 인턴이었고 취한 채로 응급실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환자들을 여럿 보았더랬다.
119 대원과 싸우는 일은 다반사에 안정이 필요한 환자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심지어 그들에게 폭행당하는 의료진도 있었다.
“김석용 선생님이 평소에 술 마시고 정신 잃은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리고 오늘은 술도 거의… 아니, 조금 마셨고요.”
김석용이 마신 술잔을 일일이 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황진호는 최대한 둘러대기로 했다.
“조금이요? 술 냄새가 이렇게 나는데…… 아무튼, 여기는 단순히 취한 사람들 오는 곳이 아니에요! 어디 한 군데 부러져서 온 거라면 모를까!”
수간호사는 없는 골절도 만들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한 걸음 다가왔고,
히이익.
황진호는 그 서슬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저… 아까까지는 괜찮았었는데, 갑자기 빈맥이… 수선생님, 저희 치프 선생님 일단 수액이라도 좀…….”
“아니, 응급실이 무슨 정맥영양 클리닉인 줄 알아요? 의식 없는 환자들 천지에 툭하면 CPR 터지는데, 뭐라고요? 수액? 수우액?”
“그게 아니고 저희 선생님도 의식이 조금 떨어지는데……. 그리고 오늘은 좀 한가해 보이…….”
“멈춰요! 어디서 그런 입에 담지도 못 할 말을!”
수간호사의 두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술을 그렇게 처먹은…… 아니, 술 많이 마시고 혈중알코올농도 올라가면 필름 끊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
그 말에 황진호는 머리를 긁적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절대로 과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모든 의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아닌가.
특히나 정신과는 알코올 중독을 진료하는 과인데…….
그 과의 치프라는 작자가 회식 자리에서 술이 떡이 되어 의식을 잃고 들어왔으니.
여간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주에는 외과 신규 1년차 쌤들이 단체로 꽐라가…… 아니, 의식 불명으로 들어오더니만, 이젠 정신과까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매년 이맘때만 되면 다들 왜들 그러는지 몰라 정말!”
수간호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바로 그때.
“어머! 오랜만이에요.”
“이제 3년차 됐다고 응급실은 안 오는 거예요? 서운하게?”
“아까 보호자들이 주고 간 커피 있는데 드릴까요? 아, 밤이라 안 드시려나? 디카페인도 있어요!”
스테이션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고, 황진호의 시선이 자연 그쪽을 향했다.
‘뭐지?’
그쪽에는 이광섭과 통화를 마치고 한발 늦게 응급실에 도착한 시현이 서 있었다.
병원장도 아니고 레지던트 한 명 왔다고 간호사 여럿이 몰려들어 환대하는 건 확실히 그가 알고 있던 응급실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응급실에 와서 회식이라도 쏜 거야? 도대체…….’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엄청난 존재감이었다.
화아악.
그리고 보니 오늘따라 그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분명 몇 년째 알고 지내던 자신의 동기 시현이었는데,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수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현이 이쪽으로 다가와 수간호사에게 알은척했다.
“취해서 응급실 오는 거 싫어하시는 거 알면서도 찾아왔네요…… 바쁘실 텐데 언짢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system : 스킬 ‘당신이 옳다’를 사용합니다.]
“어머, 시현 쌤도 왔어요? 아니, 언짢았다는 게 아니라……. 괜히 몸 상할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죠. 호호호. 에이, 설마 내가 쌤들 내쫓기라도 할 줄 알았어요?”
별것 아닌 한 마디에 수간호사의 기세가 대번에 누그러들었고,
‘아니…….’
그 모습을 보던 황진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방금 진짜로 내쫓으려고 하셨잖아요!’
분명 응급실 베드에 태운 채로 응급실 밖으로 밀어버릴 분위기였는데…….
건강 생각해서 괜히 해본 말이었다니.
말도 안 되는 차별 대우였다.
“설마요! 수선생님이 그럴 분 아니라는 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시현아, 그럴 사람 맞아. 그러고도 남을 사람…….’
황진호는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가까스로 삼켰고,
“그럼요! 안 그래도 우리 액팅한테 김석용 선생님 잘 봐달라고 이야기하던 참이었어요.”
‘접취(접수취소)하고 소금 뿌리라고 말하려고 했겠지…….’
언제 그랬냐고 따지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아, 그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무슨. ‘우리’ 사이에. 호호호. 올해도 덕분에 ‘소고기’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사장님이 저희를 얼마나 반겨주시던지…….”
‘진짜로 회식을 쐈어? 그것도 소고기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황진호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이이길래 주취자를 앞에 두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드신 것도 아닌데 이런 상태라 검사는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응급실에 폐가 되지 않게 기본적인 평가만 해보고 바로 가겠습니다.”
“폐라뇨 별말씀을요. 바로 준비할게요.”
수간호사는 어느새 수동식 혈압계를 가져와 김석용의 팔에 커프를 감고 손수 혈압을 재고 있었다.
“어라? 혈압이…….”
다음 순간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안 좋은가요? 많이 떨어졌나요?”
“조금 낮아요. 90에 60정도? 맥박은 100회 약간 넘고요. 내과 당직한테 노티하는 게 좋으려나요?”
아주 심한 저혈압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혈압이 낮아져 있었고,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 드신 것 때문에 저런 거라면 차라리 안심인데, 혹시 저희가 잠깐 못 본 사이에 부딪혀서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술 때문이려니 하다가 혹 다른 질병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요. 요즘 젊은 분들도 은근히 뇌출혈 잘 생기던데요.”
“네. 그래서 Brain CT 찍으실 수 있게 준비 먼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방은 바로 입력할게요.”
두부 외상을 평가하는 데는 단순 CT만을 찍기도 하지만, 조영제를 써서 병변을 봐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정식 처방 전에 구두로 확인하고 먼저 정맥 루트를 확보하기도 한다.
“네, 알겠어요. 혹시 모르니 라인 먼저 확보할게요. Sample(혈액검사)도 미리 해놓고요.”
수간호사가 시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잠깐만.
라인 확보면 결국 수액 준다는 말 아닌가.
아까는 술 취한 사람 수액 놔주는 곳 아니라고 그렇게 화를 내더니…….
이제는 어디서 따로 영양제를 구해다가 놔준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오늘 회식은 정신과인가? 천 선생도 왔구먼.”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근엄한 목소리에 황진호의 몸이 굳는듯했다.
‘하필이면 조광필 교수님이……. 아, 망했다.’
레지던트들에게 엄격하기로 소문난 그가 아니던가. 이번엔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마음을 졸이는데, 조광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수선생님, 수액은 이왕이면 5DS(Dextrose Saline, 포도당생리식염수)로 주세요. 아, 그리고 멀티비타 남은 거 있으면 하나 믹스해주시고.”